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 선관위원장 퇴진 시위서 연행되는 여성
인도에서 1억 3천만 명이 넘는 유권자 명단이 삭제돼 집권당에 유리하게 바뀌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선거관리위원장의 퇴진을 촉구하는 시위가 점차 거세지고 있습니다.
인도 Z세대(1995∼2007년생)를 중심으로 꾸려진 온라인 정치운동 단체가 이번 시위를 주도하고 여기에 야권까지 합세해 나렌드라 모디 총리의 장기 집권을 위협하는 모양새입니다.
지난달 인도 매체 인디언익스프레스는 선관위의 유권자 명단과 관련한 의혹을 처음 보도했습니다.
이 매체 보도에 따르면 선관위가 유권자 명단 초안에서 수백만 명을 삭제하는 과정에서 선관위원 2명은 자신들이 모르는 사이에 일부 결정과 명령이 내려졌다며 개편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나타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선관위의 유권자 명단 수정으로 일본 전체 인구보다 많은 1억 3천300만 명의 이름이 삭제됐습니다.
여기에는 사망자 2천800만 명, 이주자 6천300만 명, 소재 불명자 3천만 명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야당 지지자들이 명단에서 대거 삭제됐다는 의혹도 제기됐고, 모디 총리가 이끄는 연방의회 집권당인 인도국민당(BJP)이 향후 선거에서 유리해진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인도 선관위는 선관위원들 사이의 이견은 어떤 기관에서든 있을 수 있는 통상적인 일이었다며 부적절한 행위는 없었다고 반박했습니다.
그러면서 유권자 명단 수정은 중복 등록자를 비롯해 사망자와 허위 등록자를 제외한 것이라며 잘못 삭제된 유권자 이름은 재등록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선관위 해명에도 인도 Z세대 정치운동 단체인 '바퀴벌레국민당'(CJP) 수천 명은 지난 2일 경제 중심지인 서부 뭄바이에서 갸네시 쿠마르 선관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첫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후 인도 연방의회 제1야당인 인도국민회의(INC)를 포함한 20여 개 야당 정치연합인 인도국민발전통합연합(INDIA)도 시위에 가담했습니다.
INC는 쿠마르 선관위원장은 물론 모디 총리와 아미트 샤 내무부 장관의 사퇴를 요구했습니다.
INC 지도자인 라훌 간디 전 대표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게 없다"며 "이 겁쟁이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시위는 지난 주말인 10일과 11일 더 격화했습니다.
CJP가 수도 뉴델리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려고 하자 인도 정부는 경찰관 등 6만 명을 투입해 수도권인 델리 전역을 사실상 봉쇄했습니다.
인도 경찰은 시내 주요 진입로에 바리케이드와 콘크리트 블록을 설치해 차량 통행을 막고 검문검색을 강화했습니다.
또 지하철역 45곳을 폐쇄하고 시위 예정지와 도심지 등지에서 모바일 이동통신망도 차단했습니다.
인도 경찰은 지난 10일에만 2천400명이 연행된 뒤 구금됐으며 대부분은 같은 날 밤 석방됐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CJP는 전국에서 1만 명이 넘는 시위대가 경찰에 체포됐다고 주장했습니다.
시위 현장에서 취재하던 기자들도 잇따라 경찰에 연행됐습니다.
이들 가운데 여러 명은 마이크를 들고 있었고 기자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고 로이터 통신은 전했습니다.
프랑스에 기반을 둔 국제 언론자유 보호 단체인 국경 없는 기자회(RSF)는 최소 기자 16명이 연행됐다며 경찰 조치는 용납할 수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공익을 취재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다"라며 "그것은 그들의 업무"라고 강조했습니다.
11일에도 델리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으며 뭄바이와 콜카타 등지에서도 수십 명이 참여한 소규모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번 시위에 참여했다가 구금된 아비타 루헤자는 정부가 델리를 요새로 만들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로이터에 "(정부는 국민의) 권리를 하나씩 박탈해 왔고, 독재로 변해가고 있다"며 "이것이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냐"고 되물었습니다.
뉴델리 시위에 참여하려던 CJP 창립자 아비지트 딥케(31)를 비롯해 공동 창립자인 사우라브 다스와 CJP 대변인 아슈토시 란카 등 지도부 3명도 지난 10일 델리 공항에서 체포됐습니다.
이들은 하루 만인 지난 11일 향후 1년 동안 평화를 해치지 않는 조건으로 석방됐지만 쿠마르 선관위원장이 사퇴할 때까지 시위를 계속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딥케는 석방된 직후 소셜미디어(SNS) 엑스(X·옛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모디 총리를 겨냥해 "인도의 수치"라고 비난하면서 "이 나라 역사상 이보다 더 큰 겁쟁이이자 횡포를 일삼은 자는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시위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는 서명하지 않았다"며 "우리는 다시 거리로 나설 것"라고 덧붙였습니다.
이번 시위를 이끈 CJP는 지난 5월 실업 상태인 젊은이들을 바퀴벌레에 비유한 수리야 칸트 당시 대법원장의 논란성 발언이 알려지자 하루 만에 만들어졌습니다.
마침 '전국 의대 (학부) 입학 자격(NEET) 시험'을 앞두고 문제 유출 의혹이 불거졌고, CJP는 수도 뉴델리에서 다르멘드라 프라단 교육부 장관의 사퇴를 촉구하며 두 달 가까이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인도 Z세대는 이 단체에 뜨거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현재 CJP의 인스타그램 계정 팔로워 수는 2천500만 명을 넘습니다.
이는 집권당인 BJP의 1천500만 명보다 훨씬 많은 수칩니다.
지난 7월에는 CJP 시위대 수천 명이 뉴델리에서 연방 의회로 행진을 시도하면서 최루탄과 곤봉을 사용한 경찰과 충돌해 폭력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후 동부 서벵골주와 남부 텔랑가나주 등지로도 시위가 확산하자 프라단 장관은 결국 사퇴했습니다.
그는 모디 내각의 장관들 가운데 대규모 시위에 밀려 사퇴한 첫 사례였습니다.
당시 CJP의 시위는 부족한 일자리와 공평하지 않은 교육 기회 문제를 공론화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주요 경제국이지만, 15∼24세 청년층의 실업률은 20% 정도로 높은 편입니다.
특히 학사와 석사 학위 소지자 3분의 1가량이 실업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모디 총리는 CJP의 시위 후 각종 입시에 대비한 무료 온라인 강의를 정부가 제공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젊은 층 달래기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2개월여 만에 다시 벌어진 CJP의 선관위원장 퇴진 촉구 시위는 모디 총리가 집권한 지난 12년 동안 가장 큰 정치적 도전이라고 외신들은 짚었습니다.
앞서 2019년에도 인도에서 시민권법 개정안(CAA) 반대 시위가 벌어졌고, 20명 넘게 사망한 바 있습니다.
영국 가디언은 "모디 정부는 집권 기간 반대 의견에 대해 극도로 관용적이지 않은 태도를 보여왔지만, 이번처럼 전국 차원의 시위는 드물었다"며 "이번 시위가 심각한 정치적 도전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내년에는 인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북부 우타르프라데시주를 비롯해 주요 주의회 선거가 치러질 예정이어서 이번 시위가 모디 총리와 여당에 더 큰 정치적 부담이 될 전망입니다.
AFP 통신은 미국 보스턴대학교 출신으로 CJP 창립자인 딥케가 인도에서 반대 세력의 상징으로 부상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딥케는 "시위대를 향한 대규모 탄압과 델리 봉쇄는 강함이 아니라 국민을 두려워하는 지도자의 모습"이라며 "모디 총리는 시위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패배를 인정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사진=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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