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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취재파일] 세월호 1년 - 우리는 왜 그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을까?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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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1주기 특집 팟캐스트 '세월호 1년 - 우리는 왜 그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을까?' 2부입니다.
▶ [오디오 취재파일] 세월호 1년 - 우리는 왜 그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을까? ①

2부에서는 세월호를 다뤘던 언론의 문제,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의 문제, 그리고 세월호 참사가 우리 사회와 개인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심영구/SBS 기자 - 세월호 참사 당시 팽목항 취재 담당]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한국 방송의, 한국 언론의 민 낯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게 재난보도 분과의 공통된 인식이었고요…

[양두원/SBS 영상취재기자]
원래는 사실 매뉴얼이 없어서 못하진 않았거든요. 포토라인이라든…보도준칙에 대해서 매뉴얼은 분명히 있었는데…

[류란/SBS 기자 - 세월호 참사 당시 목포해경 취재 담당]
글을 쓰기 보다는 영상으로 이야기하는 매체인 방송기자들이 더 쉽게, 더 강력하게 빠지게 되는 유혹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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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준 / 진행자]
안녕하십니까? 특집 SBS 오디오 취재파일 김성준입니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16일) 세월호 참사 1주기 특집을 보내드립니다. 참사 이후 1년, 무엇이 바뀌었고 무엇이 여전히 남아 있는지 좀 더 깊이 있게 알아봅니다. 또 현장 취재기자들이 보고 느낀 지난 1년을 회고해 보겠습니다. 지금 시작합니다.
 
자 그러면 이번이 참사의 당사자들이 그 동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우리가 알아봤는데요, 이번에는 그럼 정부와 또는 정책, 이런 정치권, 언론 지난 1년간 세월호를 겪고 어떻게 변화를 겪었는지 한 번 알아보는 시간을 시작을 해보겠습니다. 자 심영구 기자가 먼저 언론의 변화를 이야기해 볼까요?
 
우리가 사실은 정말 쓰고 싶지 않은 단어지만 언론 전체가 지난 1년 전 기레기라는 욕까지 얻어먹는 상황까지 추락을 했었는데, 그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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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우리는 다르게 보도할 것인가?'

[심영구 / SBS 기자 – 세월호 참사 당시 팽목항 취재 담당]
자성의 목소리가 많이 나오긴 했습니다.
 
이게 뭐 외부에서 그런 공격을 받고, 외부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고 사실, 보도의 당사자였던 분들이니까. 그런 분들한테 공격을 받고 비판을 받고 그러고서 안팎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와서… 이를테면 저도 참가했었습니다만, 방송 기자 연합회 저널리즘 특위라는 데서 재난보도, 세월호 보도에 국한해서 ‘세월호 보도…저널리즘의 침몰’이라는 모니터 보고서를 냈습니다. 그래서 이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한국 방송의 한국 언론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게 재난보도분과의 공통적인 인식이었고요.
 
그리고 제가 아까 말씀 드렸지마는 다음에도 이런 참사가 일어난다면은 구조할 수 있느냐는, 어떤 구조 당국의 문제일 수도 있고, 그런데 ‘과연 우리는 다르게 보도할 것인가?’ 라는 부분에서…
 
저는 한 석 달 넉 달 그때 한창 저희가 작년에 참사 발생한 직후에 그로부터 좀 지났을 때 반성하고 한창 그랬을 때는, 좀 ‘다시 그런 게 난다면 다르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 1년이 지난 지금에서는…겪었던 사람들은 좀 다르게 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어요. 그런데 그게 과연 이 참사가 몇 년 더 지나가지고 몇 년 지나서 새로운 사람들이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또 그런 사건이 난다면 다르게 보도할 것인가?
 
결국은 그런 반성을 했고 그런 트라우마, 저희도 일종의 트라우마를 겪었는데, 그런 사람들, 그런 언론 종사자, 기자들은 좀 그 때의 기억 때문에 다르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게 이제 매뉴얼로 돼서 어떤 언론사 조직의 시스템이 돼서 내려오지 않는 한 전승이 되고 교육이 되고 실천이 되지 않는 한은 똑같은 식으로 보도할 수 밖에 없는 지금의 언론 구조고 환경이다.
 
속보 경쟁에 매몰되어있고, 당장 시청률과 조회수, 그런 것들에 매몰돼 있는 환경이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런 경험을 했던 우리들, 그리고 그런 이런 비난을 받고 기레기라는 취급을 받고 했었던, 지금 세월호 참사를 취재했고, 보도를 했던 (언론)종사자들이 얼마 전에는 이제 방송기자연합회에서 주최한, 세월호 보도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방안들을 마련해야 한다는 어떤 지침 같은 것도 만들긴 했는데요. 그런 것들을 방송사에서 실천해야 된다는 토론회를 열기도 했는데, 그런 것들이 이제 1년이 지났으니까 이제 지난 것 아니냐 라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할 정도로 좀 구체적인 실천 방향들을 만들어야 된다. 그런 생각들이 조금 듭니다.
 
[김성준]
많이 변해야 돼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많이 배웠고 많이 변했습니다. 제가 지금 뭐 저 혼자 변했다고 자랑을 하려는 게 아니라…
 
잠깐 에피소드를 하나 말씀 드리면, 94년에 성수대교 붕괴했을 때 제가 서울지검을 출입하고 있었는데 전 보도국이 동원되어서 성수대교 속보를 하니까 저는 그때 성수대교 붕괴해서, 많은 학생이 희생됐던 강북에 있는 무학여고 취재를 가서 그 학생들의 반응을 따오는 게 제 리포트의 주제였어요.
 
선배들이 ‘야, 그런 리포트는 정말 눈물 쭉 빠지는 인터뷰 하나 잘 따오는 게 제일 중요하다’라고, ‘네 리포트가 오늘 뉴스의 포인트.’라고. 그런 얘기를 하길래…
 
3년 차 사건기자가 사회부 기자가, 한 번 잘해보겠다는 일념에 아이들 엉엉 울고 있고, 빈자리에 꽃다발 놓여있고, 정말 우왕좌왕 하고 있는 더군다나 여학교에 카메라 기자와 함께 성큼성큼 들어가서 애들이 당황하는 것도 무시하고 교실 안에 들어가서 옆 짝이 희생돼서 꽃이 놓여있는 어린 여학생 옆에 다가가서 어떻게 인터뷰를 해야 할지 고민한 끝에 낸 질문이…
 
“만약에 네 짝이 다시 살아서 돌아온다면 그 애한테 무슨 말을 해주고 싶니?”
 
이렇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이 아이가 뭐 펑펑 울면서…
 
“난 네 두 눈이 아름답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 동안 그런 생각을 했는데 한 번도 말을 해주지 못했어요.”
 
이러는 거예요. 솔직히 말씀 드려서 그때 ‘야, 이건 빙고다, 정말 인터뷰 하나는 잘 땄다.’ 하고서 회사로 쌩 하고 돌아와서 리포트 마지막 문장에 그 인터뷰를 붙이고 리포트를 마감을 했는데 선배들이 다들 ‘좋았어, 잘했어.’ 하는 얘기 들으면서 뿌듯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다른 재난 상황도 취재를 하고 그랬지만 2014년 4월 16일을 겪기 전까지 과연 제 기자로서의 마인드가 94년의 마인드에서 얼마나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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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질문은 누구라도 하고 싶지 않았을까…'

[양두원 / SBS 영상취재기자]
구조되는 세월호 여학생에게 모 방송사 기자가 ‘친구 사망소식 혹시 들으셨냐?’라고. 사실 그거에 대해서 비난이 많이 일었었는데, 솔직히 제 생각에는 그 질문은 누구라도 하고 싶지 않았을까…
 
[김성준]
하고싶죠. 당연히 하고 싶죠.
 
[양두원]
그러고 나서 그 반응을 끌어내서 뭔가 울린다고 하기까지는 아니겠지만, 뭔가 그 반응을 캐치하고 싶은 욕망들이 다들 있었을 거예요.
 
[김성준]
그러니까 말이죠. 그래서 사실은 제가 94년에 갖고 있었던 주니어 사회부 기자로서의 그 욕망, 지금 양두원 기자가 얘기한 그 욕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거를 사실 20년만에 깨달았다는 거죠.
 
[류란 / SBS 기자 – 세월호 참사 당시 목포해경 취재 담당]
그런 유혹은 글을 쓰기보다는 영상으로 이야기하는 매체, 방송기자들이 더 쉽게 더 강력하게 빠지게 되는 유혹인 것 같아요.
 
저희가 텍스트로 한 장 두 장 묘사하고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 안에 지금 현장에서 내 눈으로 봤던 이런 것들을 그대로 전달하고 싶은, 오히려 조금 더 과장해서 전달하고 싶은 그런 욕구는 사건기자로서는 정말 늘  느끼는 부분인데…
 
저는 우리 기자들 마인드가 바뀌어야 한다는 당위도 있지만, 소비자인 시청자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번에 배웠어요. 시청자들은 오히려 사려 깊게 접근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보여드릴 수 있지만, 이 부분은 저희가 방송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오히려 이런 접근이 시청자 분들이 이런 큰 아픔을 맞이했을 때 방송사들한테 기대하는 바이구나 라는 것을 저는 학습한 것 같아요.
 
[조을선 / SBS 기자 – 세월호 참사 당시 희생자 가족 취재 담당]
팽목항으로 돌아갔을 때, 그때 참 이 상황에 대해서 이런 상황도 있을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게 유족들 한 명이 있으면, 한 명이 무슨 말을 하면 기자들이 정말 이리떼처럼 몰려 들어가서 그 유족을 가운데 두고 뺑 둘러앉아서, 막 촬영을 해요.
 
그런데 그 당시 상황에서 그 유족은 하고 싶은 말도 없고, 특별하게 요구를 한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카메라 기자 취재기자 할 것 없이 그래서 밖에서 보면 뭐 정말 큰 원형의 어떤 사람 떼만 있는 그런 광경을 보면서 하지만 그 안에서 어떤 소통이 있겠는가. 아무런 소통도 없었거든요. 그런 시간이 꽤 오래갔어요. 팽목항에서. 기자들끼리 우르르 몰려가서 촬영을 하고…
 
제가 한 몇 개월 만에 여름이었나요, 여름에 갔을 때 보니까 약간의 변화가 있었어요. 카메라 기자들이 각자 자기의 위치가 있었고, 그 위치에서 움직이지 않기로 하나의 합의를 했더라고요. 그래서 멀리서 촬영을 하더라도 유족들에게 상처나 피해가 되지 않도록 하자. 그런 것들이 있었는데 이번에 그렇게 몸으로 부딪히면서 조금씩 조금씩 깨우쳤던 것 같아요.
 
나 스스로 노력해야 하는 부분도 있지만 기자 사회 안에서 이런 부분에 대한 합의가 분명히 있어야 되고, 이런 큰 사건을 다시 또 마주치기 어려울 텐데, 이번 기회에 그런 부분들을 좀 명확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게 없으면 어느 한 언론사에서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다 같이 덤벼들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언론사의 현실이거든요.
 
[김성준]
그게 사실 조금 아까 심영구 기자가 얘기한 앞으로 우리가 진짜 변할 수 있을지 유감스럽다라는 얘기의 이유이기도 하죠.
 
[조을선]
네 그래서 뭐 싱크(음성) 따와. 위에서 선배들께서는 쉽게 얘기하는 경우들도 사실은 있었어요. 우리 언론사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부분들에서 현장에 있는 기자들은 상처를 받고 또 그 질문을 받은 유족들은, 피해자들은 또 한 번 다시 상처를 받고 기자의 트라우마와 유족의 트라우마가 섞여서 이 트라우마가 커지는 이런 상황들을 계속 목격을 했죠. 우리 안에서의 이런 합의라는 것이 꼭 있으면 좋겠다 라는 내 후배를 어떻게 보면 보호하는 길이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길이겠다.
 
[김성준]
영상 취재 분야에서도 세월호를 겪으면서 좀 어떻게 변화를 해야 되겠다라는 그런 것들을 모색한 게 있죠?
 
[양두원]
그 이번 경우 같은 경우에는 가장 그 취재 경쟁, 그 경쟁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도 차마 부끄러울 정도로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정말 그 양아치 짓이죠.
 
정말 그 극도의 비탄에 젖어있는 분들한테 몰려가가지고 그렇게 카메라 들이대고, 남들이 잡지 못하는 그림, 잡지 못하는 코멘트 하나 따려고 하는 그것 자체가 정말 지금 생각하면 뭐…
 
그런데 많이 변하긴 했어요. 이번에 뭐 원래는 사실 매뉴얼이 없어서 못 하지는 않았거든요. 포토라인이라던가 아니면 재난보도 준칙에 대해서 매뉴얼은 분명히 있었는데 이 정도 큰 사건이 터지니까 그거에 대해서 매뉴얼이라던가 교육이라던가 이런 거를 할 정신적인 시간적인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다 현장에 투입됐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저희만 해도 가기 전에 어떤 매뉴얼이라던가 준칙에 대해서 공지 받은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야 빨리 내려가.’ 이렇게 해서 거의 모든 언론사들이 그랬을 거예요. 외신 이번에 보면 CNN 같은 것들은 오면서 며칠 동안 교육을 받았더라고요. 이런 거는 하지 말아라. 이런 거에 대해서. 걔네는 어떤 매뉴얼이 어떤 문서로 된 매뉴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어떤 교육의 형태로 그런 걸 다 받고 왔더라고요. 그런 부분이 되게 인상적이었고.
 
[김성준]
자 이제 우리가 세월호 이후 일 년 동안의 과연 달라진 건 뭔지 나아진 건 뭔지 부족한 건 뭔지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마는 먼저 언론의 변화에 대해서 지금까지 얘기가 됐고요.
 
이제는 그러면은 정부의 정치권이 과연 아까 심영구 기자가 얘기한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 사후조치를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 왔는지 또 모자란 건 뭔지 더 나아가야 될 부분들은 어떤 건지에 대해서 정리를 한 번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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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심영구 기자가 우리가 세월호 터지고 나서 가장 가시적인 변화라고 하면은 정부조직이 개편됐잖아요?
 
[심영구]
정부조직이 개편돼서 행정안전부가 안전 부분이 떨어져 나가서 국민안전처가 됐고요. 인사 기능도 빠져서 인사혁신처가 됐고, 그렇고 해경이 수사권을 경찰 쪽으로 넘겨주고 국민안전처 밑으로 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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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게 사실은 뭐, 안전을 전담하는 조직이 생긴 것 자체는 괜찮은데, 약간 공무원들한테는 크게 의미 있는 변화인데 국민들한테 얼마나 의미 있는 변화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다음에 세월호 진상 규명이나 그런 부분을 위해서는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이 됐는데… 이 부분 이제 제정될 때까지만 해도 뭐 그럭저럭 갔는데 정치권에서 진영 논리가 그 다음부터 강하게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그 때 제정했던 취지와 이후의 진행되는 부분들을 보면 많이 의미가 퇴색하고 희석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좀 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특별법 타결
[김성준]
자 그러면 조을선 기자는 지금 세월호 특별법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마는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도 일단 뭐 시한도 못 지켰고, 논란도 많고 진영 논리를 중심으로 한 싸움도 많았었잖아요, 그게 어떻게 정리가 됐고 그 이후에 시행령이 또 입법예고가 됐는데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정리해주시죠.
 
[조을선]
네, 일단은 이 가족들은 진상조사를 정확히 하고 처벌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세월호 특별법이 필요하다 라고 주장을 했고 결국에 세월호가 타결된 것은 10월 31일 여야가 세월호 3법이라고 해서 세월호 특별법과 정부조직법 범죄수익은닉규제처벌법 이렇게 타결을 했어요.
 
그런데 그 가운데 두 차례 정도 이 타결안이 번복되는 그런 일들이 있었고 그때 당시의 정치권에 대한 유족들의 실망감은 물론이고 국민들의 실망도 컸습니다.
 
이게 하나의 어떤 정치적인 전쟁이 되면서 사실 일찌감치 해결이 됐었어야 하는 세월호 참사의 문제가 여야의 싸움으로 국회와 대통령의 갈등으로 이렇게 비치는 과정들이 있었고요. 이 우여곡절 끝에 6개월 정도 만에 타결된 이후에 한 달 뒤 이제 11월 달에 세월호 3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수색작업도 공식적으로 종료가 되는데요.
▶ 참사 205일 만에…'세월호 3법' 국회 본회의 통과

그런데 이 이후에 문제가 발단이 된 것은, 정부에서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을 발표를 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유족들은 받아드릴 수 없는 상황이다라고 강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 조사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스스로를 조사한다?

[김성준]
시행령 안이 입법 예고가 된 건데 최근이죠? 어떤 내용들이 유족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인 건지…
 
[조을선]
네, 일단 지금 이 진상조사를 하기 위해서는 세월호 특별 조사 위원회라는 것이 있어야 하고 이곳에서 독립적으로 그 동안의 문제점에 대해서 그리고 책임에 대해서 조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데… 실질적으로 이 특별조사위원회에 어떤 그 역할을 (시행령이) 훼손한다. 독립성을 훼손한다 라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보면 시행령 입법예고 안에서 소위원회, 그러니까, 진상규명, 안전사회, 피해자지원이라는 진상조사위원회 소위원회가 있는데 이 소위원회를  관할하는 사람은 모두 (정부에서) 파견(나온) 공무원이 맡아서 운영하도록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족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상 우리가 조사해야 하는 공무원, 당시 해수부 이런 관계자들이 위원회에 와서 활동을 한다고 하면…
 
[김성준]
조사를 받아야 될 사람들이 조사를 하는 꼴이 될 수가 있다?
 
[조을선]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조사를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독립성이 이 원칙이라는 것을 훼손하게 된다. 라는 것이 일단 가장 첫 번째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제대로 조사하기는 어려운 것이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고요.
 
뭐 그 외에도 인원을 30명 가량 이렇게 줄이고 예산을 줄이는 이런 부분들이 있었고…
 
조사 내용 자체도 사실 문제가 되고 있는데 기존에 원래 특조위에서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제시했던 것은 진상규명과제, 참사 원인을 진상규명과제로 제시를 했습니다.
 
(유족 측인) 우리가 그 동안 이야기했던 것대로 무엇이 문제였는지 본질적으로 들어가 보자 라는 것이었는데 이 내용을 아예 참사 원인 규명이 아니라 참사 원인 규명에 관한 정부조사 결과에 대한 분석과 조사로 축소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부가 발표한 자료만 가지고 조사를 하란 것인 거죠.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따로 규명할 대상 자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김성준]
애초에 유족들이 기대했던 것은 정말 세월호가 왜 가라앉았고 그 희생자들이 왜 구조를 못 했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참사 원인 규명을 원했던 건데 지금 이 특별위원회에서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시행령 안에 따르면은 정부가 발표한 세월호 참사의 원인, 그 원인 발표가 맞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그 정도의 조사에만 그칠 수 있다. 그칠 수밖에 없다. 이런 얘기인가요?
 
[심영구]
이거와 관련해서 ‘꼬리가 몸통을 흔드나 몸통이 꼬리를 흔드나’ 라는 카피를 뽑았던 어느 기사가 있었는데요.
 
특별법이 시행령이라는 게, 특별법의 내용을 하위적인 내용을 세부적으로 규정하는 건데, 즉 시행을 위한 대통령령인데…
 
그런데 이게 거꾸로 특별법의 내용을 침해하고 권한을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지금 정부의 안을 만들어졌다는 게 핵심적인 주장 같아요. 이석태 위원장 같은 경우도 그런 얘기를 하셨는데 ‘이 특별법 시행령 안은 특별조사위에 권한과 임무를. 임무와 기능을 마비시키고 무력화시키고 행정부의, 해수부 같은 곳의 하부조직으로 전락시킬 우려가 있다.’ 이렇게까지 얘기를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고요.
 
이 부분들이 사실은 맥락상으로 볼 때 새누리당 어느 의원은 처음의 냈던 특위의 시행령 안을 놓고서 세금 도둑이다 도둑놈 심보다 라는 식으로 얘기까지 한 적이 있는데 이런 식으로 좀 물타기를 하면서 희석시키는 부분들이 분명히 반영이 된 게 아닌가. 그럼 이런 걸 보면서 유족들은 ‘정부가 진상규명을 할 의지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는 그런 상황이 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을선]
그래서 유족들은 거의 일 년이 다 돼가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광화문 거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이 416시간의 농성에 돌입한다. 라고 해서 지금도 광화문에 가면 유족들을 만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심지어는 머리를 깎고 삭발을 하면서 그런 투쟁까지도 하게 된 갈등의 상황에 놓여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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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돈 받기 위해 싸운 게 아닙니다."

[김성준]
지금 시행령안과 관련해서 유족들을 위한 위자료 액수도 확정이 됐던데요. 1억 원이라고 그러던가요 1인당? 그런데 유족들이 그것에 대해서도 반대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유족들은 왜 반대를 하는 건가요?
▶ 세월호 희생자 배상금 기준 확정…유족들 반발

[조을선]
배보상 문제 말씀하시는 거죠? 일단은 가족들이 가장 억울해하는 부분은 뭐냐고 하면 그 동안 지금까지 1년 동안 싸웠던 것이 마치 돈을 위해서인 것처럼 비춰지는 것에 대해서 분노를 하고 있습니다.
 
당시 시행령을 요구할 때, 시행령의 철회를 요구할 때 정부에서 내놓은 것이 그런 배보상 관련 내용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유족들 입장에서는 ‘돈 먹고 조용히 해라.’ 이런 식으로 받아드리는 유족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예를 들어서 교통사고가 나면 교통사고 왜 났는지, 음주 때문인지, 졸음운전 때문인지 신호위반인지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확인을 하고 이후에 그러면 누가 잘못했는지에 대해 따져본 후에 거기에 대해서 보상절차가 들어가는 게 맞는데…
 
이것은 아직 진상조사나 이런 분들에 대해서 아직 시작도 못 한 상태에서 일단 돈을 줌으로써 더 이상 문제제기 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런 지금 구조에 놓이게 된 것이죠.
 
[김성준]
약간 분위기도 누그러트리고 좀 심하게 얘기하자면 입막음을 하자는 그런 의도가 느껴진다는 게 유족들 생각인 모양이죠?
 
[조을선]
네, 그렇죠. 그리고 실질적으로 서명을 하도록 했습니다. ‘보상액을 받을 경우에는 더 이상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도록 한다.’ 라는 서명을 하도록 했고 뭐 이제 정부에서는 통상적인 절차다 라고 하지만 이걸 섣불리, 선거를 특히 앞두고 1주기를 맞아서 국민적 비판이 높아질 수 있는 시점에 이것을 먼저 제안함으로써 유족 입장에서는 더욱 분통이 터지는 거죠.
 
[김성준]
지금 보니까 배보상액, 한 사람이 1억 씩 받을 수 있는 배보상액도 9월 28일까지만 배상 신청을 받고 또 배상금을 받게 되면은 향후에 소송을 포함한 여러 가지 문제제기 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한다. 이런 조항도 들어있는 모양이에요?
 
[류란]
그거와 관련해가지고 해수부가 설명회를 가졌는데요.
 
간단하게 입장을 말하면 해수부는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진상 조사를 함으로써 발견되는 추가적인 사실과 상관없이 ‘이 액수는 확정적이다.’ 라는 입장이고요.
 
유족입장에서는 아직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는데 9월 28일까지만 신청을 받고 이후에 진상조사 결과 국가의 과실이 더 밝혀지거나 국가 책임이 더 나온다면 그 액수나 그 방식에 대해서 좀 더 다시 이야기할 여지를 남기면서 신청을 받아야 되는 건데 지금 해수부가 제안한 방식은 그게 아니거든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충돌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성준]
그리고 유족들이 헌법소원도 최근에 냈다고 그러던데요?
 
[조을선]
네, 그렇습니다. 유족들은 구조 실패로 피해를 키운 국가를 상대로 해서 헌법소원까지 제기를 했습니다. 유족 73명은 지난 5일에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기본권을 보호할 헌법상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점을 확인해 달라, 하면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는데요, 당시 이 헌법소원을 제기했던 한 변호사는 실질적으로 이것이 헌법을 위반하는지 여부를 떠나서 유족들의 절실한 상황들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싶고 상징적으로 그에 대한 답변을 듣고 싶다는 그런 말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김성준]
네, 알겠습니다. 자 마지막으로 한가지 이슈가 더 남아있어요.
 
지금 세월호를 과연 인양하느냐의 문제, 일단 대통령도 인양을 하는 쪽으로 언급을 했기 때문에 유족들의 또는 실종자들의 희망대로 했기 때문에 일단 인양을 하는 거로 상황은 정리가 돼가는 분위기입니다마는, 사실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잖아요?
▶ "기술적 불확실성 있지만 세월호 인양이 바람직"
▶ "인양 중 반토막 가능성 희박하지만"…2차사고 우려도
▶ "대형선박 통째 인양 전례 없어"…해외 각국 사례는

[류란]
네, 해수부가 최근에 그 인양 관련해가지고 기간이나 액수에 대한 설명을 했는데 쉽게 설명해 드리면 일 년 정도 걸릴 것이다. 액수는 천억 원 정도 들 거고 방식은 줄을 세월호에 걸어서 바닥에서 한 3m 정도, 어느 정도 들어 올려서 그 밑에 플로팅 독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걸 깔아서 얕은 뭍으로 가지고 나와서 뭐 끈다는 상황인데, 저도 자세한 기술적인 부분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간에 가능하다는 거죠, 인양이 가능하고 할 수 있다는 기술적인 것들을 발표한 건데 …
 
그 인양 관련해서 사실 예민한 부분이 있어요. 실종자 가족들은 시신을 찾아야겠다는 좀 더 강력한 동기가 있는 셈이고, 유족 같은 경우에는 인양에 있어서 진상규명 쪽으로 포인트를 맞춰서 이해를 하면 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배가 가라앉는 과정이라든지 이게 결국 책임자 처벌이나 이외의 진상 규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거라고 믿는 거고요.
 
그런데 다만 이제 유족들이 지금도 도보 행진 같은 걸 하면서 인양을 국가가 조금 더 확정적으로 약속해달라고 말하는 배경에는 이 액수나 이 1년이라는 시간이 국민들이 받아들이기에는, 굳이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거든요. 이런 부분에 있어서 조금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난 1년간 논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김성준]
조을선 기자가 유족들의 인양에 관한 관점 한번 간단하게 소개를 해주시죠.
 
[조을선]
유족들은 인양에 대해서 단순히 세월호를 인양한다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게 우리 사회의 안전이라는 가치를 건져 올리는 것이다. 유산과 교훈을 건져 올리는 것이다, 라고 믿고 있는 것이고요. 그것이 진행될 때 비로소 ‘정부가 최소한의 할 일을 했다.’ 라고 받아드릴 수 있는 상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부 유족 같은 경우에는 세월호를 인양해서 장소가 어디가 되었든, 그것을 상징적으로 후대에도 볼 수 있도록 남겨두는 것이 우리 사회가 늘 참 쉽게 잊고 쉽게 뒤돌아서는 그런 냄비근성도 사실은 있는데 정말 두고두고 기억하자,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자, 그렇게라도 쓰여졌으면 좋겠다. 이것은 피의 유산이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김성준]
자 이제 우리가 세월호 그날, 그리고 그 뒤 일 년 동안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고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에 대해 쭉 얘기를 나눠봤는데요, 아마도 여러분들 뭐 현장에 단 하루밖에 안 가봤던 저와는 달리 여러분들이 훨씬 더 하고 싶은 얘기들이 많았을 거고, 지금 뭐 한 시간 남짓 진행하는 동안 아직 하지 못한 것들도 많았을 텐데 제가 무슨 질문은 안 던지고 자유롭게 여러분들에게 소회를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릴 테니까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가면서 연조가 제일 높은 심영구 기자가 마지막으로 얘기를 하는 식으로 한번 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류란]
연조가 낮은 편인 제가 시작을…
 
지금도 세월호 관련해서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열흘 밤·낮도 셀 수 있을 것 같아요. 너무 많은 일을 겪었고, 그게 제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정말 큰 것 같고…
 
이 생각이 저만의 것이 아니라고 느낀 게, 제가 지금 곧 방영 예정인 세월호를 취재했던 기자들에 대한 리포트를 준비 중인데, 제 선후배 기자들의 인터뷰를 하고 있어요, 기자 동료들의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 다들 말을 잘 못 꺼내요. 지금 이 세월호 취재했던 기자들 가운데 현재까지도 트라우마 치료를 받고 있는 기자도 몇 명 있고요, 지금 이야기를 꺼냈을 때 다들 마음 한 구석에 뭐가 좀 끄집어내기 힘든 상처나 트라우마가 있는데…
 
저 개인적으로는 그 많은 에피소드 중에서 하나 기억이 나는 게, 그 4월 16일 당일 회사로 들어와서 제가 제일 먼저 했던 게 그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어요'를 소방에 최초 신고했던 단원고 학생의 번호를 제가 알게 돼서, 이를테면 그때 까지만 해도 사망자가 이렇게 많이 나올 줄 모르고 있던 차였기 때문에 그 친구한테 미친 듯이 전화를 했어요. 한 말이라도 들어보려고.
▶ '최초신고' 학생 父 "집에도 전화 못했는데…"
▶ 세월호 참사…'174명 살린' 최초 신고자는 단원고 학생

‘어떤 상황이에요, 지금 어디 있어요? 왜 배가 가라앉았던 것 같아요?’ 이런 걸 물어보려고. 전화연결이 안 되는데 제가 그 통화 목록을 보니까 4월 17일 오전까지도 그 친구한테 계속 전화를 하고 있었더라고요.
 
저는 그 친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 거라고 상상을, 4월 17일 아침까지도 못하고 있었어요. 그 친구가 나중에 이제 최덕화 군이라고 최초 신고자였던 친구고, 제가 알기로는 의사자로 지정이 된 거로 알고 있는데 그 4월 17일 아침까지도 통화목록에 남와 있는 그 친구의 번호가 지금도 소름이 돋습니다.
 
제가 전화했을 때 그 핸드폰은 물에 가라앉아 있었고, 그 친구 손에 들려있었을 텐데, 저는 그 친구가 어딘가 뭍에 나와서 체육관이든 어디든 해서 구조가 돼서 옷을 말리고 있을 거라고 상상하고 있었거든요.
 
이 참사가 이렇게까지 대형으로 번질 것이라고 예상 못 했던 제가 무지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때 그런 상황 파악이 저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이 이렇게까지 가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세월호_640
● 우리는 과연 바뀔 것인가?

[김성준]
양두원 기자.
 
[양두원]
자꾸 어떤 현장에서 제일 눈에 띄는 건, 이 큰 ENG 카메라가 눈에 많이 띄잖아요. 사실 취재 기자 분들은 옷을 안 입으면 어느 방송사인지 모르거든요. 그런데 그 현장에서 예를 들어서 이제는 종편까지 있어서 열 몇 대씩 이렇게 있으면 '저거, 저거' '저놈들' 욕먹기에는 딱 좋단 말이죠. 그래서 이게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아까 심영구 기자도 그랬지만, 거기에 있었던 사람은 그걸 좀 더 느끼고 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또 그게 잘 그 다음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을 것인지에 거기에 대해서는 저도 되게 회의적이거든요.
 
얼마 전에 청와대 문건 사건 때문에 자살했던 최 모 경위 그때도 저희가 유족에게 갔었는데. 그게 작년 12월이죠. 그때도 똑같았어요. 사실은.
 
갔는데 유족들은 사실 피해자라면 피해자잖아요. 자기 가족이 죽었으니까. 그런데 그 혹시나 유서를 공개를 안 했으니까 유서에 뭐라도 한 마디 적혀있을까 싶어가지고 거기 다 달라붙은 거에요. 거의 수습 아니면 1, 2년차 주니어 기자들이 달라붙어가지고 유족들을 쪼는 거예요.
 
화장실 갈 때도 같이 따라가고, 밥 먹으러 갈 때 따라가고, 그러면 한 번 이렇게 오면 그때 또 뭐 카메라 한 대여섯 대씩 우르르 와서 '한 마디만, 한 만디만, 한 마디만… ' 이렇게 막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빈소에서 제발 좀 유족들이 나가달라고 얘기를 했는데 유서에 무슨 말을 했는지 한마디만 해달라 그럼 우리가 깨끗하게 물러나겠다고, 일종의 딜을 하고 있는 거죠. 그거를 보고, 참 아직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다시 얼마 전에 세월호 보도에 관련해서 다시 메뉴얼을 다시 내기도 하고, 자성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는데, 그런 것들이 제대로 전파가 안되면 사실 소용이 없는 것 이거든요, 저희들끼리 그냥 위안 삼는 거죠.
 
[김성준]
매뉴얼을 만들어서 책꽂이에 꽂아놓기만 하면, 장식 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죠.
 
[양두원]

그리고 또 뭐 예를 들어서 뉴스 포맷 같은 것도 분명히 말을 한 번 해야 하는데 우린 뉴스가 되게 보면 되게 짧고 여러 꼭지로 나눠져 있잖아요, 심지어 그 쓰나미 때 보면 NHK하고 KBS하고 비교를 해보면 KBS가 꼭지 수가 더 많아요.
 
[김성준]
네 일본 대지진 때 얘기죠. 일본의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더 꼭지 수가 많았다?
 
[양두원]
그게 왜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일본은 앵커와 기자, 앵커와 전문가의 대담에서 직접 바로 또 현장으로 넘어가고 이런 식으로 뉴스포맷이 좀 다르니까 그런 거도 있긴 한데, 기본적으로 한국 뉴스는 묘사를 많이 하고 싶어 해요.
 
지금 이런 상황입니다, 누가 이렇게 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되게 많이 묘사를 하고 싶어 하고, 스토리를 또 원해요. 꼭 보면, 사연. 눈물 쏙 빼는 사연들이 그런 것들을 원해요.
 
그러다 보니까 조금 더 가까이 가고 싶어 하고 또 어떤 상황을 놓치고 싶지 않아 하고, 그러니까 약간 무리 해서라도 그런 것들을 얻어내려고 하기 때문에 이 사단이 다 난 거거든요. 누구나 다 그런. 그러니 나열식으로 하지 말라는 것은 언제나 듣는단 말이죠.
 
그런데 당시에 되게 반향을 일으켰던 외신뉴스가 하나 있었는데, CNN의 경라 라는 라경씨죠, 한국계인 라경씨가 했던 리포트가 되게 반향을 일으켰는데, 거기는 보면 울부짖는 과정이나 그런 것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서 시신이 나올 때 시신의 모습을 쭉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시신 나가는 길의 포토라인을 잡고 있는 경찰의 표정, 발, 줄 잡고 있는 손 그런 이미지들을 통해서 품격 있게 전달을 했다라는 평을 받았어요, 그래서 인터넷에서는 야, 한국 방송들 보라고…
 
[김성준]
저도 그 동영상 봤는데 참 인상적이더라고요.
 
[양두원]
그런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우리 방송사들은 거의 비슷한 형식의 싱크의 비슷한 상황들에 매몰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거에 대해서 어떤 반성이나 자성을 할 계기들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이런 식의 1년이 지나면서 그런 것을 돌아봤을 때, 단순히 매뉴얼이나 그런 문제가 아니라 서로 이런 것들에 대해서 공유가 충분히 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그런 공유 될 수 있는 기회들이 많이 없다라는 게 그렇게 되면 결국은 또 이런 큰 재난이 터졌을 때는 비슷한 일들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김성준]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조을선 기자가 얘기해주시죠.
 
[조을선]
저는 이번 참사를 보면서 그래서 무엇이 바뀌었고, 그래서 우리가 얻은 교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이 들었어요.
 
유족들 얘기를 들으면 대한민국은 없다, 국민들을 위한 대한민국은 없었다. 이런 얘기들을 많이 하셨어요. 그리고 실제로 이번 참사가 마무리되면 이민을 가고 싶다 이런 분들이 많이 있었고, 뭐 더 견디지 못한 분들은 사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살시도를 하신 분들이 많이 있었고, 그러니까 이유가 뭘까?
 
책임의 정치라는 부분이 참 아쉽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이 문제가 사실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사고인데, 이 사고가 이렇게까지 일 년 가까이 오게 된 것은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 그 과정에서 유족들은 그러니까 피해자들은 하나의 이익 단체화되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희가 보도하는데 있어서도 유족들은 이런 것들을 원한다, 하지만 정부는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식의 보도들이 많았고, 그러면서 우리 사회 안에서 세월호 유족들을 보는 시선도 두 갈래로 나뉘어졌던 것이고. 그러면서 예를 들어서 세월호 유족들이 단식 투쟁을 할 때 옆에서 폭식 투쟁을 한다든지 이런 식의 정말 사회가 양분화되는 모습까지도 나타났는데…
 
타이타닉 영화 다들 보셨겠지만. 타이타닉호가 침몰했을 때 다음 해에 소득세(법안)가 입법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제 일등석이 있던 사람들이 먼저 구조가 되면서 사회적으로 이런 부분에 대해서 분명 우리가 변화해야 한다 라고 해서 개인 소득세가 신설됐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이냐… 하나의 유족들을 이익 단체화 하고 정부의 어떤 대립 세력으로 보고 그 안에서 타협해서 일정 정도의 합의를 이루면 되는 그냥 그런 사안으로 끝나는 것인가 그런 부분이 사실은 가장 많이 우려가 됐고 걱정이 되는 상황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이고, 유산을 얻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그 부분은 더 고민을 해야 될 것 같다라는 생각입니다.
 
● '벚꽃엔딩'이 다르게 들리는 이유

[김성준]
알겠습니다. 자 심영구 기자.
 
[심영구]
제 주변이나 이렇게 뭐 쭉 보면은 세월호 참사에 대해 일 년 정도 지나면서 반응이 세 가지 정도로 갈리는 것 같아요.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분들도 있고, 불편하다 저런 것 이해는 가지만 계속 이렇게 다루고 하는 거 불편하다. 힘들다 그런 사람들이 있고, 이제는 지겹다. 그만 좀 해라 세 가지 정도인 것 같은데.
 
다 공통적으로 ‘잊지 않겠습니다.’ 하는 분들은 조금 다른 것 같긴 한데…
 
공통적으로 깔려 있는 게 불편하다, 지겹다라는 게 공통적으로 깔려있는 게 무력감 같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해서 잊지 않겠다 그러고 뭘 바꾸겠다. 그러고 뭐 한다고 해서 뭐가 바뀌나? 진상규명이 되게 있나, 안전이란 게 강화된 것이 있나, 누가 책임을 지긴 했나, 결국 유족들 저러고 있다가 나중에 지쳐서 나가떨어져 나가고 그러고 끝나는 거 아니냐.
 
이 사회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니냐?
 
이런 식의 무력감이 내제되어있는 게 아닌가 하는데 저 자신도 사실 왜 그런지 모르게 4월이 가까워지면서, 술도 그렇게 당기고 일도 하기 싫고 뭐도 쓰기 싫고 그래서 되게 무기력하게 4월을 좀 보내고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도. 내가 1년 전 지금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언론이 기레기 소리를 들으면서 저도 큰 충격을 받으면서 트라우마가 계속 남아있는 상황인데… 나는 뭘 했나.
 
내가 그 동안 나와 조직과 내 동료들이 한 것들이 뭐를 바꿨나 나는 노력이라도 했나, 제대로 했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그런 무력감에 빠져있었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런 걸 어떻게든 조금씩 바꿔가야… 되게 진부한 얘기기는 한데, 식상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조금씩 바꿔가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또 하게 되요. 그거 말고는 답이 없는 것 같고.
 
항상 4월이 되면 최근 몇 년 동안에 다시 리바이벌처럼 해서 히트하는 ‘벚꽃엔딩’이라는 노래가 있잖아요? 되게 제가 좋아하는 노래고 노래방에서 많이 불렀던 노래인데… 이게 이번 4월에는 그 앞에 그대여, 그대여. 하고 시작하는 부분이 저는 좀 달리 들리는 거예요. 이를 테면은 김소월 시인의 ‘초혼’.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저는 약간 그런 느낌이 들면서 이 4월의 그대여 그대여 하는 게 가족들이 내 자식들, 희생자들을 부르는 거 하고 너무 겹쳐서 들려가지고 잘 듣지를 못 했는데… 그런 제 앞서 말씀 드렸던 무력감 부분하고도 맞닿아 있는 것 같고…
 
세월호_640
그래도 유족들은 광화문에서 계속 농성을 하시고 또 정부 앞에서 하시고 그렇게 하시는 모습들을 보면서 뭐 이게 다 사회를 안전하게 만들어가겠다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라고 희망을 갖고, 저도 좀 무력감에서 탈피해야겠다. 조금씩 노력을 해야겠다 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김성준]
물론입니다. 자 뭐 한 바퀴 돌면서 얘기했기 때문에 저도 한마디 하고 넘어갈까 싶어요.
 
아까 제가 얘기했던 1994년 성수대교 붕괴 때 정말 눈물 쏙 빠지는 리포트를 해야 된다는 일념만 갖고 당사자였던 짝을 잃은 여학생한테 어떻게 보면 잔인한, 인터뷰를 강요했던 제가, 그 뒤 한 10년 남짓 흘러서 워싱턴 특파원으로 있을 때 2005년에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덮쳐서 그 아름다운 재즈의 도시가 죽음의 도시가 된 적이 있었잖아요?
 
저는 원래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서 취재 현장 갈 때마다 늘 사진을 많이 찍곤 했었는데, 그때 첫날 도착해서 보니까, 아마 미국 기자들이었었던 것 같은데, 미국 기자들이 그 참사의 현장을 배경으로 해서 히히덕거리면서 웃으면서 사진을 찍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갑자기 제 언론인으로서 윤리의식이 발동을 해서 저런 나쁜 놈들이 있나, 생각을 하고 저는 카트리나 취재 2주일 동안 현장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 동안 사진을 한 장도 찍지 않았어요.
 
저는 그게 윤리적으로 맞지 않다고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사진을 찍지 않았는데, 또 다시 십 년이 흘러서 2014년 5월 15일이죠. 세월호 침몰 한 달 된 날, 우리가 8시 뉴스를 현장에서 진행하지 않았습니까? 팽목항에서.
 
그래서 그때 현장 진행을 위해서 내려가서 취재기자들이 묵는 여관방에서 앵커 멘트를 쓰고 있다가 아주 우연히 창밖을 바라봤는데 때가 낀 창문 밖으로 바다가 보이고 작은 섬들이 보이고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그 분위기가 갑자기 울컥 슬픈 느낌이 들면서 마음속에서 ‘넌 이 사진을 무조건 찍어야 돼. 찍어. 찍어. 찍어.’ 이런 그 어떤 명령이 들리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 사진을 찰칵 찍었는데 찍고선 부랴부랴 카메라를 숨기고 찍었단 소리 아무에게도 얘기 안 하고 갖고만 있었는데 제가 사진만 찍으면 하여튼 호들갑스럽게 곧바로 SNS에 올려가지고 온갖 미사여구까지 붙여서 자랑을 하고 이런 스타일인데 이건 절대 공개를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사실은 6개월 넘게 그냥 간직만 하고 있다가 작년 12월 31일 앵커를 마치고 해가 넘어간 뒤에야 조심스럽게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공개를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그 사진 찍어 찍어 그러고 내가 그걸 프린트해서 책상 앞에 붙여놓고 6개월 동안 혼자서만 바라보게 한 그 명령이 사실은 1994년에 그런 잔인한 인터뷰를 강요했던 제가 2005년에 무슨 자격으로 사진을 찍던 미국 기자들을 비난할 수 있느냐 그리고 또 2014년이 돼서도 20년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반성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 아니냐. 그 사진을 좀 보면서 반성을 해라 라는 그런 명령 아니었던가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아직도 팽목항에서 사진 한 컷이 지금도 제 사무실 책상 앞에 붙어있는데 제가 앞으로 뉴스를 계속하는 동안은 그 사진을 보면서 나는 어떤 뉴스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늘 새롭게 다짐하는 그런 계기가 됐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뭐 여러분들은 저보다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훨씬 더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었고 스스로를 다잡는 경험들이 있었겠지만 각자 이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들 스스로도 좀 더 나은 뉴스를 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그런 노력이 또 축적이 돼서 심영구 기자 기대대로 우리 사회도 조금씩 더 나아질 수 있는, 제2의 세월호가 다시는 벌어지지 않는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될 것 같아요.
 
사실 오늘 이 세월호 특집을 준비하면서 하늘나라로 떠난 아이들이 남겼던 문자메시지 같은 것들이 있었잖아요.  그리고 또 부모님들 유가족분들이 남겼던 많은 말들, 뭐 절절한 문구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는데 그걸 다 좀 모아봤어요. 제가. 좀 어떻게 오프닝이나 클로징에 써볼까 그러고. 그런데 결국 그 문구들 여기서 소개를 하지 않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세월호라는 것 자체가 우리가 문구를 읽으면서 눈물 쏟아지고 울컥하는 그런 감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고 뭐 누구에게 분노하고 누구에게 측은함을 느끼고 이래가지고 풀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사실. 합리, 그리고 원칙 이걸로 풀어야 하는 게 세월호 문제가 아닌가 싶고 또 애초에 합리와 원칙이 깨져서 벌어진 참사기도 하고요.
 
그런데 요즘 보면 벌써 류란 기자의 취재파일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세월호 피로감도 번지고 있다. 뭐 이런 얘기들도 나오고 있고 뭐 그럴 수도 있죠. 그렇지만 사실 피로감이 느껴진다고 해서 우리가 그냥 잊을 수는 없는 일이고, 만약에 그런다면 우리가 또 언제 제2의 세월호를 맞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래서 아마 지난 1년을 갖고서는 합리와 원칙을 되찾기에는 좀 부족했던 것 같아요. 조금은 더 가야 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자 심영구 기자, 류란 기자, 조을선 기자, 양두원 기자 오늘 수고 많이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긴 시간 얘기한 것처럼 앞으로도 합리와 원칙을 만들어나가는데 계속 세월호 현장을 봤던 기자들 입장에서 노력을 해주길 바라겠습니다.
 
세월호 1주기 특집 SBS 오디오 취재파일 여기서 모두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기획 심석태, 기술 이병주, 진행의 김성준이였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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