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이 회장의 미국 CES 출장을 수행한 한 임원은 "회장님이 다른 회사 제품을 보고 '정신 안 차리고 있으면 금방 뒤지겠다, 긴장된다' 하셨는데, 우리가 먼저 가 보고 느낀 바와 정확히 일치했다"고 술회했다. "이제 이 정도 갖고는 안 되겠다. 더 깊이 미래를 직시하고 더 멀리 보고 더 기술을 완벽하게 가져가자"는 오너 말에 조직 전체가 긴장해 미래를 대비할 수 있었다는 거다. 이 회장이 공개적으로 '삼성테크윈 부정부패'를 반성한 뒤엔 그룹 전반에 고강도 감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협력사 사이 "삼성만큼 접대 안 받는 대기업이 없다"는 얘기가 나오게 된 계기다.
병상에 있는 이 회장의 과거 행보가 떠오른 건 최근 아들 이재용 부회장의 '침묵'을 보면서다. 일본 경제 보복에 따른 재료수급 상황을 챙기겠다며 직접 일본을 다녀온 그다. 수행단도 전용기도 없이 요란하지 않게 떠났지만 돌아올 때는 달랐다.
전체 법인세의 16%를 부담하는 기업 총수가 위기 속에 어떤 해결책을 들고 왔는지, 현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의 입에 온 사회의 관심이 쏠렸지만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일본에 도착해 했다는 "장마네요"라는 짧은 말에 '궂은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 마음'이라며 문학평론의 영역에 도전한 매체까지 나왔다.
이 회장 부자를 가까이서 지켜본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과 아버지의 단순 비교는 아직 곤란하다"고 말했다. 국정농단 사건 대법원 선고를 앞두고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수사까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이 부회장이 어떤 말이든 공개적으로 꺼내기 어렵다는 거다.
이 관계자는 "이 부회장도 자기 생각이 확고하게 있고 임원들에게 정확히 전달한다"며, "여러 문제가 다 해결되고 나면 자신의 스타일과 경영전략, 철학 등을 말할 기회가 올 거"라고 말했다. 논란 없는 승계로 삼성 회장에 오른 이 회장도 취임 6년이 된 1993년에야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통해 오늘의 삼성을 만들지 않았느냐는 옹호다.
하지만 삼성 내부에선 이 부회장의 조용한 행보를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임원들을 통해 방향은 하달되지만 정작 '우리 부회장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는 도통 모르겠다는 거다.
최근 삼성전자 사내 게시판엔 '정치권이 저지른 일을 해결하러 총수가 대신 돌아다니는데 화가 난다'는 글이 올라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치권이 해결책은 찾지 못하고 '죽창'이니 '불매 운동' 따위 감성 몰이에만 나서는 분위기를 걱정하는 목소리다. 침묵하는 오너를 보며 국가 경제에 기여해왔다는 자부심이 사라지고 있다는 자괴감으로 읽힌다.
최 회장은 그러면서도 "차차 (국산품이 SK하이닉스 공정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하루아침에 해결책이 뚝딱 나오는 게 아니니 각자 위치에서 맡은 바를 천천히 잘해내는 게 해법"이라고도 말했다. 정확한 진단을 내린 뒤, 자신감을 잃지 않고 해결책 찾아 제 갈 길 가겠다는 총수 말에 안도했다는 투자자들이 많다. 재계는 "최 회장이 세대교체가 끝난 4대 그룹의 맏형 노릇을 확실히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일본 경제 보복이 부른 전례 없는 위기에 많은 기업들이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100개 리스트가 있었다"는 식의 무소용한 얘기만 하고 있다. 출구가 어딘지 모를 '깜깜이' 상태에 빠진 기업들로선 함께 탈출구를 고민할 경영계 리더의 '한 마디'가 더 절실할지 모른다.
사회가 대기업 총수들 말에 귀 기울이는 건 이들이 경제에 끼치는 영향력이 큰 탓이다. 그들의 생각에서 나오는 경영 전략과 조직 문화가 한국 사회와 경제 생태계 전반에 두루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이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