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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피해자인가 공범인가…구독 사기에 휘말린 이들

'가전 구독' 사기 취재 후기①

[취재파일] 피해자인가 공범인가…구독 사기에 휘말린 이들
이틀에 걸쳐 '가전 구독' 사기에 대해 보도했습니다.

구독이란, 가전제품을 한 번에 구매하지 않고 다달이 월에 일정 금액을 가전 회사에 지불하고 빌려 쓰는 개념입니다. 목돈이 부족한 신혼부부나 사업이 잘 안 됐을 경우 가전제품을 처분해야 하는 자영업자들로부터 각광 받았죠.

저희 기사에 많은 댓글이 달렸는데, 구독 사기에 휘말린 청년을 '피해자'로 묘사하지 말라, 그들은 '공범' 내지는 '가해자'라는 내용이 가장 많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공범이 맞습니다. 사기 공모나 방조 혐의로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떳떳할 것 없는 공범이니, 다 그들 잘못이다"라고 말하는 게 능사일까요. 기사로 충분히 전달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이곳에 남깁니다.

나를 '구제'하는 대출

SNS 대출 홍보

'내구제 대출'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신용은 부족한데 급하게 돈을 구하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불법 대출로, '작은 돈도 구하지 못하는 불쌍한 나를 구제한다'는 뜻에서 내구제 대출이라 불립니다. 은행 같은 정상적인 대출 경로를 우회 하는 불법 사금융의 일종이죠. 사회초년생이나 신용불량자가 주 대상입니다.

방식은 이렇습니다. 급전이 필요한 사람이 온라인에 '내구제 대출'을 검색하고, 카카오톡이나 텔레그램으로 불법 대출업자와 연결됩니다. "500만 원 필요합니다." 필요한 금액을 말하면, 대출업자는 "시키는 대로 하면 돈을 빌려줄게"라고 합니다.

휴대전화부터 가전 구독까지

구독 가전 사기 업체 배불뚝이렌탈

무엇을 시키는지는 천차만별입니다. 최근엔 '가전제품 구독'까지 지시합니다. "알려준 대리점에 가서 알려준 가전제품을 구독하고 이 주소로 배송시켜라"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하죠. 돈은 가전제품이 잘 도착했는지 확인한 후에 입금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물론 시키는 대로 하더라도 약속한 돈은 못 받을 수 있습니다.

가전제품 구독을 이용한 구체적인 범행 수법은 지난 8~9일자 <SBS 8 뉴스> 기사를 참조해주세요.
▶관련기사 : [단독] "연기 잘해라" 지령…수백대 가로채 되판 '배불뚝이' (4/8 8뉴스)
▶관련기사 : [ 단독] "다 털렸다" 돈 꾸려다 빚더미…신상 넘기자 돌변 (4/9 8뉴스)

오래된 수법입니다. 휴대전화를 개통해오라는 '폰테크', 신용카드를 발급해오라는 '카드깡', 가전제품을 구독해오라는 '구독사기'까지. 어떤 재화를 이용하느냐 차이만 있을 뿐, 방식은 유사합니다. 시대가 발전하고 우리 생활이 조금씩 편리해질 때마다, 휴대전화, 신용카드, 가전제품으로 형태만 달리하며 내구제 대출은 반복 돼왔습니다.

불법 사금융의 그레이존

가전내구제 사기

내구제 대출은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20년 넘게 진화해 온 셈인데, 왜 근절이 어려울까요.
먼저 내구제 대출 자체를 겨냥하는 법이 없습니다. 불법 사금융은 금융감독원의 소관이지만 어디까지를 불법 사금융으로 볼건지, 즉 '불법 사금융의 범위'는 '대부업법'에 따라 정해집니다. 그런데 2019년 대법원 판례(대법원2019도4368)는 내구제 대출을 대부업법의 규제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금융감독원이 "내구제 대출은 우리 소관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죠.

어떤 재화를 이용하느냐에 따라 적용되는 법도 달라집니다. 비교적 알려진 휴대폰깡의 경우, 전기통신사업법에 따라 자금 융통 등의 목적으로 휴대전화를 개통할 경우 처벌 받을 수 있습니다. 휴대폰깡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급증하고, 개통된 휴대전화들이 '대포폰'으로 유통되며 다른 범죄에 악용되는 등 상황이 심각해지다 보니, 정부가 강경 조치를 한 덕이죠.

하지만 전기통신사업법은 휴대폰깡에나 적용될 뿐 다른 내구제 대출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가전 구독을 이용한 내구제 대출을 처벌하려면, 가전제품의 부당한 취급을 다루는 법을 따로 마련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신상품이 등장할 때마다 입법을 하자는 주장도 비현실적입니다. 이렇게 법 자체가 만들어지기 어렵고, 시장의 발전 속도에 발맞춰 범죄도 빠르게 진화하면서 일종의 공백 지대, 그레이 존(Gray zone)이 생겼습니다.

공백을 메우기 위해선 실태 조사라도 시작해야 할 텐데, 쉽지 않습니다. 내구제 대출 특성상 공범으로 처벌받을 것을 우려한 나머지, 명의를 제공한 사람들이 신고를 꺼리기 때문이죠. 도움을 받고 싶거나 양심에 가책을 느껴 신고하더라도, "당신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수사 기관에 물음에 위축돼 신고를 포기합니다. 20년 가까이 제대로 된 통계조차 만들어지지 못한 이유입니다.

개인적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

구독 가전 사기꾼

이런 상황에서 명의제공자들이 피해자인지, 공범인지 따지는 건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습니다. "네가 조심했어야지, 네가 멍청했지"라고 당사자를 나무라며 '개인의 문제'로 축소시키는 것만큼 손쉬운 해결 방법이 어딨을까요.

내구제 대출은 이제 사회로 첫 발을 내딛는 사회초년생을 범죄자나 신용불량자로 사회에 배출해 버립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한 사회적 비용도 발생한다는 점에서 분명 개인적 문제를 넘어선 사회적 문제입니다.

신용이 불량한 사람은 언제라도 존재할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은 언제라도 내구제 대출에 손을 댈 수 있으며, 그런 이들이 늘 존재한다는 걸 아는 불법 대출업자는 새로운 판매 모델이 등장할 때마다 신종 내구제 대출을 고안해내지 않을까요. 그럴 때마다 "바보 아니냐"며 계약자들을 탓하며 손 놓고 있을 순 없습니다.

휴대폰깡도 처음 알려졌을 땐 돈 몇 백에 눈이 먼 공범들을 탓했습니다. 하지만 부작용이 심각하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자 입법에 이르렀고, 우리 사회가 함께 노력한 덕분에 다행히 20년 전보다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내구제 대출을 알아보던 분들에게 "절대 하면 안 된다"는 '개인적 경고'를 보내고자 했던 것도 이번 기사의 취지가 맞습니다. 그보다는 이제라도 '내구제 대출'을 근절할 대안을 제대로 찾아보자는 '사회적 경고'를 던지는 것이 취재 기자들이 조금 더 방점을 찍고 싶었던 기사의 취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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