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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대첩' 재조명…거북선 · 학익진 얼마나 대단했을까

<앵커>

임진왜란 판세를 뒤바꿨던 한산대첩이 꼭 430년 전입니다. 이 전투를 다룬 영화가 개봉하면서 당시 학익진 전법과 거북선 활약이 어느 정도였는지 관심이 높아졌는데 이순신 장군의 지략이 담긴 한산대첩의 전략을,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다시 들여다봤습니다.

임상범 기자입니다.

<기자>

[영화 '한산 : 용의 출현' 중 : 지금 우리에게는 압도적인 승리가 필요하다.]

1592년 7월 8일 새벽.

조선 수군 연합 함대 58척이 당포를 출발합니다.

견내량 좁은 수로에 정박해 있던 왜장 와키자카의 함선 73척은 조선 수군의 유인 작전에 말려 한산도 앞까지 쫓아 나옵니다.

좌우 선봉에 있던 거북선이 갑자기 방향을 돌려 화포를 쏘며 왜군 함대의 선두를 막아섭니다.

[임원빈/전 해군사관학교 교수 : 거북선은 충돌 전술을 결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거북선의 돌격 전술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기선 제압용이에요.]

그 사이 나머지 함선들이 거대한 포위망, 학익진을 완성합니다.

[제장명/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 학 모양으로 날개를 펼쳐서 거의 비슷한 그런 그림만큼 쏘면 가운데 하나의 탄착점이 형성돼가지고 공격이 가능한 거죠.]

조선 판옥선이 밑바닥이 평평해 선회 반경이 짧고 총통의 사거리가 왜군의 조총보다 훨씬 멀다는 이점을 극대화한 겁니다.

왜 함선 47척이 불탔고, 12척이 나포됐으며 8천여 명이 전사했습니다.

반면 조선 수군은 단 1척의 피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육지에서나 쓰던 학익진을 해전에 처음 활용한 게 바로 이순신이었습니다.

[제장명/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 관습에 의존하는 구태의연한 그런 사고방식이 아니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그런 방안을 계속 강구하게 되고, 혁신적인 사고를 갖게 된 거죠.]

치열한 첩보전도 승리에 한 몫 했습니다.

한산대첩 하루 전, 왜군의 동태를 파악한 목동 김천손의 첩보로 치밀한 작전을 세웠고,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 동료 장수들을 설득해 연합 작전을 이끌어냅니다.

평양까지 밀고 올라갔던 왜군이 제해권을 잃으면서 수륙병진작전도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정보전, 워게임, 연합전력.

현대전의 승패를 좌우하는 핵심요소들이 430년 전 한산 해전에도 그대로 적용됐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후 해전 금지령을 내렸고, 임진왜란은 결국 조선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임원빈/전 해군사관학교 교수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전략에 사형 선고를 내린 해전이 바로 한산 해전이다]

(영상취재 : 이재영, 작가 : 이세미·서정민, 영상편집 : 김인선, CG : 서현중·성재은·전혜리·최하늘·이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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