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리포트+에서는 김복동 할머니의 생전 말씀으로 여성 인권 운동가이자 평화 운동가였던 할머니의 삶을 되돌아봤습니다.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로 끌려다니며 끔찍한 고초를 당한 할머니는 7년이 흐른 뒤에야 조국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상처를 안고 살아왔습니다.
1993년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유엔(UN) 세계인권대회에서, 2000년에는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 법정에 증인으로 나서 일본군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김 할머니는 미국 워싱턴 일본 대사관을 찾았을 때도 "억울해서 죽지 못한다"며 "아베 총리는 법적으로 사죄하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후 2016년까지 할머니는 유엔인권이사회, 미국, 영국, 독일, 노르웨이, 일본 등 각지에서 평화 운동가로 활동했습니다. 90세의 나이에도 '전쟁 없는 세상', '전쟁 중 성폭력 피해자들이 생기지 않는 세상'을 외치는 할머니의 올곧은 목소리는 전 세계에 깊은 울림을 만들었습니다. 세계 무력분쟁 지역의 성폭력 피해자들은 할머니를 "우리의 영웅, 우리의 어머니, 우리의 희망"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9월에는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요구하며 휠체어를 탄 채로 1인 시위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할머니는 이 자리에서도 "위로금 받으려 여태 싸운 줄 아느냐, 1000억을 줘도 못 받는다"며 분노했습니다.
눈을 감기 전 마지막 순간에도 할머니는 일본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할머니의 임종을 함께 한 윤미향 정대협 대표는 "할머니가 어제 오후 사력을 다해 마지막 말씀을 하셨다"면서 "할머니의 죽음 앞에서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은 반성하고 새로운 결의를 다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라는 표현에는 피해자의 고통을 은폐하려는 일본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이에 따라, 작은따옴표를 붙여 '위안부'가 일본군에 의해 불린 용어임을 표시하고 일본군을 함께 명시해 범죄의 주체를 명확히 하고자 합니다.
(기획·구성: 심우섭, 장아람 / 디자인: 감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