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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임윤찬과 이하느리의 시대에 살고 있다 [스프]

[커튼콜+] 임윤찬의 자유로움과 담대함…통영국제음악제를 다녀와서

임윤찬 이하느리
 

김수현 SBS 문화예술전문기자가 전해드리는 문화예술과 사람 이야기.
 

매년 3월 마지막 주말엔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립니다. 올해 통영국제음악제는 '내면으로의 여행'을 주제로 3월 28일부터 4월 6일까지 진행됐습니다. 좋은 공연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상주 연주자 임윤찬의 공연에 관심이 집중됐죠. 저는 개막일 심야 버스로 통영에 갔다가 셋째 날 임윤찬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한 리사이틀까지 보고 다시 새벽 버스로 돌아왔습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바흐가 작곡한, 건반 악기를 위한 작품으로 1741년에 처음 세상에 나왔습니다. 주제곡인 아리아에 30개의 변주곡이 이어지고, 마지막에 다시 아리아로 돌아오며 마무리되는 구조입니다. 이 작품을 처음 연주한 요한 고틀리프 골드베르크의 이름을 따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불립니다.

이 곡은 카이저링크 백작의 제안으로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백작은 자신의 집에 상주하던 쳄발로 주자 골드베르크에게 불면증을 달래주는 음악을 연주하게 했고, 바흐에게는 골드베르크가 칠 수 있도록 수면에 도움이 되는 음악을 써달라고 의뢰했다는 것입니다. 백작은 바흐가 써준 이 곡의 연주를 즐겨 들으면서 잠을 청했다고 하는데요,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있긴 합니다만, 포르켈이 쓴 바흐의 전기에 나오는 이 이야기가 유명해지면서 이 곡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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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임윤찬이 연주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은 후라면, 이 곡이 수면에 좋은 음악이라는 이야기는 정말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저는 임윤찬의 연주를 들으며 '과연 이 곡이 내가 알던 그 곡이 맞나?' 생각하며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보통은 좋아하는 곡이라도 긴 시간 쭉 듣다 보면 중간에 딴생각을 하거나 지루해지기 마련인데, 임윤찬의 연주는 그런 순간이 전혀 없었습니다.

바흐를 비롯해 바로크 시대 건반곡을 피아노로 연주할 때는, 당시의 악기인 쳄발로의 음색을 재현하기 위해 논 레가토(non-legato, 음을 부드럽게 연결해 연주하는 레가토 주법을 사용하지 않고 음표를 살짝 끊어 치는 것. 스타카토와는 다름)로 연주하고 페달 사용을 최소화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임윤찬의 접근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마치 극적인 낭만주의 시대 곡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페달을 많이 써서 잔향에 새로운 음이 어우러지는 효과를 의도하기도 했고, 템포에 변화를 주는 루바토(rubato)를 과감하게 사용했습니다. 깜짝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연주해 새로운 효과를 낸 곡들도 있었고, 느린 단조곡인 25번 변주는 깊은 탄식 같은 처연함에 가슴이 무너질 것만 같았습니다. 피아노에 온몸을 내던지는 듯 강렬한 타건으로 라흐마니노프의 느낌을 주는 곡도 있었습니다.

임윤찬의 연주는 왼손 저음부의 표현이 두드러지고 주 멜로디 뒤에 숨어 있던 내성을 뽑아내는 게 특징인데, 이번 공연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일반적으로는 오른손이 멜로디를 연주하고 왼손이 이를 뒷받침하는 반주를 맡지만, 바흐의 다성음악에서는 왼손도 오른손과 동등한 비중을 갖게 되죠. 원래도 왼손 연주가 중요한 곡이지만, 임윤찬은 이를 더욱 부각해 곡을 해체하고 재구성한 듯 새로운 멜로디를 뽑아냈습니다. 그의 연주는 낯설면서도 매혹적이었고, '교과서적인' 연주에 익숙했던 관객도 설득할 만큼 강한 흡인력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처연한 슬픔으로 흐느끼고, 때로는 발랄한 리듬으로 춤추다가, 때로는 뜨거운 격정으로 몰아치다가, 문자 그대로 천변만화(千變萬化)였습니다. 임윤찬이 피아노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어 하는 '모험가'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30번 변주까지 끝내고 다시 아리아가 연주되는데, 마치 긴 여정을 마치고, 혹은 온갖 인생의 경험을 겪은 뒤 집으로 돌아온 듯했습니다. 똑같지만 똑같지 않은 아리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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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찬 피아노 리사이틀 (제공: 통영국제음악재단)

기립박수 속 커튼콜 끝에 그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앙코르곡으로 뭘 연주해 주려나 했더니, 음표 몇 개만 치고 들어갔습니다. 다름 아닌 아리아의 베이스라인 음표들이었어요. 그러니까 '이게 출발점이었어요.'라고 일깨워주는 느낌이었죠. 여행의 출발점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마침표! 천변만화 연주의 뿌리는 결국 여기에 있었던 겁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앞서, 19살 작곡가 이하느리의 신곡 '라운드 앤드 벨버티-스무드 블렌드… (Round and velvety-smooth blend…)가 먼저 연주되었습니다. 이하느리는 임윤찬이 '이 시대 가장 뛰어난 작곡가 중 한 명'이라고 말하는 젊은 작곡가이고, 한국예술종합학교를 함께 다닌 음악적 벗입니다. 그는 지난해 저명한 작곡가 토마스 아데가 심사위원장을 맡은 버르토크 작곡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임윤찬은 이전에도 공연에서 이하느리의 곡을 연주한 적이 있고, 이번 리사이틀을 위해 직접 신곡을 위촉했습니다.
커튼콜+ 작곡가 이하느리 (제공: 목프로덕션)

이하느리는 얼음조각이 유리잔에 부딪치는 이미지로 이 작품을 설명했습니다. '얼음을 넣어 드시길 권장합니다. 얼음을 사용하실 경우에는 천천히 녹는 큰 얼음조각을 사용하는 편이 좋습니다'라고 했네요. 그는 작품명과 음악에 연관성을 두지는 않는 편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이 곡은 피아노 고음부의 청아한 소리로 시작해서, 건반 위를 종횡무진하다가 폭발하고, 다시 고요해지면서 고음부와 저음부로 나뉘어져 소멸하는 듯 마무리되는 곡이었어요. 마치 오묘하게 블렌딩한 위스키 한 잔을 천천히 음미한 기분이라고 할까요. 다채로운 음향이 명멸하는 이 곡은 이어진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의 훌륭한 예고편이었습니다.

임윤찬은 이 곡의 연주를 마치고 객석에 있던 작곡가 이하느리에게 손짓해 일으켜 세우고, 무대로 불러 함께 인사했는데요. 훤칠한 키에 비니를 눌러쓴 '요즘 젊은이' 이하느리는 임윤찬이 리드하는 대로 객석 전면과 합창석을 향해 함께 인사했습니다. 무대에 함께 선 2006년생 작곡가와 2004년생 피아니스트. 연주 못지않게 인상적인 장면이었어요.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현대음악, 그것도 젊은 한국인 작곡가의 곡을 매칭한 것은 흔히 볼 수 없는 시도였습니다. 임윤찬은 '우리 모두의 음악적 뿌리인 바흐의 가장 위대한 작품 골드베르크 변주곡, 그리고 이 시대 가장 뛰어난 작곡가 중 한 명인 이하느리의 곡을 연주합니다. 크게 대조되는 두 곡을 통해 음악이 어떻게 발전해 왔고 그 뿌리는 어떤 음악이었는지 경험하실 수 있을 겁니다'라고 프로그램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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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국제음악제 개막 공연 (제공: 통영국제음악재단)

공연 리뷰가 이미 많이 나왔는데 뭘 더 보탤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공연을 글로 설명하려 할수록 제가 온몸으로 느꼈던 그 음악의 생생함과는 오히려 멀어지는 것 같기도 했고요. 다만 이하느리의 현대음악과 '피아노 음악의 구약성서'라고 불리며 수많은 거장의 명연주를 낳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나란히 배치하고, 마음껏 자신만의 해석을 펼쳐낸 그 자유로움과 담대함에 대해서 꼭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임윤찬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는 기존 해석들과 크게 달라서 보수적인 청자들에게는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치열하게 음악과 대면하고 온몸을 던져 결국 음악과 하나가 되어버리는 임윤찬의 연주에 설득되지 않기는 어렵습니다. 그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여러 번 들었다는 지인은 '처음 들었을 때도 놀라웠지만, 이후 연주할 때마다 계속 달라져서 더욱 놀랍다'고 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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