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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복을 읽는 아침' [북적북적]

'체육복을 읽는 아침'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376 : 체육복을 읽는 아침
 
신은 자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엄마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엄마도 무척 바쁘다. 엄마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으니 우리에겐 선생이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다. ..(중략)..
오늘도 어디에선가 비를 맞고 있을 아이들에게 그 마음 하나 젖지 않도록 우산을 펴주는 이들이 있어 나도, 하루를 학교에서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체육복을 읽는 아침》中

<골라듣는 뉴스룸>의 일요일 책방 <북적북적>, 이번 주에 소개하고 맛보기로 읽어드리는 책은 《체육복을 읽는 아침 (이원재 지음, 정미소 펴냄)》입니다. 이 책 제목을 말하면 듣는 이들의 반응은 모두 같습니다. "체육복을 '읽는' 아침? '입는' 아침이 아니고?" 네, 체육복을 '읽는' 아침, 맞습니다. 《체육복을 읽는 아침》 은 국어교사 이원재 선생님의 첫 책입니다. 이원재 님은 올해 13년차 교사로, 강원도 3개 학교를 거쳐 지금은 정선고등학교에 재직중입니다. '체육복을 읽는 아침'이라는 말은 이 책이 세상에 나온 인연이 됐던 말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대리사회》, 《당신이 잘 되면 좋겠습니다》 등을 쓴 김민섭 작가가 강원도의 한 학교로 강연을 갔다고 합니다. 김 작가는 그 곳에서 학생부장이던 이원재 선생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학생들이 왜 교복 대신 체육복을 입는지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됩니다. '편하니까 그런 것 아닌가' 하는 생각하던 김민섭 작가에게 이원재 선생님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편해서 입는) 애들도 있죠. 그런데 교복이란 건 보살핌의 상징 같은 거예요. 집에서 매일 교복 세탁하고 다림질해서 주면 다 교복 입겠죠. 근데 구겨진 교복을 입고 나와야 하는 아이들이 있어요. 그 모습을 자신이 좋아하는 교사나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거예요. 다 그런 건 아니어도요. 그런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주는 게 학생부장인 저의 일이고요."
이 말을 듣고, 김민섭 작가는 '이 사람의 책을 만들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체육복을 입는 마음을 '읽는' 학생부장의 다른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어서요. 그렇게 해서 이 책은 지난 달 텀블벅 펀딩을 거쳐 세상에 나왔습니다.
 
비단잉어 코이는 어항에서 살면 10cm도 안 되는 크기로 살지만, 연못이나 강에서는 사람 크기까지도 자란다고 한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데 영향 주는 것은 환경의 영향도 있겠지만, 믿을 만한 어른이 자신을 뭐라고 불러 주느냐에 따라, 그 이름에 맞게 스스로를 생각하고 그 가슴속에 어떤 이상을 품느냐에 따라 성장의 정도가 달라진다고 나는 아직 믿는다. 우스꽝스러운 명칭일지라도, 내가 그가 그리되리라는 믿음과 함께라면, 그것이 그의 가슴속에 자그만한 희망의 씨앗으로 심길 것을 함께 믿는다.
-《체육복을 읽는 아침》中

이 글은 저자가 담임을 맡은 반 학생들에게 '1인 1역할'을 주면서 마치 국가공인자격증처럼 '경청지도사', 취업정보수집담당관', '교실 자리추첨 기능인' 같은 그럴싸한 이름을 붙이고 사진과 담임선생님 도장까지 넣은 자격증을 만들어준 일화의 마무리 부분입니다.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해야하는 특성화고 학생들인데, 자격증 시험에 번번히 떨어져 '이래서 내가 취업할 수 있을까' 풀 죽은 학생들에게 이렇게라도 힘을 주고 싶은 마음이었던 거죠.

우연인지 운명인지 희한하게도 자꾸만 '학생부장'을 맡아온 이원재 선생님은 요즘 말로 '동번서번 (동에 번쩍 서에 번쩍)'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무섭기만 한 '학생부장' 선생님과는 더욱 거리가 멉니다. 특성화고 근무 때는 학생이 기업체에 면접 보러 갈 때 같이 가고, 부모님이 안 계신 학생이 아플 때는 병원에 데려 가고, 시골이라 집이 멀어 그 핑계로 결석이 잦은 학생들은 등교길에 들러 태워 오고, 실기를 잘하는 아이들이 국어 실력 때문에 기능 시험에서 실력 발휘를 못 할까봐 문제 독해력을 높여주려 보충수업을 자처하기도 합니다. 국어 시간에 글쓰기를 하는 날이면 라면 국물을 끓여 나눠 마시며 '라면'에 대한 글을 씁니다. 지쳐서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웰컴 투 동막골'의 촌장님처럼 '뭘 좀 마이 멕여야겠다'는 생각으로 빵과 코코아를 나눠주는 '사랑해 모닝카페'를 열기도 했고요. 지금도 저자는 등굣길에 음악을 틀고 호떡을 굽고 어묵을 삶고 코코아를 나눕니다.

이원재 선생님도 처음부터 학생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이전과는 다른 선생이 하나 태어나게 된 출발점' 이었다고 책에 쓴 사건이 있었습니다. 두 해 연속 담임을 맡았던 효석이(가명)가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고 귀가하다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일이었어요. 효석이가 세상을 떠나던 그 날 저녁, 이원재 선생님의 퇴근길이자 효석이의 출근길에 길에서 나눈 인사가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죠. 효석이의 영정 사진이 교실에 마지막으로 들렀다 가고, 태어나서 가장 많이 눈물을 흘린 이원재 선생님은 그 이후로 학생들이 달리 보이게 됐다고 합니다.
 
교문에서 아이들을 맞이하다 보면, 아침에 눈을 뜨고 교복을 챙겨 입고 버스를 타고 멀쩡하게 교문으로 들어서는 그들의 모습이 그렇게 귀해 보일 수가 없다. 그래, 오늘 행복해야 하고, 지금 즐거워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좋아하는 일을 찾게 되고, 자신이 언제 행복한지를 알게 된다.
그때부터, 학생다움이라는 말, 규제와 금지라는 말, 그 말들에 대한 미움이 마음속 깊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살아 있어야 그 다음도 있는 것이다. 삶의 지속, 그것을 위해 선생이 학생에게 해줄 말은 무엇인가.
살아있기만 하면 괜찮아.
조금 힘들어도 괜찮아.
지금 남들이 너보고 뭐라고 하든 괜찮아.
그래, 너니까 괜찮아. 이 문장들의 앞 성분을 다 빼고, '괜찮아'만 남겨 놓아도 괜찮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한 사람이 되고 싶다.
-《체육복을 읽는 아침》中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교사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갈수록 많아지지만 자신은 '부표'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썼습니다. 힘들어하는 학생이 자신을 붙잡고 잠시나마 떠서 숨을 고를 수 있다면 무척이나 보람 있을 거라고요.

부표 같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는 아이들은 얼마나 다행인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부표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출판사 '정미소'의 낭독 허락을 받았습니다.

*편집: 하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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