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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금빛 모래는 어디로 갔을까?

조금은 촌스럽지만, 여름 한때의 정겨운 풍경입니다. 어디 동해 바닷가쯤으로 보이시나요?

그런데 이 영상이 찍힌 곳은 바로― 맞아요~ 여러분이 알고 있는 바로 그, 한강입니다. 불과 육십여 년 전, 한강은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참, 많은 것들이 빠르게 변했죠. 그동안 우리는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사람들은 그 시절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런데 그 기적 아래, 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더라고요~
 
사람들은 저를 퍼 올려 아파트를 짓고, 강변도로도 깔았어요. 봄이면 벚꽃이 만발하는 여의도도, 올림픽의 함성이 울려 퍼졌던 잠실도, 사실 다~ 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누구냐고요? 저는 바로― 한강의 기적의 바탕이었던 한강의 ‘모래’입니다!

한강의 금빛 모래는 어디로 갔을까- 당신이 몰랐던 진짜 한강 이야기


대동여지도를 보면 서울 한강에는 난지도, 여의도, 저자도, 잠실도 이렇게 큰 섬 네 개가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 남은 건 여의도밖에 없죠.
 
“쾅”! 
 
모든 것의 시작은 그날이었습니다. 1968년 2월 10일. 저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해요.

(대한뉴스 662호)
"이 섬에 건설을 위한 다이너마이트가 폭음을 진동했습니다" "이 섬을 없애버리면 한강 하구가 넓어져서..."
 
70여 가구, 약 450명의 주민이 오순도순 모여 살던 곳, 밤섬은 그렇게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불도저’로 불렸던 김현옥 서울시장이 제1차 한강 개발을 시작한 거죠. '한강을 최대한 이용하고 지배한다' 이 표어 아래 소위 ‘한강 정복’이 시작된 겁니다. 그 신호탄이 바로 밤섬 폭파였던 거죠.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어야 했던 사람들... 바로 밤섬 주민들이었습니다. 이 세 분은 밤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하네요.
 
"여기서 이렇게 보니까 괜찮네"
 
이제는 관공서 허락없인 들어갈 수 없는 고향.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는 모양입니다.
 
지효경(밤섬 실향민) : 뱃일이 한 60% 되고 그 다음에 땅콩 밭이 한 25% 우리 어부들도 한 5% 정도 이렇게 해서 고기를 많이 잡고 그렇게 해서 많이 살았어요. 손님들 싣고 다니는 그런 돛단배식으로 된 게 있었어요. 이정희(밤섬 실향민): 밤섬 쪽은 이게 아주 깨끗하고 지득경(밤섬 실향민. 밤섬보존회장): 해안 가서 모래 1m 정도 보이듯이, 한강도 그렇게 깨끗했어. 제1한강교부터 저 양화대교 선유봉까지 다 백사장이야
 
평화롭던 섬마을의 풍경 속엔,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보물이 숨겨져 있었다고 할아버지는 기억합니다.
 
지효경: 그 모래 실어다가 여기서 팔고 그랬어요. 왜냐하면 모래가 그렇게 좋았어. 하얗고 굵고 아주 진짜 좋았어
 
네, 맞아요. 저, 모래를 잊지 않고 계셨네요! 그런데 말이죠. 양화대교 아래에는 제 친구가 있었어요. 지금은 공원으로 바뀐 ‘선유도’죠.
 
1948년 한 주한 미군 부부가 찍은 귀한 컬러 사진입니다. 사진 속 선유도엔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앞 당산동 쪽으로는 넓은 모래톱, 바로 제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엔 ‘선유봉’이라 불린 명승지로 중국 사신들에게까지 유명했던 핫플이라 겸재 정선도 그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았어요. 드넓은 백사장과 우뚝 솟은 봉우리가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죠? 일제강점기부터 채석장으로 쓰이면서 키가 사오십미터에 달했던 제 친구 선유봉은 깎이고 또 깎여서 지금처럼 야트막한 섬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밤섬이 폭파되기 전, 그러니까 제1차 한강 개발 전까지만 해도 한강은 이렇게 물 반~ 모래 반이었답니다. 사실, 홍수 때를 제외하면 제가 더 많았죠. 믿기지 않는다고요?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친숙한 지명들을 한번 떠올려 보세요. 이게 다, 저, 모래가 아주 많았다는 흔적입니다.
 
#♬ < 엄마야 누나야>
모두에게 익숙한 노래죠? 노래 속 정겨운 강변이, 금모래 반짝이던 그곳이 한강의 모래톱이었답니다.
 
그 시절의 저를 기억하는 분들도 있어요. 동물농장 아저씨로 친숙한 목소리, 성우 안지환 씹니다. 마포 토박이라 어릴 적 한강의 모습이 또렷하게 기억난다고 해요. 

안지환(성우.마포토박이): 제가 나룻배 탔다 그러면 거짓말이라 그래요. 하하. 여기서 나룻배 타고 밤섬에 놀러 갔다 오고 그랬다 그러면 거짓말이라 그래요.
 
웃으며 꺼낸 어린 시절의 추억― 제가 빠질 수는 없겠죠.
 
안지환: 이쪽(마포)도 이런 모래사장이 있고, 저쪽(밤섬)도 모래사장이 있었어요. 한 이십 미터 이상은 다 모래가 돼 있었죠. 다 모래라, 조개도 나왔어요. 모래에 구멍이 뚫린 자리가 모래 숨구멍이라고 그래서, 손가락을 넣으면 조개가 나온다고 그래서 조개도 잡고
 
그리고 잊지 못할 또 하나의 기억.
 
안지환: 밤섬에 놀러 가서 모래사장에서 놀다가 오고, 여기 와서 놀다 가면 야단을 맞았는데, 그게 왜 들키냐하면 모래가 막 쏟아지니까 신발 이런 데서. 아무리 내가 꼼꼼하게 턴다고 털어도 양말 안에서 어디선가 모래가 나와요. 너 한강 갔었지 그리고 그 혼나는 거예요.
 

이곳에 모인 분들에게 그 시절 한강은 그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일부였다고 하네요.

박상임 할머니:  마포 꼭대기에 살아서 이렇게 보면 한강이 있잖아요. 그 백사장도 막 보여요. 모래가 반짝반짝하게 보여요. 어릴 때니까 여자 남자 애들 팬티 바람으로 수영을 해요 근데 이제 저는 수영을 할 줄 모르니까 기어서 다니고 이렇게 수영을 하고 이제 엄마한테 혼날까 봐 벗어서 그걸 또 말려요.
 
조경현 할머니는 광나루 백사장에 갔었던 기억이 생생하대요~
 
조경현: 시골에 우리 살던 그 개울보다 (한강이) 조금 그냥 넓다 하는 생각만 했지. 모래가 많았어. 모래가 모래가 많아 가지고 한쪽으로 그 둑변으로는 지금도 이렇게 보면 호박을 그렇게 많이 심었더라고.
 
용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어르신은 아버지와 함께 갔던 한강 백사장이 기억난대요~ 지금의 노들섬 부근이죠.
 
옥용림: 어디쯤이냐면 한강대교 밑에서 동작대교 정도쯤. 아주 백사장이 굉장히 넓어요. 아버지는 우리 애들 다 놀게 하고, 한강을 넘어갔다 오는 거예요. 그 정도니까 이제 왕복 한 200미터나 됐을까 그 정도였을 거예요.
 
1956년 한강 백사장에선 열린 대통령 후보 연설 때는 20만이 훌쩍 넘는 인파가 모였다고 해요. 60년대까지도 한강에서 대규모 정치 집회를 할 만큼 모래톱이 넓었던 겁니다.
시민들은 한강변에 나와 공연도 함께 즐겼구요. 워커힐 맞은 편 광나루 백사장은 여름이면 발 디딜 틈 없이 피서객들로 빼곡했다고 하네요.
 
박성직(강동농협조합장. 강동구 토박이): 이게 광나루의 백사장 한강변의 그 사진이에요. 광나루의 그 수영하러 서울 시민들이 아주 많이 모일 때는 10만 명 정도가 모였었다고... 아주 정말 천혜적으로 여름에 수영하기 좋은 장소였다 이렇게 보시면 되지.

종군 기자와 1세대 사진가로서 한국전쟁 같은 역사의 현장을 기록했던 사진가 임인식. 1950년대 중반 그의 렌즈에 담긴 한강은 시민들이 저와 얼마나 다정하게 지냈는지 보여주는 따뜻한 증거입니다.

광나루부터, 뚝섬, 동부이촌동, 마포, 양화까지... 한강이 흐르는 곳곳엔 이렇게 금빛 모래의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답니다.
 
김원(건설기술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한강,1968' 저자): 한강의 모습은 모래강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강의 한 70~80%는 전부 다 모래였습니다. 물이 흐르는 공간은 20~30%정도밖에 안 됐고요. 나머지 모래강이었고, 모래와 물이 잘 어우러져 있는 그런 강이 원래 한강의 모습이었습니다.
 
맞아요. ‘모래강.’ 그것이 바로 한강의 본래 얼굴이었습니다. 김원 연구원은 제가 사라진 것에 주목한 하천 전문가예요. 최근엔 한강에 대한 책도 냈죠.
 
김원: 여의도 앞에 한강에 준설하는 사진을 봤는데 진짜 눈물이 났습니다. 그 거대한 모래사장이 있었는데 준설을 하기 위해서 준설의 흔적들이 수도 없이 많이 남아 있는 것들이 저한테는 마치 손톱으로 막 할퀴어 놓은 상처처럼 보였고, 그 중간에 있는 물들이 마치 거기에서 피가 나는 듯한 그런 모습으로 보여서 되게 참 당황했고 참 슬펐습니다. 아.. 이렇게 우리가 개발했구나...
 
1차 한강 개발 때 폭파한 밤섬의 돌과 모래는 지금의 여의도를 떠받치는 제방이 됐어요. 그리고 그 위에 시범아파트와 국회의사당이 세워졌죠. 하지만 여의도는 시작에 불과했어요. 한강대교 아래 백사장은 일곱 달 만에 퍼올려져서 당시 서울 최대인 동부이촌동 아파트 단지가 됐습니다.

저를 파내면서 아예 섬 전체를 지워버린 곳도 있습니다.
 
김원: 여기가 원래 저자도가 있던 자리고요.  저자도에 있는 모래를 준설해서 저기 건너편에 보이는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 자리를 매립해서 그 위에 아파트를 지은 겁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지금의 잠실, 그곳도 본래는 섬이었다는 사실 알고 계시죠?

김원: 남쪽으로는 송파강이 흐르고 북쪽으로는 신천강이 흐르는 상당히 큰 섬이었고 물도 자연스럽게 흐르는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남쪽 물길을 완전히 없애고 북쪽에 물길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남쪽의 물길을 막아 육지로 만드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두 달. 그렇게 한강 개발은 저를 지우고 부동산을 얻었습니다.
 
김원: 1968년부터 해서 1986년까지 한 18년 동안에 한강의 모래들이 대부분 사라지게 됩니다. 사라진 모래사장 면적이 상당히 방대합니다. 그걸 해운대 해수욕장 면적하고 비교해 보면 해운대 해수욕장의 한 700배 정도 되는 면적이 한강 종합 개발로 그 과정에서 사라진 모래의 면적입니다.

해운대 해수욕장 700개라니... 그게 바로 1,2차 한강개발로 사라진 저의 면적입니다. 개발을 안 할 수는 없었겠죠. 당시에는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서도 먹고 살기 위한 개발이 우선순위였으니까요.
 
김원: 서울의 이 금싸라기 같은 지역이니까 매립해서 땅을 만들자. 건물을 짓기 위한 골재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필요한 시대였습니다. 사실은. 그 아파트를 지어야 되고 집을 지어야 되고 모든 공사를 하는 데에 모래 없이는 불가능한 거니까 모래가 어마어마하게 귀중한 자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지도 좀 보실래요? 1차 한강 개발 이후에도 사실 곳곳에 제가 남아 있었어요. 이때 저를 좀 생각해 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지만 사람들은 멈추지 않았어요. 그때 한강이 얼마나 위험해졌는지, 성우 안지환 씨는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안지환(성우.마포토박이): 초등학교 졸업할 무렵에는 이제는 한강은 놀러 가면 안 되는 곳. 물도 깊고 어디가 깊은지 모르는 거예요. 다 웅덩이를 파놔가지고. 그때는 뉴스에 매일 나왔어요. 한강 변에서 놀다 익사한 사고들 웅덩이 물웅덩이에 빠져서 익사한 사고들
 
맞아요. 마구잡이로 저를 파내면서 강바닥은 온통 상처투성이 웅덩이가 됐고, 그 상처가 아이들의 목숨까지도 앗아갔죠. 전두환 정권의 2차 한강 개발 때는 고수부지란 이름으로 저를 콘크리트 아래 영원히 묻어버리기로 결정합니다. 88올림픽 유치가 확정되자, 개발은 더욱 속도를 내기 시작했죠.
 
김동언(서울환경연합 정책국장): 82년도에 한강 종합 개발이 이제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이제 잠실 수중보와 신곡 수중보를 만들었고, 두 개의 보를 통해서 일정 수위를 유지시켜주는 거죠.
 
보는 물을 가둬 수위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해요. 그런데 사실 이렇게 되면 물도 저도 원래대로 흐를 수는 없어요.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다른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김동언: 유람선을 왔다 갔다 하면서 한강의 기적이라는 신화가 있어 가지고 지금의 한강의 모습이 어떤 물도 많아 보이고 하니까 또 풍요의 상징? 그리고 개발의 상징? 산업화의 상징? 이렇게 되다 보니까 하나의 신화가 된 거죠.
 
저를 품었던 강변은 미관을 이유로 온통 잿빛 콘크리트 절벽으로 변했습니다. 강변도로와 올림픽대로가 생기면서 사람들과 저 사이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됐어요. 이제 사람들은 강으로 가기 위해 어둡고 좁은 ‘토끼굴’을 지나야만 합니다.

김원(건설기술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하천전문가): 지금은 강 전체가 완전히 인공화된 거죠. 많이 준설해내고, 보를 만들고 그 다음에 둔치를 만들어서 절벽을 만들고, 원래 있었던 모래의 모습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고 원래의 강의 형태도 사라지고 그러니까 모든 것들이 다 바뀐 겁니다.
 
이쯤 되면 궁금하실 겁니다. 바로 저, 모래가 있고 없는 게, 대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이곳은 독일 뮌헨을 가로지르는 이자르강입니다. 도심 한복판이라는 게 믿어지시나요?
 
이상훈(독일 뮌헨 교민) 도심 속의 자연공원 같은 모습이었고 거기에 가로지르는 강이다 보니까 되게 도심 속 안에 있는 대자연이라는 인상이 좀 깊었습니다.
 
이자르강은 사실상 인공 수로였는데 10년 동안 준비하고 10년 동안 복원해 부분적으로 재자연화했습니다.
 
이상훈: 여름철에는 수영이나 물놀이하는 뭐 발을 담근다거나 좀 깊게 깊은 곳도 있고 얖은 곳도 있어서 그냥 편하게 물놀이할 수 있는 공간도 많이 있고~
 
부분 자연화로 시민들의 삶은 강과 함께 숨쉬기 시작했어요. 그건 바로 저, 모래톱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한강에도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폭파됐던 밤섬이 스스로 되살아나고 있어요. 폭파 전 축구장 7개 크기였는데 지금은 축구장 마흔 개가 들어갈 정도가 됐습니다. 그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봐온 사진작가가 있어요.
 
"이렇게 이제 밤섬이 초점이 맞게 되거든요"
 
열번 넘게 밤섬에 직접 들어가서 그곳을 카메라에 담으며 김 작가는 자연의 생명력을 마주하게 됐다고 합니다.
 
김승구(사진작가): 밤섬에 생태계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 밤섬에서 도시를 바라봤을 봤을 때는 어떨까, 어떤 느낌일까?
 
그리고 한강이 사람들의 삶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는데요. 그래서 고민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김승구: 밤섬이라는 곳이 인간의 욕망에 의해서 폭파되고 저렇게 회복되었는데 자생적으로 회복되었는데 저것을 우리가 어떻게 거리 두기를 하는 것이 진정한 지금 상태처럼 공존을 이루어가는 것일까....
 
서울시는 2006년 ‘한강 르네상스’부터 최근의 ‘그레이트 한강’ 프로젝트까지 ‘한강의 자연성 회복’을 첫 번째 사업 목표로 삼아왔어요. 자연과 공존을 위한 한 방법이죠.
 
이응창(서울시 미래한강본부 한강사업총괄부장): 물길을 침식을 막는 데에 주로 이제 인공적인 콘크리트로 사용하던 것을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좀 더 자연적인 재료인 사석이라든가 이런 뭐 식재라든가 그 이런 흙을 다져서 좀 더 자연에 가깝게 해서 서식지 환경이 좋아지도록 만드는 호안 형태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조금이라도 제가 돌아오길 바라며 우선 꽉 막혀 있던 콘크리트를 약 50km 구간에서 걷어냈어요. 보세요 여러분, 반포한강공원 쪽에 콘크리트를 걷어낸 곳인데요.
 
김동언(서울환경연합 정책국장): 퇴적이 되는 자리다 보니까 이렇게 모래가 쌓이고 고운 모래들, 펄 성분이 많은 실트 성분이 많은 고운 모래들...
 
어때요? .... 제가 좀 돌아온 게 보이시죠? 강에 제가 돌아오니 새들도 자연스럽게 찾아오고 있답니다.
 
김동언: 저기도 보면 왜가리인가요? 뭐가 이렇게 있는데 여기가 이제 야생동물의 서식지가 된 거예요. 이런 것들을 우리가 좀 기다려 준다면 한강은 분명히 되살아날 수 있는 복원력이 그 잠재성이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조금, 어리둥절한 소식이 들리더군요.
 
김동언: 자연성 회복의 어떤 상징과 같은 곳이 될 수도 있는데 하필이면 여기에다가 이제 수상푸드존을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자연성 회복의 성과를 거스르는 이런 정책 결정을 하게 된 거죠. 좀 굉장히 아쉽습니다.
 
제가 돌아오는데 큰 걸림돌인 수중보도 십년 넘게 논란거리죠. 수중보 문제와 대통령 공약인 한강 재자연화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건지, 환경부와 서울시에 물었지만, 이렇다 할 답변을 듣지 못했습니다. 홍수, 취수, 지하수 문제 등으로 이 이슈가 아주 복잡하고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래를 위해서 누군가는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한강을 원하나요?”

김원: 하루 아침에 전부 다 옛날도 돌아가자, 하는 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불가능하고. 다만, 우리의 한강 개발의 한강 관리의 지향점이 어디냐, 한강대교를 지나면서, 버스를 타고 지나면서 아 여기가 원래 한강변이었지 아, 모래사장이었지. 이런 것들을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다면 강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질 것 같거든요...

저는 지금도, 여전히, 태어나고 있어요. 북한산에서 풍화된 화강암 조각이 비에 씻겨 계곡 따라 내려오면서 천천히 깎이고 부서지며 제가 되죠. 여기는 한강의 4대 지천 중 하나인 홍제천이에요. 예로부터 모래가 많아서 사천, 또는 모래내라고도 불렸죠. 보이세요? 저기~ 물 아래 반짝이는 조각이 바로 저랍니다. 언젠가, 제가 다시 강을 따라 자유롭게 흐를 수 있게 된다면... 여름날,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여러분과 다시 만날 수 있겠죠? 이건 물론 제 입장입니다만 지금은 이런 상상력이 필요한 시대니까요. 저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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