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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뺑뺑이 돌려요"…두 번 운 릴리 엄마

"정말 뺑뺑이를 돌려요. 가장 답답했던 건 언어폭력이라는 인식 자체가 어디도 없고 기관 간에 공조가 하나도 안 된다는 거예요."

일명 '릴리 양 사건'.

부적절한 말을 한 교사가 처벌받는 전례를 처음 만든 이 사건 피해자 릴리(가명)양의 어머니는 지난 반년 간의 힘든 시간을 돌이키며 이같이 호소했습니다.

캐나다에서 살던 릴리 가족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2010년.

보통의 한국 아이들과 더불어 자라며 엄마의 나라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릴리 부모는 딸을 국제학교가 아닌 일반 학교에 보냈습니다.

밝고 사교성이 좋은 릴리는 5학년 때 전교 부회장을 지낼 정도로 학교생활에 잘 적응했습니다.

그러던 릴리가 이상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6학년에 올라가고 난 직후부터였습니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부쩍 자주 하기 시작했다.

또 무엇인가를 하다가 잘 안 될 때면 "난 원래 멍청해서 그래요"라는 안 하던 말을 입버릇처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치 사건'이 터졌습니다.

담임교사로부터 급식 시간에 "반은 한국인인데 왜 김치를 못 먹나. 이러면 나중에 시어머니가 좋아하겠나."라고 꾸짖음을 듣고 돌아온 릴리가 집에 돌아와 울음을 터뜨린 것입니다.

김치를 안 먹고 자라온 아이의 집안 사정을 이해해달라는 부탁을 하고자 학교에 찾아간 릴리 어머니는 담임교사 A씨로부터 황당한 말을 들었습니다.

"음식을 남겨 환경이 오염된다거나 편식 지도 차원에서 말씀하시면 동조하겠는데 반은 한국인이라는 게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김치를 먹지 않으면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이 없다고 하셔서 대화가 되지를 않더라고요."

그제야 릴리 엄마는 아이가 학교에서 다른 어려움이 없었는지를 알아보다가 다른 학부모로부터 차마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이가 질문을 자주 했다는 이유로 선생님이 반 아이 전체에게 "릴리 바보"라고 세 번 외치게 했고, 선생님으로부터 "너는 부모 등골을 150g 빼 먹는 애"라는 말까지 들었다고도 했습니다.

"일을 하러 가는 길에 다른 엄마에게 릴리가 '바보 삼창'을 당했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아이가 하도 가여워서 눈물이 주르룩 흐르더라고요…"

학교와의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처음에는 A씨의 사과를 받으러 갔지만 A씨는 선뜻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학교 측도 '교권 보호' 운운하며 A씨를 감싸는 듯 했습니다.

릴리 어머니는 A씨에 대한 징계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됐고, 학교 측에 담임 교체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학교 측의 대응은 릴리 부모의 분노를 부채질했습니다.

학교는 작년 6월 30일 오전 10시에, 한 시간 뒤인 오전 11시 이 문제를 논의할 회의를 열겠다는 문자 메시지를 '기습적'으로 해당 학급의 학부모들에게 보냈습니다.

우리말을 전혀 못하는 릴리 아버지가 일을 하던 도중에 황급히 학교로 달려가야 했고, 5명만 참석한 학부모 회의에서는 담임 교체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릴리 아버지의 강경한 요구에 학교 측이 통역을 붙여 회의가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A교사에 대한 징계는 기약이 없었습니다.

릴리 어머니는 이때부터 아동복지기관, 교육청, 국가인권위원회, 권익위원회,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등을 돌며 억울함을 호소했고, 경찰에 고소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기관도 제대로 된 피해 구제를 위한 조치는 취하지 않았습니다.

아동의 피해를 인정하면서도 상급 기관에 적절한 조치를 요구하지 않거나, 경찰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사건 접수 자체를 꺼렸습니다.

급기야 사건은 경찰과 검찰의 손을 거쳐 법원의 판결을 받기에 이르렀지만, 릴리 부모가 당초 원한 것은 진정한 사과였습니다.

교사 A교사가 사과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진정성'이 부족했다는 것이 릴리 가족의 주장입니다.

A교사는 릴리 어머니에게 보낸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에서 "지도 과정에서 저의 언어 표현의 부적절함 때문에 상처를 드린 점 사죄드립니다"라며서도 "다만 제 교육적 의도는 배제된 채 언어적 표현의 부적절함만 부각되는 상황에 저도 몹시 힘이 듭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릴리 부모는 이를 교사 A씨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듭니다.

"사과 받기를 원했고 아이에게 진심 어린 사과만 해 줬으면 끝났을 일이에요. 사과 뒤에 '벗'(But)자를 붙이는 것이 사과인가요. '치료비를 제시하면 최대한 고려해 보겠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고는 반성을 안 하신다는 생각에 형사 고발까지 하게 됐어요."

학교와 교육청 등 관련 기관에도 서운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심지어 같은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만나 제가 뭐라고 말을 붙이면 돌아서서 못 들으시는 척을 해요. 교감 선생님도 이제 전화도 안 받고 문자메시지 답을 안 한 지 오래 됐고요."

이 학교의 감독관청인 수원교육지원청은 A교사에게 사실상의 무징계인 '불문 경고'를 했고, 이 사실을 릴리 가족에게 통보해 주지도 않았습니다.

개인의 사생활에 관련된 사안이라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원치 않게 '다문화 투사'가 된 릴리 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피해자를 위한 시스템 자체가 없어요. 법이 있고 시스템이 있어 너의 권리는 항상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딸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는데 제가 먼저 스텝을 밟아보니까 그런 건 없더라고요. 시스템 실패죠. 요즘은 고국이라고 아이들 데리고 한국에 온 게 잘못이 아니었는지 후회도 돼요."

(SBS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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