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오후 3시 50분쯤에 대형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건조한 날씨에 강풍까지 불면서 불길이 거의 마을 전체로 퍼졌습니다. 축구장 26개 면적 약 19만㎡가 불탔습니다. 사망자는 없었지만 주민 1명이 다쳤고 77가구, 127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1. 불만 나면 대형 화재
올해는 이미 지난 1월 대응 2단계가 발령될 만큼의 큰불이 났습니다. 주민 250여 명이 긴급 대피했고 18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지난 2023년 1월에도 대응 2단계가 발령된 대형 화재로 주택 약 60개 동이 소실되고 주민 500여 명이 대피했으며 60여 명의 이재민이 생겼습니다. 이 밖에도 2022년 3월, 2014년 11월 등 서울 전체를 긴장하게 만드는 큰 규모의 화재가 끊이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2. 무자비한 철거와 치솟는 주거비가 빚은 흉터
이후 구룡마을은 '무허가 불법 정착지 해소'와 '인도적 거주민 보호'가 맞부딪히는 딜레마 속에서 땜질 행정과 정책 표류를 거듭했습니다. 2000년대 초까지는 무허가 불법 건축물에 대한 지자체의 단속 시도와 거주민의 거센 저항 속에 반쯤 방치된 상태였습니다. 2011년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대법원 판결로 임시 지번 부여, 전기와 수도 공급, 주민등록 등재 허용 등 사실상의 행정 관리가 이뤄졌습니다. 2011년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은 SH공사 주도의 100% 공영 개발 방식 정비를 공식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박원순 서울시장 취임 이후 빠른 사업 진행을 위해 일부 환지 방식을 혼용하자는 서울시와 특혜 시비에 휘말릴 수 없다며 100% 수용 방식을 주장한 강남구가 맞서면서 사업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급기야 2014년 도시개발구역 지정이 법정 시한을 넘겨 자동 실효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빚었습니다. 그 직후 대형 화재로 사망자가 발생하며 비난 여론이 들끓자 서울시가 입장을 바꿨습니다. 강남구의 주장을 수용하면서 구룡마을은 2016년 말 도시개발구역으로 재지정됐습니다.
3. 정비가 번번이 좌초된 핵심 원인
① "헐값 강제수용 당하느니 버티는 게 남는 장사"
구룡마을 전체 부지 약 26만 6,000㎡의 80% 이상이 사유지입니다. 이 토지주들과 합의 없이 개발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토지주들은 100% 수용 방식인 현행 공영 개발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방식으로는 토지보상금이 '개발제한구역 자연녹지' 상태를 기준으로 책정됩니다. 개포동 일대 아파트 부지 시세가 평당 수천만~1억 원인데 공시지가 기준 감정평가액은 평당 수백만 원 선입니다. 토지주 입장에서는 "수천억대 개발 이익을 공공에 고스란히 헌납하는 꼴"입니다. 이미 30년 넘게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버텨온 만큼, 이제 와서 포기할 수 없다고 합니다. 시간을 끌다 보면 정권이나 시장이 바뀌어 개발된 땅 일부를 돌려받는 방식의 환지나 시세를 반영해 보상해 주는 민간 개발로 정책이 바뀔 수 있다는 기대감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지분 쪼개기를 한 기획부동산까지 뛰어든 상태입니다. 이들은 개발 이익을 최대한 받아낼 생각으로 토지를 사들였습니다. 더욱 입장이 강경할 수밖에 없습니다. 토지주들 내부만도 단일한 합의나 출구전략을 도출하기 어렵게 된 사정입니다. 이들은 서울시를 상대로 구역 지정 무효 소송, 보상계획 취소 소송 등 각종 법정 공방을 벌였습니다. 대부분 서울시의 승소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이런 법적 싸움 속에 사업 일정은 한없이 늘어지고 있습니다.
② "임대는 막다른 골목, 분양권 줘야 나간다"
무허가 건물에 거주해 온 주민들과 행정 당국 간의 보상 기준 간극도 매우 큽니다. 현행 도시개발법과 토지보상법의 관련 규정은 분명합니다. 무허가 건축물 점유자에게는 원칙적으로 '임대주택 입주권과 소정의 이사비·주거 이전비'만 지급하게 돼 있습니다. 일반 분양 아파트 입주권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절대 빈곤층인 현 거주자들에게 임대 비용조차 무리입니다. 현재는 사유지 불법 점유 상태라 토지 사용료나 월세를 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공 임대주택으로 이주하면 매달 임대보증금 대출 이자, 월 임대료, 아파트 관리비가 고정비로 발생합니다. 이들에게 이 비용은 사실상의 생계 파탄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30~40년간 극악의 생활환경을 버틴 피해의식과 보상 심리가 깊게 깔려 있습니다. 근처 개포동 판자촌들이 수십억대 아파트로 바뀌는 것을 목도했습니다. '일반 분양권이나 저렴한 분양 전환 권리'를 주기 전에는 못 나간다고 배수진을 치는 이유입니다. 게다가 외지 투기꾼들의 위장 전입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이들을 가려내는 일도 아득합니다.
③ 딜레마에 빠진 정부와 지자체
정부나 지자체는 현대사에서 누적된 '철거 트라우마'와 '특혜 시비'라는 진퇴양난의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물론 법적으로는 행정대집행을 통해 불법 건축물을 철거하고 토지를 수용할 권한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령자와 영세민이 망루를 쌓고 가스통을 앞세워 결사항전을 할 경우 인명사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공무원과 공기업 입장에서는 "강제집행 과정에 참사가 나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보신주의가 작동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토지주와 주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사업을 진행하는 것도 선택지가 아닙니다. 이는 "버티고 떼를 쓰면 초법적 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최악의 선례를 남기게 됩니다. 형평성 시비와 특혜 허용에 대한 거센 비판과 배임 논란에 직면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그러니 정권과 지자체장 성향에 따라 정치적 갈등을 겪으며 장기 표류하고 있습니다.
결국 구룡마을은 강남 노른자위 땅이라는 특수성, '제로섬 게임'에 갇힌 수익 배분 논란, 그리고 대한민국 철거 잔혹사가 남긴 사회적 트라우마가 맞물리며 복잡한 이해 관계의 미로 속에 갇혀 버렸습니다. 천문학적 규모로 예상되는 개발 이익, 사실상 빈 땅이나 다름없는 정비의 용이성, 누구나 동의하는 개발 명분 등이 오히려 모두를 옴짝달싹 못 하게 얽어매는 올가미가 됐습니다 그런 아이러니 속에 대형 화재의 시한폭탄은 누구도 제거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철옹성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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