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뉴스>
<앵커>
세계 각국에 일본의 만행을 폭로했던, 헤이그 특사 사건은 결국 고종 황제의 퇴위로 이어지게 됩니다. 연속기획 보도. 오늘(14일)은, 꺼져가는 대한제국의 황제로서 헤이그 특사 외교의 총감독 역할을 했던 고종 황제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짚어보겠습니다.
하현종 기자입니다.
<기자>
지난 1899년 부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전차입니다.
고종 황제가 서양의 기술력을 들여와 완성시킨 것으로 일본보다 무려 3년이나 빨랐습니다.
고종의 꿈은 이처럼 개방을 토대로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이뤄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변 열강들은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고종을 끊임없이 위협했습니다.
대한제국의 대신들 역시 이미 상당수가 주변 열강의 앞잡이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영화 '한반도' : 일본의 힘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수 없다는 그대들은 대체 어느 땅의 신하이며 지금 누구를 섬기고 있다는 말이냐!]
손발이 묶인 고종은 대신 '별입시'를 활용합니다.
별입시란 언제든 황제를 알현할 수 있는 사람들로, 고종은 이들에게 밀령을 내려 국내 의병 항쟁과 해외 독립운동을 후원했습니다.
[오영섭/연세대 연구교수 : 별입시는 고종의 수족같은 존재들. 헤이그 특사 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던 별입시로는 이용익과 이범진이라고 봐야죠.]
구국운동에 쓸 자금으로는 홍삼등을 전매해 축적한 황실의 공금인 내탕금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헤이그 특사들의 활동비도 바로 여기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태진/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 내탕금 사용내역서 보면 군데군데 사용처가 불분명한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결국 독립자금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나라의 명운이 꺼져가던 1907년, 이준 일행은 고종이 보낸 마지막 특사이자 실낱같은 희망이었습니다.
[이태진/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 일본의 국제 언론 플레이가 엄청난 양으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조금이라도 뚫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매장돼 버린다. 그런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헤이그 특사 사건은 결과적으로 일본이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는 빌미로 작용합니다.
격동의 시대에 평화적 근대국가 건설을 꿈꿨던 대한제국 최초의 황제 고종.
하지만 역사는 그를 꿈을 이루지 못한 비운의 개명군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