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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작품 쓸 때마다 벌레가 된 내 모습을 봐요"

작곡가 진은숙 인터뷰

[취재파일] "작품 쓸 때마다 벌레가 된 내 모습을 봐요"
* 서울시향 상임작곡가 진은숙을 인터뷰하고 글 한 편 썼습니다. 진은숙의 호암상 수상을 계기로 인터뷰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쓴 글입니다. 평소 같으면 무슨 상 받은 걸로 쓰는 글은 재미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이 글을 쓰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고, 글 속에 이유를 밝혔습니다. 클럽 발코니 매거진 최신호에 실렸습니다. 이 글과 함께, 이 글 앞부분에 언급된 진은숙의 글은 제 블로그(http://curtaincall.tistory.com/)에도 올려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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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향 상임작곡가인 진은숙은 지난 겨울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다. 정명훈 예술감독 고액 연봉 논란과 함께 서울시향에 대한 비난이 불거지면서부터였다. 건설적인 비판은 실종된 채, 일부에서는 정명훈을 ‘세계적’이지도 않으면서 고국에서 돈만 챙겨가는 정치꾼 지휘자로, 서울시향을 ‘1퍼센트’만을 위한 단체로 몰아갔다.

“정말 위기였어요. 인생을 살면서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지만, 그렇게 큰 위기는 드물었어요.”

진은숙은 오랫동안 정성을 쏟아 발전시켜온 서울시향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걸 독일에서 보면서 무력감과 울분에 시달렸다. 곡 쓰는 일을 손에서 놓은 건 물론이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고 했다. ‘서울시향과 정명훈을 둘러싼 논란에 대한 나의 생각’이라는 제목으로 고민과 진심이 묻어나는 장문의 글을 썼던 건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남들을 위해서 쓴 글이 아니었어요. 나 자신을 위해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어요. 정리하고 나서 거리를 두자고 생각했어요. 이런 식으로라도 하지 않으면 못 살 것 같았거든요.”

그러다가 호암상 예술상 부문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금 3억 원. 국내에서 손꼽히는 큰 상이다. 상을 타는 건 항상 좋은 일이지만,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낸 뒤라서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진은숙은 이 상을 그 동안 에너지와 열정을 쏟아 부으며 해온 작업이 한국에서도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기운을 되찾았다.

호암상 수상을 계기로 진은숙을 인터뷰하고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망설이지 않고 수락했던 건  이 시점에서 이 상을 받는다는 것이 진은숙에게 어떤 의미인지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솔하고 마음에 와 닿는 ‘수상 소감’이었다. 호암재단은 ‘진은숙은 독창적인 음악성과 왕성한 활동으로 21세기 현대 클래식 음악계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어가고 있으며,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고 국내 음악계 창작 활성화와 현대음악 대중화에 기여했다’고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를 밝혔다.

진은숙의 ‘업적’은 차고 넘친다. 작곡의 노벨상이라는 그라베마이어 상을 비롯해 국제적인 작곡상을 여럿 받았고, 사이먼 래틀, 켄트 나가노, 구스타보 두다멜 같은 지휘자들이 진은숙의 작품을 즐겨 연주한다. 런던 심포니, LA필하모닉, 로열 오페라 하우스 등이 위촉한 작업들로 진은숙의 일정은 2020년까지 빼곡하게 차 있다. 서울시향은 올해 북미 투어에서 진은숙의 생황 협주곡 ‘슈’를 연주했는데, 현지 평단의 높은 관심과 호평은 진은숙의 위상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했다.

진은숙이 진두지휘하고 있는 ‘아르스 노바’는 다양한 현대음악 작품과 작곡가들을 소개하는 서울시향의 혁신적인 프로그램이다. 다른 시리즈에 비해 ‘흥행성’은 떨어질지 몰라도 의미는 작지 않다. 연주 뿐 아니라 렉처까지 곁들여 일부 곡들만 편식해 온 관객들에게 이 시대의 음악을 접할 기회를 가장 체계적으로 제공한다. 올해로 7년째, 이제는 고정 관객도 많아졌다.

아르스 노바 덕분에 서울시향은 어떤 곡들도 소화해 낼 수 있는 실력을 키웠고, 해외에서도 ‘현대음악에 강한 오케스트라’라는 평판을 얻었다. 진은숙은 또 아르스 노바와 함께 열리는 마스터 클래스를 통해 김택수, 신동훈, 박정규 등 신인 작곡가들을 지원하고, 이들의 신작을 발표할 창구를 제공해 왔다.

진은숙은 지난 6월 2일, 호암상 수상을 기념해 호암아트홀에서 자신의 작품만으로 구성한 렉처 콘서트를 열었다. 서울시향의 타악기 주자 에드워드 최가 <타악기 주자와 테이프를 위한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를, 피아니스트 최희연이 <피아노 에튀드> 네 곡을, 최수열이 지휘하는 서울시향 앙상블과 소프라노 서예리가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 발췌곡을 연주했다.  방대한 작품을 다 아우르진 못했지만, 매우 지적이면서도 흥미롭고 매력적인 진은숙의 음악세계를 맛보는 데에는 충분한 프로그램이었다.

진은숙과 한 인터뷰 역시 매우 흥미로웠다. 훌륭한 인터뷰이는 질문하는 사람에게도 ‘영감’과 ‘자극’을 준다. 나는 이전에도 몇 차례 진은숙을 인터뷰하면서 아주 훌륭한 ‘인터뷰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작곡 과정에 대해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나왔다.

“작품을 쓸 때마다 벌레가 된 내 모습을 봐요.”

귀가 쫑긋했다. 진은숙처럼 성공한 작곡가가 작품을 쓸 때마다 벌레가 된다니. 카프카의 ‘변신’도 아니고.

“작품을 쓸 때 진짜 내가 버러지로 변하는 것 같은 순간들이 있어요. 너무 안 되니까. 내가 써놓은 게 너무 별볼일 없어 보이고, 내 자신이 너무 하찮아 보이니까. 작품을 쓴다는 게 결국은 내가 나를 독대해서 하는 건데, 진짜 적나라한 나의 모습을 보는 순간들이 있어요. 내가 벌레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거죠. 정말 고통스러워요.”

진은숙은 인터뷰 내내 ‘벌레’, ‘버러지’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창작을 하다 보면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불만에 사로잡히는데, 이 불만이 곧 예술적 원동력이라고 했다. 만족스럽지 못한 것을 고쳐가는 과정 자체가 목표라는 것이다.

“예술가에게 영원히 만족이란 건 없어요. 만약 ‘아, 나는 다 이뤘다’고 만족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천재 아니면 바보일 거에요."

그는 또 자신에게는 고통을 겪는 과정이 굉장히 중요하다며, 그래서 안락한 지위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작품을 쓰고, 정말 안 될 때 나의 처참한 모습을 보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진짜 버러지가 돼봐야 해요. 그런데 내가 교수라든지, 무슨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버러지가 될 수 없잖아요.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가 볼 수가 없는 거에요.”

많은 사람들이 마치 신이 내려준 계시처럼, 번개처럼, 창작의 영감이 예술가에게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은숙은 ‘영감’이 너무 거창한 말이라며, 일상생활에서 작은 아이디어를 얻고, 계속 작품을 써나가는 과정에서 이 아이디어를 거미줄처럼 늘려간다고 했다. 마치 인사동의 명물 꿀타래 과자처럼.

“꿀타래 과자 만드는 과정을 이번에 처음 봤어요. 쌀하고 꿀하고 섞은 덩어리 같은 걸 계속 늘려서 접어가는데, 한 가닥이 두 가닥 되고, 두 가닥이 네 가닥, 네 가닥이 여덟 가닥, 이런 식으로 수천 개의 실로 변하더라고요. 이게 제가 작곡할 때 생각의 움직임하고 너무 비슷해서 놀랐어요.”

조그만 생각의 씨가 있으면 이와 연결되는 생각을 만들고, 다시 이와 연결되는 생각을 만들면서, ‘네트워크’처럼 생각이 불어난다. 이 과정은 반드시 직선만은 아니고, 논리만으로도 안 되는 미묘한 과정이다. 아주 가끔 이런 복잡한 네트워크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무르익은 생각으로 직행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수없이 고통을 겪고 막판에야 온다. 얘기를 듣다 보니 진은숙 머릿속의 생각타래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호암재단은 진은숙 수상 이유의 하나로 ‘현대음악의 대중화’를 이야기했지만, 이는 ‘현대음악을 전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실 현대 음악은 전혀 대중적이지 않다. 진은숙도 ‘현대음악, 어렵지 않아요’라고 이야기하진 않는다.

“현대음악이 어렵다고 여기는 건 당연해요. 현대 음악이 어려운 게, 작곡된 지 얼마 안 된 음악들이잖아요. 현대음악은 굉장히 작곡가들이 많고 개성도 다양한 데다, 많은 경우 지금도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양식으로 정리하고, 정의하기가 쉽지 않아요. 혼돈 상태죠. 그러다가 정말로 좋은 곡들은 훗날에도 살아남아 꾸준히 연주되면서 청중들의 이해의 폭도 넓어질 텐데, 아직은 시간이 많이 필요해요.”

한국은 유럽에 비해 현대음악 관객층도 적고 이해의 폭도 그리 넓지 않다. ‘현대음악 전도사’로서 진은숙의 역할이 더욱 중요한 이유다. 진은숙은 현대음악은 듣는 사람의 노력도 많이 필요하다고 했다. 호기심을 갖고 새로운 음악을 접해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항상 편안하고 친숙한 곡만 들으라는 법이 있을까. 현대음악은 끊임없이 뭔가 생각하게 하고, 뭔가 도전하게 하는 음악이다. 이게 바로 현대음악의 매력일 것이다.

진은숙은 전통적인 오케스트라의 소리 대신 새로운 음향과 색채를 창조하는 데 관심이 많다. 기존의 악기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연주하게 하고, 평소에는 잘 사용되지 않는 다양한 타악기를 동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진은숙은 자신이 타악기를 너무 많이 써서 ‘악명이 높은’ 작곡가라며 웃었다.

연주 단체들에게는 악명이 높을지 몰라도, 관객 입장에서는 진은숙의 곡을 접할 기회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한국에서 공연할 계획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아직은 구체적인 계획을 밝힐 단계가 아니라고 했다. 뭔가 추진되고 있기는 한 모양이다. 기대해 봐야겠다.

인터뷰는 상당히 장시간 즐겁게 진행했는데, 이 글에 다 담을 수도 없고,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아 글 쓰기가 쉽지 않았다. 진은숙을 얘기하는 글을 쓰려다 보니, 나도 ‘창작의 고통’을 겪은 셈인가. 물론 나는 벌레가 된 나의 모습을 대면하지는 못했다. 이 글이 별로 인상적이지 않더라도, 그건 진은숙이라는 작곡가가 인상적이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라, 순전히 글쓴이가 치열하게 고민하지 못하고 마감과 분량에 쫓겨 서둘러 출고한 탓이라는 걸 알아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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