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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농구는 오랫동안 아시아선수권이나 아시안게임 등 각종 국제대회에서 중국과 메달 색깔을 놓고 숱한 명승부를 펼쳤습니다. 우리가 이긴 적도 꽤 있지만 패배한 적도 많습니다. 키가 커도 너무 큰 중국의 괴물 센터가 한국을 괴롭혔기 때문인데요. 우리의 뇌리에 아직도 남아 있는 중국의 거인 센터 계보를 하나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야오밍 이전 한국을 괴롭혔던 '목철주'
많은 사람들이 '중국 농구 선수' 하면 야오밍을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걸어 다니는 만리장성'으로 불리는 중국이 낳은 최고 선수이자 미 프로농구 NBA에서도 크게 활약했던 스타였습니다.

그런데 야오밍 이전에 중국에는 '목철주'가 있었습니다. 1980년대까지는 국내 언론에서 목철주로 불렀습니다. 중국어 발음으로 표기하면 '무티에주'입니다. '철주'란 한자 뜻은 철로 된 기둥, 영어로 'Iron Pole'. 사진을 보면 이름을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거대한 체구를 갖고 있습니다. 1949년에 태어나 만 59살이었던 지난 2008년에 심근 경색으로 세상을 떠난 원조 거인 센터였습니다.
왕년의 농구 스타 A 씨는 필자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국제대회에 나갔을 때 숙소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내 눈에 어떤 사람의 배만 보였다. 위로 쳐다보니 목철주였는데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였다."
목철주는 자신의 키를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대회에 출전할 때 나오는 책자에는 220cm, 225cm로 제각각이었습니다. 1979년 11월 일본 나고야에서 농구 아시아선수권대회가 열렸을 때 그는 자신의 키를 238cm로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장신 센터와 나란히 찍은 사진 등 여러 정황을 분석한 외국 언론들은 그의 키를 228cm로 보도했고 현재도 228cm로 알려져 있습니다. 야오밍과 거의 비슷한 것입니다.
목철주는 발도 엄청 커 농구화를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나고야 대회 때 아식스사가 그의 발을 측정했는데 37cm로 나왔습니다. 아식스사에 따르면 이전 기록은 34cm이었다고 하는데 이때 목철주는 자기 발에 맞는 고급 농구화를 5개 정도 선물로 받았다고 합니다.

1970년대 말 한국 남자 농구대표팀의 모토는 '타도 중공'. 일본은 한 수 아래로 보고 중공만 꺾으면 아시아 챔피언에 등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한국은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목철주의 괴력을 제대로 느꼈습니다. 우리 간판선수 김동광과 박수교의 얼굴은 목철주의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140kg이 넘는 그의 체구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습니다. 움직임은 느렸지만 손을 뻗으면 림(골대)에 닿을 만큼 컸고 거의 서서 슛을 넣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활약으로 중국은 1977년부터 83년까지 아시아에서 가장 권위 있었던 ABC 대회를 4회 연속 제패할 수 있었고 1978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까지 거머쥐었습니다. 목철주의 공포에 시달리던 한국 남자 농구는 그가 불참했던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때 중국을 1점 차로 꺾고 극적으로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목철주가 바로 복귀한 1983년 11월 ABC 대회에서는 63:92, 29점 차로 초유의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일찍 세상 떠난 '여자 목철주' 진월방

목철주가 사라질 무렵 중국 여자 농구에도 '괴물 센터'가 등장했습니다. 그 선수가 바로 진월방입니다. 중국어 발음으로는 천위에팡. 1963년에 태어났는데 안타깝게도 2000년 9월 37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근 장쯔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역대 중국 여자농구 선수 가운데 가장 키가 컸습니다. 그의 키는 최저 208cm에서 최고 218cm까지 보도됐는데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215cm로 알려졌습니다.
진월방과 동시대에 대결했던 한국의 대표적 선수가 박찬숙과 김화순, 그리고 당시 만 18살 막내였던 성정아입니다. 190cm에 가까웠던 박찬숙은 아시아 슈퍼스타로 한국 여자농구의 최고 전설입니다. 하지만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중국에 우승을 내줬습니다. 절치부심했던 우리 대표팀은 2년 뒤 1984년 LA 올림픽에서는 중국을 꺾고 결승에 올라 은메달을 차지했습니다, 중국은 동메달에 머물렀습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여자배구가 구기 종목 사상 최초의 동메달을 따냈는데, 여자 농구는 이것을 넘어 그때까지 구기 종목 최고 성적인 올림픽 은메달이라는 기적을 창조한 것입니다.
'공포의 괴물 센터' 정하이샤

진월방의 선수 생활은 무척 짧았습니다. 1984년 LA 올림픽 이후 뇌혈전증과 빈혈로 인해 이듬해 1985년 22세의 나이로 일찍 은퇴해야 했습니다. 진월방에 이어 정말 '괴물 센터'가 나왔습니다. 그 선수가 바로 정하이샤. 진월방과 달리 선수 생활을 오래 했습니다. 16살이던 1983년에 국가대표가 된 뒤 10년 이상 중국을 대표해 간판스타로 뛰었습니다. 키 206cm에 몸무게는 거의 120kg이나 됐습니다. 엄청난 높이에다 풀타임을 뛰는 체력, 여기에 타고난 슈팅 감각까지 갖춰 진월방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그야말로 '공포의 센터'로 불렸습니다.
성취도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1984년 LA 올림픽 동메달,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은메달을 획득했고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도 1983년 동메달, 1994년 은메달을 따냈습니다. 1994년 호주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평균 26.4득점, 13.1리바운드, 야투율 83.5%를 기록하며 MVP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아시안게임에서는 1986년 서울에서 금메달, 1990년 베이징에서 은메달, 1994년 히로시마에서 동메달을 거머쥐었고 미국 여자 프로농구(WNBA)에 진출해 한 시즌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주니어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는데, 초기에는 우리나라 성정아-조문주가 주로 마크를 했고 이후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정은순과 센터 대결을 펼쳐 숱한 명장면을 연출했습니다. 우리 여자농구 선수들, 정하이샤를 막느라 10년 이상 힘들었는데요, 그래도 1990년과 1994년 아시안게임에서 정하이샤가 버틴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거머쥐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대륙을 들썩인 최고 거인 장쯔위

2019년 초부터 중국 대륙이 한 소녀로 들썩이기 시작했습니다. 정하이샤는 만 12살 때 172㎝이었다가 다 성장한 뒤에는 206㎝이었습니다. 그런데 겨우 만 11살의 나이에 210㎝나 되는 소녀가 나타나 중국에서 큰 화제를 모았는데 이 소녀의 이름은 장쯔위(张子宇). 유명 영화배우 장쯔이와 발음이 비슷해 더 유명해졌습니다. 필자는 지난 2019년 이 선수에 대한 기사를 작성해서 국내에 가장 먼저 소개했습니다. (관련기사 보기)
그 당시 산둥성 지난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같은 또래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보면 진짜 2배 정도 컸습니다. 장쯔위의 부모는 모두 장신입니다. 어머니 위잉은 산둥성 여자농구팀 코치로 활약했고 아버지도 농구 실력이 남달랐습니다. 부모 덕분에 장쯔위는 엄청난 키는 물론 농구에 대한 재능까지 물려받은 것입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