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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부부싸움…'선의'와 '페미니스트'

[취재파일] 부부싸움…'선의'와 '페미니스트'
▲ 출처=tvN '신혼일기' 방송 캡쳐

#1

tvN ‘신혼일기’의 한 장면이다. 구혜선, 안재현 부부가 가사 분담을 놓고 다툰다. 구혜선이 “가사를 혼자 떠안고 산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안재현은 자기도 돕고 있는데 왜 그러냐며 화를 낸다. 구혜선은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일관성 있게 하라”고 말한다. ‘돕는 것과 내 일’ 사이에는 큰 강이 흐른다. 이걸 남자들은 잘 모르지만, 여자들은 폭풍 공감을 한다. ‘돕는다’고 할 때는 선택이고, 선의의 문제다. ‘내 일’일 경우는 의무이고, 구조의 문제다. 남자인 기자도 이걸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내와 다투기도 하고 혼나면서…지금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몸은 게으르다. 그래도 집안은 굴러간다. 아내가 의무를 다 하기 때문이다. 기자는 구조 바깥에 서서 가끔 가사를 도우며 착한 남편 코스프레를 할 뿐이다.

#2

‘페미니스트’에 대한 사전 정의가 최근 수정됐다. 지금까지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와 있는 페미니스트의 정의는 첫째가 ‘페미니즘을 따르거나 주장하는 사람’, 둘째가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었다고 한다. 국립국어원은 페미니스트의 첫 번째 뜻풀이는 그대로 두고, 두 번째 뜻풀이를 ‘<예전에>,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바꾸기로 했다. ‘예전에’를 추가해 ‘지금은’ 친절한 남자라는 조건만으로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수정한 것이다.

예전에는 ‘친절함’만으로도 페미니스트 대접을 받았다. 국립국어원은 1970~90년대 신문기사를 근거로 제시했다. 1976년도 어느 신문 기사를 재인용 해본다. “김 씨가 부인을 위하는 정성은 대단해서 주위에서는 김 씨를 가르켜 ‘한국 제일의 페미니스트’라고들 말한다. (중략) 점심을 혼자 먹는 부인에게 전화를 해서 점심을 뭘 먹었는지, 급히 먹지 않았는지 염려한다. (중략) 미장원에서 파마하느라 오래 걸리면 시장하겠다면서 계란 삶은 것을 보내줬다.” 1988년도 기사도 있다. “‘007의 제임스 본드' 같은 경우는 전형적인 미남형의 영국 신사로 특히 아름다운 여성에게는 친절한 페미니스트로서….” 대중의 언어 습관을 중시한다는 국립국어원의 사전 등재 원칙에 따라, 그 시절에는 여자에게 착한 남자가 페미니스트로 불릴 자격을 갖췄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페미니즘은 사전에서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ㆍ경제ㆍ사회 문화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견해’라고 정의한다. 작게는 여성의 권리 신장이겠으나, 근본적으로는 남녀간 성별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자는 것이다. 그 어디에도 친절, 착함, 선의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페미니즘은 선한 의지가 있느냐를 묻는 게 아니고, 사회 구조를 바꾸자는 사상이다. 여성에게 친절을 베푸는 걸 페미니스트로 칭하면, 여성을 약자로 전제하고 낮춰보는 것이기 때문에 여성 혐오적 표현이라는 주장도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다면 페미니스트에 대한 두 번째 뜻풀이는 애초부터 불필요했다.
안희정 대선주자 관훈토론회 참석

#3

야권 유력 대선 후보로 떠오른 안희정 충남지사가 ‘선의’를 거론해 논란이 일었다. 안 지사는 지난 19일 “우리는 그 누구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의지를 선한 의지로 받아들여야 한다”며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그 분들도 선한 의지로 없는 사람과 국민을 위해 좋은 정치 하려고 했는데 뜻대로 안 됐던 것”이라고 말했다. 숱한 정치 보복과 청산의 역사를 가진 한국 정치사에 대한 안 지사의 소신이라고 풀이된다. 논란 초기에는 뭐가 잘못됐느냐고 대응하다가, 야권 지지자들의 반발이 커지자 이틀 만에 사과했다. 사과에 이르는 과정을 볼 때, 안 지사는 소신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인간으로서’ 안희정의 사유 방식에 대해 논할 생각은 없다. 개인의 사고 체계는 개인의 성장 과정과 사회적 경험, 바라보는 미래상에 따라 형성되기 때문에 존중 받아 마땅하다. 문제는 ‘정치인으로서’ 안희정의 사유방식이다. 안 지사가 거론한 박 대통령의 사례를 들어보자. 대통령이 탄핵 위기에 몰린 이유는 간단하다. 멀쩡한 국가 시스템을 두고 다른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K스포츠, 미르재단이 국위선양을 위해 필요했다면, 대기업을 동원할 게 아니라 국민의 동의를 얻어 세금을 투입했어야 했다. 국가 운영을 위해 만들어진 청와대, 정부 조직을 대신해 비선이 활개를 치도록 내버려 둔 것도 국민의 공분을 샀다. 수많은 역사적 경험과 논의를 거쳐 모양을 갖춘 대한민국이라는 틀을 ‘선의’를 가진 박 대통령이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뜻대로 안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구혜선이 사랑하는 남편 안재현에게 ‘선의’가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가정이, 인간 구혜선이 행복하기 위해선 부부가 공평하게 가사를 분담해야 한다는 ‘구조’를 알려줬을 뿐이다. 친절과 선함으로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는 세상이 됐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정치인 안희정의 '선의'가 뭔가 부족하고 불편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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