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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브스夜] '꼬꼬무' 살인자의 편지, "그 어떤 용서도 기회도 바라지 않습니다"···'영화숙, 재생원' 끔찍한 그곳의 '기억'

[스브스夜] '꼬꼬무' 살인자의 편지, "그 어떤 용서도 기회도 바라지 않습니다"···'영화숙, 재생원' 끔찍한 그곳의 '기억'
살인자가 꼬꼬무에 편지를 보낸 이유는?

22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살인자의 편지 - 영화숙·재생원'이라는 부제로 1960년대 끔찍한 일이 일어났던 부산의 '영화숙, 재생원'을 조명했다.

지난 2025년 3월, 방송국으로 한 사람의 편지가 도착했다. 자신을 살인을 저지른 무기수라 밝힌 경호 씨는 "저는 '그곳'에서 지내며, 범행에 필요한 교육을 받고 부산 전역을 돌아다니며 절도와 강도 같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모든 것은 여기에서 시작됐습니다."라며 부산의 영화숙, 재생원이라는 곳을 언급했다.

그리고 제작진은 믿을 수 없는 편지의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해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을 수소문했고 직접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새로운 원장 이순영이 영화숙과 재생원으로 온 후 완전히 달라진 그곳. 그가 온 이후로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 나갔고 공사가 시작되었다고.

부산 곳곳에서 사라진 아이들은 하나 둘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박정희 정부는 당시 부랑아 부랑인을 사회 정화 목적으로 사회에서 몰아내고자 했고 이에 부산시와 부랑인 노숙자 수용 보호 위탁 계약을 맺은 원장 이순영이 돈을 위해 불법 납치를 해 18세 미만은 영화숙, 19세 이상은 재생원에 수용시켰던 것.

평범한 부산 시민이었던 그들은 대소변이 쌓인 방에서 칼잠을 자고 밤낮없이 감시를 당했다. 그리고 군대같이 매일 통제되며 폭행 속에서 강제 노역까지 했다.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아이들은 먹을 게 없어서 화장실의 구더기를 주워 먹고 돼지의 먹이까지 부러워하는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연대 처벌 때문에 쉽게 도주하지도 못했다. 매일같이 죽어도 괜찮다는 듯 폭행이 이어지니 탈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

또한 원장은 탈출한 아이들을 잡아 오는 것도 아이들에게 시키고, 원생들에게 또 다른 원생들을 데려오게 하며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에 원생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나쁜 일을 반복했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폭력뿐만 아니라 성폭행까지 당하는 인권 유린을 당했다.

어제까지 옆에서 자던 친구가 다음날이면 죽어나갔고 그렇게 그곳에서 가혹 행위를 당해 죽은 이들은 영화숙과 재생원 주변 갈대밭에 암매장되었다.

그리고 우연히 이곳을 보게 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 미국인 신부, 소 알로이시오는 영화숙과 재생원의 실태를 알게 되고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그곳의 실태를 고발했지만 외면당하고 도리어 협박까지 당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무부 장관, 국무총리, 박정희에게까지 투서를 보냈고 이에 결국 원장 이순영은 경찰 조사를 받고 구속됐다. 하지만 이순영은 구속 6일 만에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풀려났다.

소 신부님은 이순영과 협상 끝에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아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노력을 계속 한 끝에 1971년 부산시와 영화숙의 위탁 계약이 취소되었다. 그렇게 그곳 아이들은 일상을 찾아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뒤에서 이 원장은 아이들에게 범죄 교육을 시켰다. 그렇게 범죄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아이들 중 경호가 있었다. 범죄 사관학교가 된 영화숙과 재생원. 이 원장은 누군가의 범행을 다른 아이들에게 덮어 씌우기도 했다.

이에 소년원에 가게 된 경호, 하지만 그는 소년원에서 자유를 찾았다고 말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리고 또 소년원에서 나온 뒤에는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영화숙. 이 원장은 경호에게 또 다른 임무를 맡겼다. 마약 배달이 그의 새로운 일이었다. 그리고 공무원들에게 상납까지 하도록 했다.

이후 1976년 부산시 법인 허가가 취소되며 영화숙과 재생원은 문을 닫게 되고 이순영은 최종 판결 벌금 30만 원이 고작이었다. 이순영이 지시했다고 볼 근거가 없다는 게 바로 그 이유.

하지만 원생들의 강제노역으로 불린 재산, 불법으로 편취한 자금들 모두 이순영의 일가 재산에 귀속되었다. 최종심 4년 뒤 1981년에 지병으로 사망한 이순영.

그렇게 영화숙을 떠나게 된 피해자들은 이후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갔고 이후에는 삼청교육대까지 연달아 강제 수용되며 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공황장애, 대인기피증, 폐소공포증을 앓은 피해자들. 그리고 그들은 영화숙 수용 당시 명부에 바꾸어 버린 이름 때문에 신원불상자가 되어 간첩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여러 범죄를 저지르다 28살이 된 경호는 우연히 한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벌어진 싸움에 말려들며 넘지 말아야 선을 넘게 되었다.

현재 70대가 된 경호, 그는 죽기 전 바라는 것은 이것뿐이라며 "만약 내가 영화숙 재생원의 피해자로 인정받고 보상금을 받게 되면 불우이웃을 돕는 복지재단에 기부하여 더 이상 나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게 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암매장한 시신들을 포함한 영화숙 주변에 암매장된 시신을 발굴해 가족들에게 돌려주고 싶다"라고 자신의 바람을 밝혔다.

그리고 그는 "나는 흉악범, 무기수다. 그 어떠한 용서도 기회도 바라지 않는다"라고 말해 씁쓸함을 남겼다.

평생의 지옥 같은 트라우마 속에서 살았던 피해자들은 국가와 부산시를 상대로 511억 원의 배상을 받아냈다. 하지만 그들은 "돈은 문제가 아니다. 나는 이제 누구를 원망하며 사냐"라며 돌이킬 수 없는 자신들의 삶에 망연자실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SBS연예뉴스 김효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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