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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이라는 말, 믿을 수 있을까?

[취재파일]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이라는 말, 믿을 수 있을까?
지난 1월 28일 SBS 단독 보도로 시작된 일련의 보도를 통해, 이재명 후보의 배우자 김혜경 씨의 사적 심부름을 담당하는 수행비서로 지목된 배 씨가 어제(2일) 두 번째 입장문을 발표했습니다. 배 씨는 그간의 입장을 바꿔 제보자 A 씨에게 "상식적인 선을 넘는 요구"를 한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느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이라고 두 번이나 강조하면서, 이재명 후보 부부와 관계없이 자신이 독자적으로 결정한 행동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느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이라는 배 씨의 설명을 그대로 모두 믿기는 어렵습니다.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번 의혹이 어떻게 시작됐고, SBS가 어떤 보도를 했으며, 배 씨가 애초의 강경한 입장을 번복하고 "상식적인 선을 넘어서는 요구"를 한 사실을 인정하게 된 계기는 무엇으로 추정되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배 씨가 진실을 전부 말하고 있지 않다고 의심할 만한 근거는 무엇인지 차근차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재명 "아내 의전용으로 뽑았다? 황당무계한 일"

이재명 후보는 지난해 12월 28일 한국지역언론인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 아내 의전용으로 누구를 뽑았다, 이런 황당무계한 일이죠. 제 아내가 경기도 행사에 참여한 게 아마 거의 손에 꼽을 숫자밖에 없는데 도지사 부인이 도의 공식행사에 몇 번, 두 번? 세 번? 이 정도 참여했는데 거기 총무 의전팀이 참여한 걸 가지고 개인 의전으로 뽑았다고 (국민의힘이) 고발했어요."

이재명 후보가 배우자 의전을 위해 비서를 공무원으로 채용했다고 주장하면서 국민의힘이 이 후보를 국고손실 혐의 등으로 고발한 것에 대해서 이 후보가 공식석상에서 의혹을 정면 부인한 것입니다.

민주당도 배 모 씨가 이재명 후보자 배우자 김혜경 씨의 수행비서 역할을 했다는 주장을 "가짜뉴스"라고 반박했습니다. 12월 29일 홈페이지에 게시한 '팩트체크' 자료를 통해 민주당은 "국민의힘에서는 후보 배우자가 경기도 소속 5급 사무관을 수행비서로 채용한 일과 관련해 고발한다고 밝혔다"면서 "그 전인 11월 25일 박수영 의원이 후보 배우자가 공무원 수행비서를 둔 것으로 확인됐다고 가짜뉴스를 유포한 바 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민주당은 "그러나 후보 배우자 측은 국민의힘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공무원을 수행비서로 채용한 적 없다"라면서 "국민의힘의 악의적 허위사실 유포에 대한 법적 조치를 진행 중이다. 엄중히 대처하겠다"라고 밝혔습니다.

이재명 후보와 민주당은 적어도 두 차례 이상, 경기도 5급 사무관이었던 배 모 씨가 이재명 후보의 배우자 김혜경 씨의 수행비서로 채용된 것이 아니라고 공식적으로 주장한 것입니다.
 

제보자 A 씨 "배 모 씨 지시받아 김혜경 씨 위한 사적 심부름했다"

그런데 SBS는 지난 1월 28일 이재명 후보와 민주당의 주장이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단독 보도를 했습니다. 김혜경 씨의 사적 심부름을 처리하는 비서로 지목된 인물인 경기도 5급 사무관 배 모 씨(지금은 퇴직)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아서 김혜경 씨 등을 위한 사적 심부름을 했다는 전직 경기도 공무원의 증언을 보도한 것입니다.

제보자 A 씨는 경기도 7급 공무원으로 재직하던 중 배 씨로부터 김혜경 씨를 위한 사적인 심부름을 지시받았다며, 배 씨로부터 지시를 받은 내용이 담긴 텔레그램 메시지와 배 씨로부터 업무 지시를 받는 내용이 녹음된 통화 녹음파일 등을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특히 문제가 됐던 것은 김혜경 씨를 위해 의약품을 대리 수령한 문제였습니다. 제보자 A 씨는 당시 경기도 5급 사무관이었던 배 모 씨로부터 지시를 받아서, 김혜경 씨를 위한 의약품을 수령한 후, 옷가지 등 다른 물품과 함께 의약품을 김 씨의 자택 앞에 가져다주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배 씨의 지시를 받아서, 또 다른 경기도 공무원인 여성 B 씨로부터 김혜경 씨가 복용할 의약품을 건네받은 후, 이를 배 씨가 고른 쇼핑백에 넣어서, 이재명 후보와 김혜경 씨의 성남시 수내동 자택 앞에 있는 소화전 문고리에 A 씨가 직접 걸어놓았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제보자 A 씨와 배 씨가 주고받은 텔레그램 메시지에 상세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제보자 A 씨는 또 김혜경 씨가 자주 찾는다는 식당에서 음식을 받아서 수내동 자택으로 직접 배달을 했으며, 이 과정을 일일이 사진으로 찍어서 배 씨에게 보고했다고도 주장했습니다. 마치 물품 배송을 끝낸 택배기사가 배송이 완료된 모습을 고객 또는 관리자에게 보고하듯이 말입니다. 이 과정 역시 배 씨와 제보자 A 씨가 주고받은 텔레그램 메시지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A 씨는 이재명 후보자의 아들이 병원에서 퇴원할 때, 이재명 후보 개인 명의 복지카드로 병원비를 대신 결제하기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역시 배 씨의 지시를 받아 이뤄진 일이었다고 A 씨는 밝혔습니다. 김혜경 씨가 검진을 위해서 경기도에 있는 한 종합병원을 방문했을 때,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방문자가 필수적으로 직접 작성하게 돼 있는 문진표를 대리 작성하기도 했다는 주장도 했습니다. 역시 배 씨의 지시를 받아 이뤄진 일이라고 합니다.

제보자 A씨가 음식배달을 하며 배 모 씨에게 보고한 텔레그램 메시지

제보자 A 씨 "일과의 90% 이상이 김혜경 씨 관련 심부름이었다"

제보자 A 씨는 이와 같은 일이 간혹 벌어진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경기도 공무원으로 일할 당시) 일과의 90% 이상이 (배 씨가 지시한) 김혜경 씨 관련한 자질구레한 심부름이었다"라고 SBS 취재진에게 말했습니다.

제보자의 주장대로라면, 배 씨는 김혜경 씨의 사적 심부름을 처리하는 수석 담당자(흔히 쓰이는 군대식 용어로는 '사수'), 배 씨의 지시를 받아 업무를 했던 제보자 A 씨는 차석 담당자(역시 군대식 용어로는 '부사수')라고 볼 수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배 씨는 김혜경 씨의 사적 심부름을 담당하는 수행비서로 채용된 사람이 아니다'라는 이재명 후보나 민주당의 주장은 사실과 다른 가능성이 생긴 셈입니다.

지난 1월 28일 제보자 A 씨의 주장 등을 토대로 처음으로 단독 보도를 시작할 때, SBS 취재진은 이재명 캠프 측에 '배 씨는 김혜경 씨의 사적 심부름을 담당하는 수행비서로 채용된 것이 아니라는 이재명 후보 등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제보자 등의 주장에 대한 답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이재명 후보 측은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제보자에게 김혜경 씨와 관련된 사적 심부름을 직접 지시한 인물로 지목된 배 모 씨의 입장문을 보내왔습니다.

배 씨는 입장문을 통해 수사가 진행 중인 사안이라 세부 답변이 어렵다면서도, 경기도에 수행비서로 채용된 적이 없고 공무 수행 중 후보 가족을 위한 사적 용무를 처리한 적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또 "허위사실 유포로 선거에 개입하려는 시도가 다분해 좌시하지 않겠다"며 국민의힘의 고발로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만큼 수사 과정에서 사실관계가 명확히 밝혀질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허위사실 공표 좌시하지 않겠다"더니 "제가 잘못"…왜?

그런데 이와 같이 강경하게 의혹을 부인했던 배 씨의 입장은 이틀 후인 1월 30일 SBS의 후속 보도로 흔들릴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SBS가 첫 번째 단독 보도를 시작했던 시점인 1월 28일 저녁을 전후해 배 씨가 제보자 A 씨에게 연락을 시도한 사실, 그리고 배 씨가 제보자에게 보낸 메시지의 내용을 SBS가 보도했기 때문입니다.

배 씨는 1월 28일 SBS 보도가 나가기 직전에 제보자인 A 씨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당시 전화를 받지 않았던 A 씨는 다음 날인 29일에 배 씨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배 씨는 제보자에게 "지금 시골이냐? 언제 올라오냐?" 등의 질문을 던진 후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제안했습니다. A 씨가 만남을 거부하자 배 씨는 1월 29일과 1월 30일 두 차례에 걸쳐 제보자에게 아래와 같은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배 씨가 보낸 메시지를 맞춤법에 맞게 교정하지 않고 그대로 옮깁니다.)
 
[2022년 1월 29일 토요일 오후 9시 01분에 보낸 메시지]

00 비서관님. 그동안 저땜에 힘드시게 해서 넘 죄송합니다. 힘드시겟지만 마지막으로 만나뵙고 죄송하다 인사 꼭 전하고 싶습니다.

배 모 씨가 1월 29일에 제보자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
[2022년 1월 30일 일요일 오후 3시 09분에 보낸 메시지]

00 비서관님 어디 얘기할곳도 없고 숨막히는 마음에 문자 남깁니다 제가 다 잘못한일이고 어떻게든 사죄하고 싶습니다 00비서관님 내키진 않으시겠지만 저하고 쌓인 문제 제가 직접 만나서 꼭 죄송하고 사죄하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배 모 씨가 1월 30일에 제보자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

분명히 언론에는 제보자 A 씨의 주장이 "허위사실 유포"이며 "선거에 개입하려는 의도가 다분해 좌시하지 않겠다"라는 입장을 발표했던 배 씨가 비슷한 시점에 정작 제보자에게는 "제가 다 잘못한 일이고 어떻게든 사죄하고 싶다"라고 밝힌 것입니다.

(참고로, 배 씨가 두 번째 메시지를 보낸 1월 30일에는 이재명 후보가 성남시장이었을 때 수행비서로 일했고, 여전히 이 후보의 측근으로 거론되는 백 모 씨 역시 제보자에게 "통화 좀 할 수 있을까?"라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백 씨는 이에 대해 SBS 기자에게 자신은 이재명 캠프와 무관하며 걱정이 돼서 보낸 것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제보자 A 씨 측은 배 씨와 백 씨의 연락을 받은 후 큰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배 씨가 정말로 제보자 A 씨가 "허위사실 유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면, 자신과 과거 자신의 상관의 명예를 훼손할 가능성이 큰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사람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제보자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메시지가 사실이라면 배 씨 역시 제보자의 주장이 허위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사실상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게 된 셈입니다.
 

"상식 넘는 요구" 인정했지만…"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았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배 씨가 어제(2일) 갑자기 일전에 입장문을 통해 발표했던 입장을 뒤집고 제보자 A 씨에게 "상식적인 선을 넘는 요구"를 한 사실을 인정하면서 사과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SBS가 보도한 제보자 A 씨의 주장이 대단히 구체적이고 텔레그램 메시지와 통화 녹음파일 등을 통해 뒷받침되고 있어서 사실관계 자체를 부인하기 힘든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배 씨 본인이 공식 입장과는 달리 제보자에게 잘못을 인정한 점이 드러나면서 더 이상 부인하기는 어려운 처지가 되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후보 부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본인이 혼자 나서서 한 일이지, 이재명 후보 부부를 포함해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았다"는 배 씨의 주장은 여전히 믿기 어려운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먼저 김혜경 씨를 위한 의약품 대리 수령 및 배달 의혹입니다. 배 씨는 2월 2일에 두 번째로 밝힌 입장문을 통해서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았다"라는 입장을 유지하면서 "제가 복용할 목적으로 다른 사람이 처방받은 약을 구하려 한 사실"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배 씨는 "늦은 결혼과 임신에 대한 스트레스로 남몰래 호르몬제를 복용"했다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제보자 A 씨에게 대신 수령해서 김혜경 씨 집 앞으로 배달하라고 지시했던 약품(호르몬제)은 사실은 김혜경 씨가 아니라 자신이 복용했던 것이라는 뜻입니다. 김혜경 씨가 지시한 일이 아니라, 몰래 약을 받기 위해서 자신이 꾸며낸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모님 호르몬약 넣으신 거 맞지요?"라더니…"제가 복용"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와 같은 배 씨의 설명은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제보자가 지난해 3월 25일에 있었던 일이라고 주장하는 '의약품 대리 수령 및 배달' 사건은 아래와 같은 과정을 통해 진행됐습니다. (제보자 A 씨가 제공한 텔레그램 메시지나 녹음파일에 기록돼 있거나, 제보자 A 씨 측이 직접 설명한 내용)

1. 경기도 총무과 5급 공무원인 배 씨가 경기도 비서실 7급 공무원인 제보자 A 씨에게 김혜경 씨를 위한 의약품을 받아서, 김 씨의 성남시 수내동 자택에 배달해주라고 지시한다.

2. 이를 위해 배 씨는 제보자 A 씨에게 또 다른 경기도 공무원인 B 씨(여성)를 만나서 해당 의약품(배 씨가 호르몬제라고 밝힘)을 받으라고 지시한다.

3. 배 씨의 지시를 받은 제보자 A 씨는 또 다른 공무원 B 씨가 자신의 명의로 발급받은 처방전을 이용해 약국에서 구매한 의약품을 B 씨로부터 받는다.

4. 제보자 A 씨는 의약품을 건네받은 사실을 배 씨에게 보고한다. 그리고 두 개의 쇼핑백 중에 어느 쇼핑백에 의약품을 넣을지 배 씨에게 물어본다. 배 씨는 갈색 쇼핑백에 담으라고 지시한다.

5. 제보자 A 씨는 옷가지 등 다른 물건과 함께 쇼핑백에 넣은 의약품을 성남시 수내동 이재명 후보-김혜경 씨 자택까지 가지고 가서, 이 후보-김 씨 자택 앞 소화전 문고리에 걸어놓는다.

6. 제보자 A 씨는 문고리에 약품이 든 쇼핑백 등을 걸어놓은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배 씨에게 보고한다. 그러자 배 씨는 "(쇼핑백에) 사모님 호르몬약 넣으신 거 맞지요?"라고 제보자에게 김혜경 씨를 위한 약품을 챙긴 것이 맞는지 다시 확인한다. 제보자가 맞다고 대답한다.

'사모님 호르몬약 넣으신 거 맞지요?

만약 배 씨의 주장처럼 실제로는 자신이 복용할 약품이었는데 제보자에게 위와 같은 일을 시킨 것이었다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다음과 같은 상황이 발생합니다.

직접 의사에게 처방을 받고 약국에서 구매해서 복용하면 되는 약품을 구하기 위해서 배 씨가

- 다른 경기도 여성 공무원에게 처방을 받고 약품을 구매하라고 부탁한 뒤

- 이를 자신의 지시를 받아서 일하는 공무원 A 씨에게 대신 받아달라고 하고

- 그러면서 A 씨에게는 자신이 쓸 약품이 아니라 도지사의 부인인 김혜경 씨가 사용할 약품이라고 거짓말을 해서

- 공무원 A 씨가 도지사 부인의 사적 심부름을 처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든 후 A 씨에게 성남시 수내동에 있는 이재명 후보와 김혜경 씨의 자택 앞으로 약품을 직접 배달하도록 한 후

- 배달이 끝나자 "사모님 호르몬약"이라고 메시지를 보내서 다시 한번 A 씨를 속인 다음

- 이재명 후보나 김혜경 씨가 모르게 몰래 수내동 자택 앞으로 가서 소화전 문고리에 걸려 있는 의약품을 들고 와서 스스로 복용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배 씨가 복용했다고 주장하는 의약품은 불법적으로 유통되는 제품이 아닙니다. 누구나 합법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의약품을 복용하기 위해 상관인 도지사의 배우자 이름까지 팔아가며 이 같이 복잡한 거짓말을 했다는 배 씨의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임신 스트레스로 복용했다?…"가임기 여성에겐 처방 안 하는 약"

게다가 배 씨가 언급한 "호르몬제"는 배 씨의 주장과 달리 임신을 염두에 두고 있는 여성이라면 복용해서는 안 되는 약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약품의 개발사인 미국 제약회사가 제시하는 안정성 자료(safety data)에는 복용할 경우 생식 능력을 훼손할 수 있고, 만약 임신 중이라면 태중의 아이에게 해가 갈 수 있다는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현직 의사에게 자문해본 결과, 이 약품은 가임기 여성에게 처방하지 않으며, 특히 임신을 고민하고 있는 여성에게는 절대 처방해선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이 약품의 공식 사용 지침에도 약의 사용 대상을 배 씨의 연령대보다 한참 위의 여성들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배 씨와 같은 상황이라면 이 약품을 복용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었던 셈입니다.

(추가 : 배 씨의 약품 복용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확산되자 이재명 선대위 공보단은 3일 오전에 추가 입장문을 배포했습니다. "배 모 씨는 과거 임신을 위해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스트레스가 심한 상황이었습니다. 생리 불순, 우울증 등 폐경 증세를 보여 결국 임신을 포기하고 치료를 위해 호르몬제를 복용했습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았다"라는 배 씨의 주장을 의심하게 하는 정황은 또 있습니다. 이재명 후보와 김혜경 씨의 병원 퇴원 수속을 제보자 A 씨가 배 씨의 지시를 받아서 대신 처리하면서 있었던 일입니다.

제보자 A 씨는 지난해 6월 이재명 후보와 김혜경 씨의 아들이 경기도의 한 병원에서 퇴원할 당시 자신이 이재명 후보 개인 명의의 복지카드를 이용해 병원비를 결제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A 씨는 배 씨와 주고받은 텔레그램 메시지를 제시했습니다. A 씨가 제시한 메시지에는 A 씨가 결제에 이용한 이재명 후보 개인 명의 복지카드와 이 후보 아들의 신분증을 촬영한 사진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또, 제보자 A 씨는 당시 배 씨와 통화를 녹음한 파일도 공개했습니다. 이 통화 녹음파일에는 병원비가 257만 원 나왔다고 제보자가 배 씨에게 보고하면서 일시불로 결제할지 할부로 할지를 묻자, 배 씨가 제보자에게 3개월 할부로 결제하라고 지시하는 대화가 담겨 있습니다.
 

'이재명 명의 카드'로 결제했는데…지시 없이 한 일?

만약 배 씨의 주장처럼 이재명 후보 아들의 병원 퇴원 수속을 처리하는 일 등을 이재명 후보 부부의 지시를 받지 않고 배 씨가 독단적으로 한 일이라면, 배 씨의 지시를 받은 A 씨가 이재명 후보 개인 카드로 병원비를 결제한 사실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재명 후보 명의 카드로 200만 원이 넘는 돈을 다른 사람이 결제했는데도 이재명 후보나 김혜경 씨가 이를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재명 후보 아들 본인이나 부모의 허락 없이 이 후보 아들의 신분증을 경기도 소속 공무원이 받아서 사용하는 일 역시 생각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입니다.

이재명 후보 명의 복지 카드와 이 후보 아들의 신분증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배 씨의 두 번째 입장문과 함께 어제(2일) 발표된 김혜경 씨의 입장문이 일정한 설명을 제공한다고 볼 여지도 있습니다. 김혜경 씨는 입장문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있었습니다"라면서 "모든 것이 저의 불찰"이며 "배 씨와 친분이 있어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상시 조력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라고 밝혔습니다.

배 씨의 두 번째 입장문과 김혜경 씨의 입장문을 종합해 이 후보 아들 퇴원 수속 대리 결제 사건에 비춰보면, 결국 배 씨는 이재명 후보 부부를 포함해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았"지만 스스로 나서서 이재명 후보 아들의 퇴원 수속을 대신 처리해주겠다고 했고, 김혜경 씨는 "배 씨와 친분이 있어" 퇴원 수속을 대신 처리해주는 도움을 받았던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와 같은 일에 대해 "상시"적인 일은 아니었고, 어쩌다 한 번쯤 있었던 일이라고 김혜경 씨는 설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결국, 김혜경 씨는 제보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음식 배달이나 퇴원 수속 대리 처리 등은 "불찰"이긴 하지만 친분이 있는 배 씨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에 불과하고, 사적 심부름을 배 씨나 제보자에게 지시한 적이 없다는 취지로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 간혹 배 씨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사적 용무를 도와준 적이 있었고, 그로 인해 배 씨의 지시를 받은 제보자가 고통을 받았던 사실은 이번에 알게 됐기 때문에 마음이 아리다는 뜻입니다.
 

김혜경 "친분이 있어서 배 씨 조력 받은 적 있다…상시 조력은 아냐"

김혜경 씨의 설명이 사실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의약품 대리 수령 의혹 등에 대해서는 김혜경 씨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있고, 배 씨의 설명은 앞뒤가 맞지 않은 상황입니다. 또한 "일과의 90% 이상이 자질구레한 심부름"이었다는 제보자 A 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상시적인 도움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김혜경 씨의 주장과는 배치되는 대목입니다.

이재명 후보와 김혜경 씨가 배 씨에게 사적 심부름을 상시적으로 지시했는지 또는 배 씨가 자신들과 관련된 사적 심부름을 대신하라고 경기도 소속 공무원에게 지시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선거법 위반 논란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재명 후보는 지역언론사 초청 토론회 등에서 배 씨를 수행비서 역할로 채용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부인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이재명 후보나 김혜경 씨가 사적 심부름을 공무원에게 상시적으로 지시했거나, 배 모 씨가 상시적으로 다른 공무원에게 도지사 부부와 관련된 사적 심부름을 지시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의혹을 공개적으로 부인한 것이었다면,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혐의가 적용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재명 후보는 지난 경기도지사 선거 과정에서 TV 토론에서 일부 사실과 다른 발언을 한 점과 관련해 같은 혐의로 기소됐다가 무죄를 받은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발언 당시의 상황 등을 종합해볼 때, 당시와 달리 수동적 발언으로 볼 수 없고 적극적 주장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큽니다. 지시나 인지 여부에 대한 이 후보 측의 주장이 사실이 아닐 경우 선거법 관련 책임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면서도 국민의힘이 이재명 후보를 공개적으로 고발한 것이라면 국민의힘 관계자에게는 무고죄나 허위사실 공표를 통한 명예훼손죄 등이 적용될 것입니다.

고위 공직자 또는 고위 공직자의 배우자가 공무원에게 사적 심부름을 시켰다는 의혹, 그리고 이와 관련해 후보자가 사실과 다른 주장을 했다는 논란 등은 대선을 앞두고 언론이 검증하고 보도해야 할 사안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투표장에 들어간 유권자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통해서 SBS 단독 보도로 시작된 이번 의혹의 전개 과정부터, 의혹의 핵심 인물인 배 씨가 입장을 바꾼 계기, 그럼에도 배 씨의 말을 그대로 믿기 어려운 이유, 그리고 이에 대한 김혜경 씨의 입장 등을 가능한 공정하고 충실하게 소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독자의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게 판단에 도움이 되는 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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