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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임기 절반 남았는데…영(令)이 안 서는 이유

[취재파일] 임기 절반 남았는데…영(令)이 안 서는 이유
대선을 앞둔 2011년 말, 서울시경 출입기자를 마치고 정치부로 발령을 받았다. 1년 만의 정당팀 복귀였다. 예전 출입처였던 한나라당을 맡았다. 기자실도, 취재원도 모두 그대로였다. 아침 회의에 갔다 와서 낮 뉴스를 제작하고 의원회관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전화를 돌리고 저녁 뉴스를 만드는 일상은 역시 달라진 게 없었다.

나를 당황스럽게 한 건 의원들이었다. 정당팀 출입기자의 주요 취재포인트 중 하나는 의원모임이다. 특히 계파별 모임은 큰 흐름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난 2010년 세종시 수정안으로 한나라당 내에서 친이계와 친박계가 정면 충돌했던 당시, 계파 모임은 최전선 사령부 같은 곳이었다.

한나라당 내 친이계 담당이었던 나는 자연스럽게 <함께 내일로>, <국민통합포럼> 같은 모임을 수소문했다. 하지만 당내 권력의 정점에 섰던 친이계 계파 모임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정당팀을 떠나기 전 이미 유력 대선 후보였던 당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쫓아 '주이야박'(晝李夜朴)이란 말이 나오긴 했어도 공고하던 친이계였다.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하면서 상황은 분명해졌다. '4월 총선'. 그 지상과제 앞에 계파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발목을 잡는다며 친박 타도를 외쳤던 강경론자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박근혜 전 대표를 향하고 있었다. 

창피할 것 같았다. 아니었다. 명분은 늘 있게 마련이다. '정권재창출'. 이 한마디로 모든 게 정리됐다. 의원들은 싸울 때가 아니라 힘을 모을 때라며 핏대를 올렸다. 공천 국면에서 일부 인사들의 절규가 터져나오기도 했지만 묻혔다. 대세는 굳어져 있었다. 의원들에겐 '배지'를 다시 달아줄 수 있는 사람이 갑(甲)일 뿐이다. 권력이란 원래 그런 건지도 모른다.

● 고개 돌린 여당

지난 25일 박근혜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이례적으로 강한 발언을 쏟아냈다. 무려 12분을 국회와 정치권을 비판하는 데 할애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여당, 보다 정확히 말해 자신의 최측근이었던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겨냥한 발언이었다.

박 대통령은 "정부를 도와줄 수 있는 여당에서조차 그것 (민생법안)을 관철시키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여당의 원내 사령탑도 정부 여당의 경제살리기에 어떤 국회의 협조를 구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또 "정치는 국민들의 민의를 대신하는 것이고 국민들의 대변자이지 자기의 정치 철학과 정치적 논리에 이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누가 봐도 대통령이 직접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사퇴를 요구한 발언이었다.
유승민_640
새누리당은 즉각 의원총회를 소집했다. 결과는 청와대의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의총을 마친 뒤 청와대와 여당 사이에 소통이 부족했다는 의원들의 지적을 받아들인다면서 청와대 '식구'들과 함께 당청 관계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친박계 의원들의 사퇴 요구는 더 잘하라는 채찍으로 받아들이겠다며 받아 넘겼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역시 "사퇴 요구가 있긴 했지만 절대 다수가 봉합하자는 의견이었다"며 유승민 원내대표를 거들었다.

임기가 절반 넘게 남은 대통령이 야당도 아닌 여당에게, 그것도 공식 회의 석상에서 작심하고 던진 사퇴 요구는 그렇게 '퇴짜'를 맞았다. 이유가 뭘까? 앞단락에서 언급했던 친이계 소멸(?)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인다. 국회의원 선거가 1년도 채 남지 않았다.

이를 모를 리 없는 박 대통령 역시 "(공약이나 정책을) 정치적 수단으로 삼아 당선된 후에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해 주셔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표'에 죽고 사는 정치인들이 대통령의 요구에 등을 돌린 것 역시 '표'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표'는 민심이다.
박근혜 대통령 캡쳐_640
● 정치력 발휘는 여당 만의 몫?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5일 국무회의에서 <경제살리기 법안>, <민생 법안>을 통과시켜 주지 않는 여야 정치권에 강한 불만을 쏟아냈다. 일이나 하게 해주고 평가를 하든 심판을 하든 해야 할 것 아니냐고 울분을 토했다. 역대 대통령들이 했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다만 이전에 대통령들이 이런 얘기를 했던 때는 여소야대 국면인 경우가 많았다.

현재 여당인 새누리당 의석은 국회 과반이다. 예전 같았으면 속칭 '날치기'로 정권이 요구하는 중점 법안은 벌써 통과시켰을 것이다.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18대 국회 말 여야는 이른 바 '국회선진화법'을 통과시켰다. 당시 다수당인 새누리당을 이끌던 비상대책위원장은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여당이 야당과 이런 저런 타협안을 낼 때마다 청와대는 불만을 토로하곤 한다. 하지만 여건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많다. 예전처럼 날치기가 안 되는 마당에 타협은 불가피하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이 (아마도 부정적인 의미에서) 박 대통령이 지적한 소위 <급하지 않은> 정치적 법안들일 수 있다. 이 부산물을 최소화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국을 이끌어 가는 능력이 바로 정치력이다.

그렇다면 <정치력은 누가 발휘해야 하는가?>라는 원론적인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첫번째 당사자는 협상 주체인 여당이다. 하지만 여당도 정당인지라 표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중우정치라는 말이 있는 걸 보면 민의가 항상 옳은 방향으로 간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뭔가 돌파가 필요한 순간, 정치력을 발휘해야 하는 곳은 나라 정책을 끌고 가는 곳, 청와대다. 청와대와 정부는 흔히 혼용되기도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직업 관료들이 모인 정부와 청와대는 엄연히 다르다. 정부의 정책 방향을 잡아주고 비전을 제시하는 곳이 청와대다. 청와대가 관료들과 함께 뒷짐지고 앉아 국회를 욕하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청와대 캡쳐_640
● 남은 임기 2년 8개월

야당 설득을 전적으로 여당에게만 맡겨놓고 왜 안 되느냐고 채근하는 건 하수라고 혹자는 말한다. 절박하다면 청와대가 직접 나서서라도 설득하고 타협을 이뤄내야 한다. 대표적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에서도 대통령이 직접 야당 설득에 나서는 건 그리 이례적인 모습이 아니다.

독재정권 시절, 청와대가 야당을 설득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상당 기간 청와대는 돈과 정보로 야당을 통제했다. 돈과 정보마저 (상당 부분) 투명하게 된 지금, 청와대에게 남은 수단은 지지율 밖에 없다고 볼 수 있다. 지지율은 민심이다. 여당 뿐 아니라 야당도 무시하기 힘든 가장 강력한 무기다.

현재 정권 지지율은 여당 지지율보다도 낮다. 혹자들은 말한다. "만약 현 정권 지지율이 높았어도 여당에서 유승민 원내대표를 재신임했을까?" 정치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며 대통령 임기는 아직도 2년 8개월이나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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