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하는 A 씨
"범죄조직에 빌려준 통장이 막히면 출금하지 못한 금액만큼 빚이 생깁니다. 그러면 통장 주인인 한국인은 하루 5달러를 받고 보이스피싱 조직원으로 일해야 합니다."
최근 통장을 빌려주면 1천만 원이 넘는 보수를 지급하겠다는 말에 속아 캄보디아에 세 차례나 다녀온 A 씨는 16일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건은 지난 8월 대포통장 모집책인 '장집'의 텔레그램 연락으로 시작됐습니다.
신용불량자이자 기초생활수급자로 어렵게 생활하던 A 씨는 "사업자금으로 쓸 통장을 빌려주면 1천만 원 이상을 주겠다"는 장집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A 씨는 장집의 말을 듣고 직접 캄보디아로 가서 통장과 여권, OTP(일회용 비밀번호 생성기)를 조직원인 조선족에게 건넸고 이어 범죄집단 밀집 지역인 '웬치'로 끌려갔습니다.
당시 그의 통장에는 범죄자금 3천500만 원이 입금됐지만 중간에 지급정지가 되면서 1천200만 원이 출금되지 못했고, A 씨가 조직원들에 보수를 강력히 요구하자 돌려보내 줬습니다.
A 씨는 "제 몸에 문신도 있고 험상궂게 구니 겨우 보내줬다"며 "일반인이었다면 절대 못 빠져나왔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에 온 A 씨는 약속했던 보수를 달라고 조직원에게 계속 압박했고 돈을 주겠다는 말에 캄보디아로 가서 300∼400달러만을 받고 나왔습니다.
이후 통장을 한 번 더 개설해주면 추가 보수를 준다는 연락을 받고 한 번 더 캄보디아에 갔지만, 결국 돈은 받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현재 A 씨는 자신의 통장이 범죄에 이용된 사실을 알고 경찰에 자수한 상태입니다.
A 씨는 자신이 비교적 덜 잔혹한 '웬치'에 갔기에 탈출할 수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웬치, 총책마다 한국인을 대하는 태도가 모두 제각각"이라며 "제가 갔던 곳은 들어가기 전 출입을 확인하는 용도로 신발 사진을 찍던데, 더 잔혹한 곳은 얼굴을 제외한 전신을 촬영한다"며 "가장 심한 곳은 촬영이 필요 없을 만큼 탈출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한국 곳곳에 통장을 모집하는 '장집'들이 숨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마치 호의로 돈을 빌려주는 것처럼 접근한 뒤 통장 개설을 유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보이스피싱 문제가 잘 알려져 고소득 일자리라는 말에 속아 캄보디아에 넘어가는 사람은 드물다"며 "대신 생활이 어려운 사람을 표적으로 삼아 50∼100만 원을 빌려주고 신뢰를 쌓은 뒤 '잠시 통장만 빌려달라'며 유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장집들은 유심을 사용하지 않고 핫스팟으로 데이터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연락해 통신 추적을 피할 수 있다" 말했습니다.
현지에서 자금세탁 과정 중 자금이 빠져나가거나 지급정지가 걸리는 이른바 '돈 사고'가 발생하면, 출금하지 못한 금액만큼 한국인에게 빚이 생기는 구조입니다.
A 씨는 "조직원들이 돈을 빌려 카지노를 해보라고 권하는데, 결국 그 모든 것이 빚으로 남는다"며 "여기에 계좌가 동결돼 출금하지 못한 금액까지 합치면 수천만 원의 빚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때문에 조직은 한국인을 현지로 불러 신병을 확보하려 합니다.
계좌가 정지되면 일주일에서 10일 후에 계좌를 풀 수 있는데 이때 당사자가 직접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A 씨는 "조직원들은 한국 은행 체계를 한국인보다 더 잘 알고 있어 비교적 이체 한도를 쉽게 올려주고 계좌 정지가 쉽게 풀리는 인터넷 은행의 통장을 이용한다"며 "그런 계좌를 빌려주면 더 많은 보수를 주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현재 대중에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피해자와 범죄 단지가 현지에 있다고 전했습니다.
A 씨는 "웬치에 갔을 때 소각장을 실제로 봤는데 정말 많은 한국인이 이미 숨졌을 것 같더라"며 "저는 운이 좋아 계속해서 빠져나왔지만, 그곳에 갇혀 있는 한국인들이 어서 구조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