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군주의 은사권(恩赦權)에서 비롯된 사면. 헌법이 만민평등의 민주사회를 선언하면서 법치주의에 근간한 특별사면으로 바뀐 지 오래지만, 지금껏 우리나라에서 이뤄진 대통령의 특사는 사실상 군주와 다를 바 없었다. 사면은 <특별사면① '평균 2년'…"반성할 시간도 주지 않는 특사">와 < 특별사면②효과'zero'…경제살리기 커녕 재범만 조장> 기사에서 보도했듯 권력층의 보호구로 활용됐고, ‘정의와 평등’이라는 헌법 가치를 훼손했기 때문이다. 부작용이 커진 탓에 정치권은 뒤늦게 “대통령 특사의 남용을 방지하겠다”며 반세기만인 지난 2008년 사면법을 개정했다. 법무부 산하에 사면심사위원회(이하 위원회)를 만들어 특사 후보자를 심사해 공정성을 확보하겠다는 취지에서였다. 즉, 위원회는 현행 법체계에서 대통령의 특사 남용을 막을 유일한 견제장치인 셈이다. 그러나 위원회 구성 이후 특사에서도 매번 비판이 제기됐다. 위원회가 제대로 작동을 못한 것일까, 위원회의 제언을 대통령이 무시한 것일까. 정답은 회의록에 있다.
SBS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이 역대 사면심사위 회의록을 분석했다.사면법은 회의록을 ‘사면이 있고 5년이 지난 후 공개한다’고 규정한다. 현재 시점에서 이명박 정권 시절인 2008년 6월4일부터 2010년 8월15일까지 이뤄진 5차례 특별사면 관련 회의록만 공개 가능하다. <마부작침>은 5개 회의록 전체를 확보해 분석해 본 결과, 위원회는 대통령 특별사면의 '들러리' 역할에 그쳤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견제 역할도,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역할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부작침>은 특사는 사회 전체에 영향을 주는 통치권자의 행위로, 국민 전체가 알아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전체 회의록과 역대 심사위원 실명 명단>을 기사 하단에 공개한다.
●‘회의는 3시간30분’…‘회의록은 A4용지 6장’
사면심사위원회는 법에 따라 위원장인 법무장관을 포함해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검찰 내에선 통상 법무장관 외 법무차관, 검찰국장, 대검찰청 기획조정부장 등이 참석하고, 교수나 변호사 등 비공무원 4명 이상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 같은 인적 구성으로 위원회가 꾸려진 뒤, ‘2008년 8.15 특사’를 나흘 앞둔 11일 사면심사위원회가 열렸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당시 특사로 ‘1조원대 분식회계’ 최태원 SK그룹 회장, ‘9백억원대 횡령’ 정몽구 회장, ‘보복 폭행’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등 경제인 14명을 비롯해, 북풍사건 주역 권영해 전 안기부장,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 등 권력층이 무더기 면죄부를 받았다. 하지만, 회의에선 논쟁도, 적극적인 반대도 없었다.
당시 법무부는 “4시간 남짓 회의에서 다양한 의견이 오가며 격론을 벌였다”고 밝혔지만, 5년 뒤 공개된 ‘회의록’에선 그런 분위기는 찾을 수 없었다. 회의 시간에 비해 턱없이 짧은 A4용지 6장(대화 기준) 분량은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당시 문성우 법무차관의 “건국 60년을 맞아 경제 살리기에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는 발언과 이인규 대검찰청 기조부장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경제인 사면의 필요성이 있다”는 발언으로 상황 정리는 애당초 끝났다. 외부위원의 짧은 우려 표시만 있을 뿐 강한 반대는 없었다. 문성우 차관의 “다른 의견이 없으므로 적정 의결됐다”는 말로 회의는 끝났고, 과거와 다를 바 없는 특별사면이 단행됐다. 사면 대상자는 사전에 정해져 있고, 회의는 구색 맞추기였던 셈이다.
●“삼성을 상처 덜 받고 빨리 주전선수로 뛰게 해야” 편파일색 이건희 사면
사면심사위의 한계는 '헌법가치를 부정하고 법치주의를 훼손한 대표적 사례' 중 하나로 꼽히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원포인트 사면’ 때도 여실히 드러났다는 지적이다. ‘이 회장 1명’을 위해 지난 2009년 12월24일 회의가 열렸다. ‘경제정의 실현’이라는 관심 속에 검찰에 이어 특별검사까지 나서 수사했던 사건이었다. 오랜 시간이 걸려 어렵사리 기소가 됐지만, 대법원은 ‘봐주기 판결’ 논란 속에 집행유예를 선고했고, 형 확정 4개월 만에 사면 대상자로 선정된 것이다. 특히 이건희 회장은 1997년 한 차례 특사 이후, 두 번째 특사를 받기 위해 회의 테이블에 오른 상황이었다.
“국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자”는 이귀남 당시 법무장관의 모두발언으로 회의는 시작됐다. 하지만, 국익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회의록에 드러난 검찰 소속 위원과 외부위원들이 생각하는 국익은 시민들이 생각하는 헌법 가치와 동떨어져 있었다.
검찰 내부에서조차 “헌법을 돈과 거래한 것”이라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회의록에서 이런 의견이나 사회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다. 위원들은 제대로 된 반대 의견도 개진하지 않았다. 도리어 법과 원칙은 약자에게만 엄격하게 적용되고 권력층은 예외라는 박탈감만 키웠다. 법치주의에 대한 극단적 냉소감만 조장했다는 지적에 직면했다.
●“국가 최고위층 뜻 거부 못해”…한계점 스스로 노출한 위원회
‘법치주의 파괴’라는 비판 속에 이뤄진 이건희 회장 사면이 있고 이듬해인 2010년 8월15일 특사가 다시 단행됐다. 현시점에서 마지막으로 공개된 회의록이다. 해당 회의록을 분석해보면, 이전과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이는 ‘2009년 이건희 회장 사면’과 ‘2010년 8월 사면심사위 회의’ 사이에 사면위원회 명단이 공개된 것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법무부는 그간 “위원들이 외부 압력과 비난 여론에 노출되는 것을 막고, 오해를 방지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로 명단 공개를 거부했다. 그러나 시민단체는 공개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국민의 건전한 비판이 장려돼야 하고, 명단공개가 사면권의 적정한 행사에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과정을 거친 끝에 2010년 1월 전격적으로 사면심사위 명단이 공개됐다.
명단 공개 이후 열린 회의에선 비교적 적극적인 의견 개진이 이뤄졌다는 점을 회의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서청원 새누리당 의원,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원 등 정치인, ‘김홍수 법조게이트’ 사건에 연루된 조관행 부장판사 등 비위 판·검사 8명,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 등 고위공직자, 유상부 전 포스코 회장, 김홍기 전 삼성 SDS대표 등 경제인 등 권력층에 대한 면죄부를 막지는 못했다. 이런 탓에 위원들 스스로 사면심사위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드러냈고, 한계를 인정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대 교수는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특사를 인정하면서도 헌법에 부합하는 사면을 하기 위해선 사면심사위원회를 개선하는 게 가장 현실적 방안”이라고 말했다. 법무부장관이 위촉하는 위원회 구성을 바꿔 독립성을 강화하는 방법이 꾸준히 제기된 개선안 중 하나다. 홍 교수는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구성하는 위원이 아닌 야당 등 제3자에게도 추천권을 주는 방식 등으로 위원회를 구성해 지금보다 독립성을 확보하고, 대통령도 이들의 의견을 존중해 특별사면을 실시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권지윤 기자 (legend8169@sbs.co.kr)
박원경 기자 (seagull@sbs.co.kr)
분석: 한창진·장동호
디자인/개발: 임송이
※ 마부작침(磨斧作針) :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방대한 데이터와 정보 속에서 송곳 같은 팩트를 찾는 저널리즘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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