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미국 곳곳에서 무너진 집단 면역…백신 '거부'하는 이들의 속내 [스프]

[뉴욕타임스 칼럼] This Is Why My Texas Town Lost Trust in Public Health, by Carrie McKean

스프 nyt
 

* 캐리 맥킨은 텍사스주 미드랜드에 사는 작가다.
 

올봄 서부 텍사스에 있다 보면, 마치 계절풍을 타고 시간 여행을 떠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우리는 1930년대에나 있을 법한 재난으로 전국적인 이목을 끌었다. 거센 모래폭풍이 일었고, 홍역이 창궐했다. 내가 사는 미드랜드에서 불과 100km 떨어진 곳에서 말이다. 한 학부모는 소셜미디어에 "2025년에 모래폭풍에 홍역이라니, 마치 지금 내가 아메리칸 걸 인형의 대공황 시기 버전을 사는 건가 싶다"는 자조적이고 어두운 농담을 올렸다.

이런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지난 10년간 일어난 일들 때문에 자주 당황하곤 했다. 만약 큰 딸아이를 낳고 처음 엄마가 된 2011년의 내게 누군가 딸아이가 14번째 생일을 맞을 때쯤 테슬라를 운전하고 자연주의 육아를 지향하는, 이른바 '크런치 그래놀라 맘'은 보수적인 사람 취급을 받을 거라고 말했다면,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웃어넘겼을 것이다. 또 늘 소아과 의사 선생님이 하는 말을 귀담아듣던 내게 앞으로 10년간 공중보건 전문가들의 말이 서서히 미덥지 않아질 거라고 말했다면, 사람 잘못 봤다며 역정을 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 동안 실제로 많은 것이 변했다. 공중보건 기관과 전문가들이 하는 말에 대한 신뢰를 잃은 미국인이 많아졌고, 특히 내가 사는 지역 같은 시골에서는 그런 변화가 더 도드라졌다. 개인들의 선택이 반영된 데이터만 봐도 알 수 있다. 2018년, 텍사스주 보건부에 백신 접종 면제 신청서를 제출한 사람은 총 4만 6천 명이었다. 지난해엔 9만 3천 명 이상이 백신을 맞지 않겠다고 신청했다.

지난 세월을 다시 산다면, 그래도 나는 소아과 의사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했을 것이고, 내 아이들에게 백신을 맞혔을 거다. 하지만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로, 나는 백신을 거부하는 내 이웃들의 생각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백신을 접종해야 한다는 공중보건 전문가의 조언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을 떠올려보라 하면 대체로 최악의 사람을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잘해봤자 낙후되고 멍청한 사람이란 취급을 피하지 못하며, 최악의 경우 이기적이고 공감 능력이 전혀 없는 몹쓸 사람으로 쉽사리 낙인찍힌다. 나도 비슷한 사람들을 보면 한심한 사람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자기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 학생들의 홍역 백신 접종률이 텍사스주에서 가장 낮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포트워스의 한 교회의 목사 이야기를 접했을 때 그랬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남을 깔아뭉개고 잘난 척을 하면 내 기분이야 잠깐 좋아질지 몰라도 보통 사람들이 백신 접종을 주저하는 이유와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으며, 결국 우리 사회가 공유한 문제를 풀지도 못한다. 공중보건 기관과 제도 전반에 대한 신뢰가 약화하면, 결국 우리 모두가 다 피해를 본다. 다시 신뢰를 회복하고 정상으로 돌아가려면, 어쩌다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는지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원래 학교 차원에서 백신을 접종하는 건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포함해 공중보건 당국의 권고사항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모든 개인에게 의료에 관한 선택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권리를 줘야 한다는 주장은 꼭 우파의 정치적 주장이라고만 볼 일이 아니라, 남북전쟁 이전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갈망과 맞닿아 있는 요구이기도 하다. 이는 백신 면제는 물론 트랜스젠더 의료 서비스, 임신 중절권, 의학적 조력 자살에 이르기까지 의료 부문 전반에 관한 다양한 논쟁과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미국의 근본적인 가치를 다른 중요한 가치들과 조율하는 일은 매우 복잡하고 지저분하며, 때로는 끔찍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백신 접종의 경우, 미국 사회는 그동안 백신을 맞지 않는 사람들도 그럭저럭 포용할 수 있었다. 대다수가 백신을 맞아 집단 면역을 형성한 덕분에 전체 사회는 계속 보호된 덕분이다. 하지만 공중보건 당국과 전문가를 향한 대중의 신뢰가 계속 약해지면서 백신을 맞는 사람들도 자꾸 줄었다. 미국 전역에 급증하는 홍역 사례는 집단 면역이 곳곳에서 무너졌음을 시사한다.

나처럼 과학을 부정하지 않고, 온건 보수 성향의 분별 있는 미국 학부모 중에는 국가 차원의 공중보건 당국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당국을 더는 믿지 못하는 이들이 꽤 있다. 우리는 보건 당국이 과연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며 가치 판단에 휘둘리지 않는지, 철저히 과학적인 사실을 기반으로 결정을 내리며 대형 제약업계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돼 있는지 의문을 품고 있다.

불신의 불씨는 2020년 이전에도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은 분명 불에 기름을 들이부은 사건이었다.

2020년 3월, 나는 나름대로 팬데믹의 삶에 적응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집에 있는 동안 이것저것 다양한 빵을 굽고, 집 앞 인도에 분필로 무지개를 그려놓았다. 2주 동안 외출을 최대한 자제하자는 #SafeAtHome 캠페인을 모두가 따르면,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신규 확진자 숫자도 줄고, 이내 일상을 회복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몇 주가 몇 달이 되고, 계속되는 공중보건 당국의 명령과 지침은 점차 우리가 우려하는 바, 우리에게 중요한 가치와 자꾸 어긋나고 부딪쳤다. 이곳 서부 텍사스에서는 개인의 자율성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일찌감치 승리했다. 몇 달 만에 우리는 원격이 아니라 직접 만나 생일파티를 했고, 교회에 모여 같이 예배드렸다. 미국 전역에서 이런 우리를 향한 조롱이 끊이지 않았다.

다른 곳보다 훨씬 더 빨리 정상화를 시도한 우리 지역에서도 방역 조치로 인한 피해가 있었다. 미국 내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소상공인이 무너졌고, 노인들은 비인간적인 사회적 고립을 겪다 요양원에서 홀로 쓸쓸히 죽어갔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온라인 수업에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했다.

2020년 늦봄, 우리는 불행 중 다행으로 어린이들은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잘 감염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그해 여름부터 학교를 열고, 아이들을 다시 학교에 보내야 한다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내 주장은 우리 지역사회에선 그럭저럭 지지를 받았지만, 전국적인 반응은 사뭇 달랐다. 내 주장에 곧바로 격렬히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어느덧 다른 반대자들과 마찬가지로, 과학을 부정하며 인류애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도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혔다. 내가 보기엔 오히려 공중보건 당국과 관계자들이 방역 지침을 맹목적으로 따르느라, 정작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너무 오랫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전국 곳곳에서 학교는 오랫동안 문을 닫았고, 여러 가지 방역 조치가 시행됐다. 하지만 우리 동네처럼 보수적인 지역에서는 상식에 반하는 제한 조치나 조언에 사람들이 곧바로 발끈했다. 우리 아이에게 언제 홍역과 소아마비 예방접종을 할지 결정할 때 내가 믿고 조언을 구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올드 네이비(Old Navy) 같은 옷 가게에서 파는 싸구려 면 마스크가 미세한 병원균으로부터 아이들을 지켜주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과학적인 조언"에 감히 의문을 품고 주저하는 것은 거의 신성모독 취급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직업이나 지위를 걸고 정부의 과도한 지침에 용기를 내 저항했다.

이는 그저 개인의 자유를 무조건 지켜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개인의 자유를 소중히 여긴 덕분에 우리는 질병을 퇴치한다는 명목으로 자유를 제한한 것이 어린이, 노인, 외로운 저소득층에게 얼마나 큰 타격을 주는지 똑똑히 보고 깨달았다.

어쨌든 그때는 팬데믹이 한창이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더 많은 정보를 얻었다. 실수는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우리가 팬데믹 때 너무 오랫동안 학교를 닫았다고 생각한다는 공중보건 전문가들을 어렵잖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는 이렇게 조심스럽게 말하는 사람이 왜 없었던 걸까? 왜 정부 차원에서 마스크가 과연 효과가 있는지, 학교를 닫는 것이 다음에도 올바른 결정이 될지 대규모 연구를 진행하지 않았나? 우리 동네처럼 보수적인 지역에서는 다음번에 또 팬데믹이 발생하면 비용이 아무리 많이 들더라도 코로나19 때와 같은 대책을 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공중보건 당국을 이끌 새로운 리더는 미국인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다른 무엇보다도 미국인들에 대한 겸손과 존중을 보여야 한다. 물론 우리 중에는 누군가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거다. 하지만 다 그렇진 않다. 오히려 코로나19 대책과 관련해 무엇을 잘했고, 무엇이 문제였는지 차분하게 따져볼 수 있는 위원회만 만들어도 만족할 사람이 많다.

다른 방법도 있다. 공중보건 당국에서 연구 부문과 정책 부문을 분리하는 것이다.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이 직접 연구를 지휘해선 안 된다. 물론 반대로 연구 담당자가 직접 정책을 진두지휘할 필요도 없다. 아무리 전문가라도 우리는 결국, 우리가 뭘 모르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인간이다.

공중보건 당국이 좀 더 냉정하게 조언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팬데믹 기간 나는 특히 유럽 각국의 보건 당국이 내놓는 지침을 세심하게 살펴봤다. 유럽 당국은 미국처럼 문화전쟁에 휩쓸려 좌충우돌하지 않았다. 대신 이념적인 색채를 쏙 빼고, 시민들이 책임 있는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있도록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무조건 복종을 강요하지 않았다. 미국 지도자들은 어린이들이 백신을 맞아야만 정상적인 생활을 재개할 수 있게 하려고 했다. 반대로 몇몇 유럽 나라는 고위험군 가정이나 주요 기저질환이 있는 어린이에게 백신을 우선 접종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백신 부작용을 비롯해 잠재적 위험을 아주 심각하게 여기는 나라도 있었다. 이런 접근법은 대개 아이들은 코로나19에 걸려도 예후가 안 좋은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을 고려한 것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겸손이나 존중의 모범과는 아주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를 경멸하는 사람 대부분은 아마 그가 임명하고 발탁한 모든 인사들도 똑같이 무시할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대중으로부터 보건 당국의 신뢰를 되찾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인물을 발탁했다. 이들은 자기 직을 걸고, 또는 피해를 볼 위험을 무릅쓰고도 다른 이가 반대할 권리를 옹호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제이 바타차르야 신임 국립보건원장이나, 마티 마카리 신임 식품의약국장이 그렇다. 바타르차야 박사는 지난해 12월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은 팬데믹을 거치면서 주류 과학계가 선의의 세력이라기보다 자신들 위에 군림하려는 일종의 권위주의 권력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문제를 인정하는 건 훌륭한 첫걸음이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더 깊고 인사이트 넘치는 이야기는 스브스프리미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콘텐츠의 남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하단 버튼 클릭! | 스브스프리미엄 바로가기 버튼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많이 본 뉴스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