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 인트로
00:22 유품 하나 없던 독립운동가 아버지…박물관에서 마주한 기적, 그런데
01:55 알고 보니 '친일파' 글씨?…슬그머니 치운 국중박
03:14 국중박은 왜 애국지사 작품이라 못박았을까?
05:00 위 파악도 쉽지 않다?
06:23 SBS 보도 후엔?
한 폭의 붓글씨 앞에서 백발의 남성이 무릎을 꿇은 채 흐느낍니다. 지난 7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촬영된 어느 독립운동가 후손의 사진인데요. 며칠 뒤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직접 고개를 숙이고, 벅찬 마음에 눈물을 흘리던 애국지사의 후손들은 속앓이만 하게 됩니다. 황당한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1. 유품 하나 없던 독립운동가 아버지…
박물관에서 마주한 기적, 그런데
화제가 된 사진의 주인공은 독립운동가 박원근 지사의 아들 박용현 씨입니다. 충북 보은 출신의 박 지사는 1930년대 일제 통치에 저항한 삼인회와 신인구락부 사건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른 항일운동가인데요. 광복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보은경찰에 학살당했고, 60년이 지나서야 항일운동 업적을 인정받은 사연이 지난 2020년 SBS를 통해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박용현 씨는 아버지에 대한 흐릿한 기억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박용현 / 박원근 애국지사의 아들 (지난 2020년 8월) : '일제 감시대상 인물 카드'라고 해서, 저희 아버지가 거기 나와 있어요. (그 외에는) 간헐적인 아버지의 생각(기억)을 가지고 있을 뿐이고…]
그 시절 독립운동가들은 일제 추격 등을 피하려다 보니까 유품 하나 제대로 남기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하는데, 박 지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십 년 기억을 더듬으며 그리움을 안고 산 아들에게 최근 놀라운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박 지사의 친필 붓글씨 작품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됐단 겁니다. 한달음에 찾아간 전시장엔 붓글씨 주인은 분명 아버지라고 소개가 돼 있었고 그의 흔적을 처음 마주한 줄 안 아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광복절을 앞두고 이런 사연이 소셜미디어 등을 타고 알려지면서 관심이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큰일했다, 이런 반응 이어졌는데 진짜 큰일은 그 뒤에 벌어졌습니다.
2. 알고 보니 '친일파' 글씨?…
슬그머니 치운 국중박
SBS 취재진에게 한 통의 제보가 접수된 건 지난 11일, 붓글씨 유품이 박 지사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작품일 수 있단 의혹이 제기돼 슬그머니 치워졌단 겁니다. 직접 찾아가 봤습니다. 박 씨가 기쁨의 눈물을 흘린 자리엔 시 한 편만 내걸렸습니다.
[전시회 관계자 (지난 11일 오후) : 교체가 된 상태입니다. 개인 사정으로 인해서…]
개인 사정이 뭔지 박물관 측에 물어봤더니 전시 이후에 동명이인의 작품일 가능성이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고 재확인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해서 10일 오후 전시장에서 철수했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박 씨가 다녀가고 사흘 만에 작품을 내린 건데, 취재 결과 여기서 말하는 동명이인은 하필 대표적 친일파로 꼽히는 인물로 확인됐습니다. 박중양, 일본제국의회 일원이자 3·1운동 진압에 앞장선 걸로 지목된 친일파 고위 관료인데요, 그의 개명 전 이름은 박 지사와 같은 박원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항일 독립운동가의 정신이 담겼다고 소개한 글씨가 알고 보니 역사의 정반대편에 서있던 친일파의 흔적일 수 있단 주장에 국립중앙박물관은 발칵 뒤집혔고 부랴부랴 재감정에 착수했습니다.
3. 국중박은 왜 애국지사 작품이라 못박았을까?
이 대목에서 의문이 하나 들죠. 박물관은 애초에 왜 애국지사 박원근의 작품이라고 못박아서 설명했던 걸까요? 문제의 붓글씨는 지난달 1일 문을 연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들의밥상'에 내걸렸습니다. 우리나라의 식문화를 종합적으로 다뤄보잔 취지로 기획된 전시회인데요. 이 콘셉트에 맞는 유품을 수소문하다가 개인 소장품인 이 붓글씨를 확보한 걸로 파악이 됩니다. 작품에 적힌 한자 '일반시국은'은 밥 한 그릇도 나라의 은혜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최초의 승병장 영규대사 어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품 한 켠엔 '한인 박원근'이라고 적혔거든요. 박물관 측은 유물 소유자가 박 지사의 작품이라고 설명을 한 데다가, 여타 애국지사처럼 이름 옆에 '한인'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일본에 맞서 싸운 의병장 어록을 인용한 터라 별다른 의심, 특히 친일파의 작품일 수 있다는 발상 자체를 하지 못했다고 해명했습니다. 다양한 전문가들에게 사전 자문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검증 절차상 미흡했던 부분이 있었다고 인정을 했는데요. 국립중앙박물관이 국내 최고 권위를 가진 문화기관인 만큼 작은 소장품 하나 전시할 때도 굉장히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들 합니다. 그런 기관에서 이런 부실 검증 논란을 자초했단 것 자체가 납득하기 어렵다, 체면을 구긴 것이라는 지적이 문화계에서 나왔습니다. 공지 하나 없이 붓글씨를 치웠던 박물관 측은 저희 취재가 시작된 당일 저녁 무렵 돌연 홈페이지를 통해 사과문을 냈고, 이튿날 유홍준 관장도 직접 고개를 숙이며 유물에 대한 다각도 교차 검증 등 재발 방지를 약속했습니다.
4. 진위 파악도 쉽지 않다?
잊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있죠. 박물관 설명을 믿고 감격의 눈물을 쏟았던 박원근 지사의 후손들입니다. 저희가 접촉해 봤는데요. 불과 며칠 사이 사실 선조의 유품이 아닐 수 있고 심지어 그게 독립운동가를 괴롭힌 친일파 글씨일 수 있단 청천벽력 소식에 황망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국가기관의 위상을 실추시키는 일에 앞장서는 건 애국지사 후손으로서 옳지 않다, 박물관 측이 진위 파악에 힘써 주시길 바란다며 말을 아꼈습니다. 애국지사 후손답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만 이들이 바라는 진위 파악, 현재로선 쉽지 않아 보입니다. 앞서 박 지사가 유품 하나 남기지 않았다고 설명드렸죠. 박 지사의 필체인지 비교할 대상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박 지사 필체라고 단정할 만한 과학적 근거는 마땅치 않았던 셈입니다. 재감정 절차에 나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박물관 측이 우선 박중양의 남은 필적을 대상으로 비교 감정을 진행하고 있는데, 박중양의 작품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와도 그게 곧 애국지사 박원근의 붓글씨라는 뜻은 아니고 제3자의 것일 가능성도 있어서 진실 규명, 매우 어려워보인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입니다. 박물관 측은 이르면 이달 말까지 진위를 따져보고 결론을 발표하겠다는 방침입니다.
5. SBS 보도 후엔?
공교롭게도 박물관 측이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고 바로 다음날, 박 지사 후손은 청와대로 향했습니다. 광복절을 앞두고 유공자 후손 행사에 초청받은 겁니다.
[이재명 대통령 : 선대 그리고 여러분의 명예와 삶을 지키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국가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박 지사 후손은 SBS 보도 이후에 "박원근 지사를 기억하고 저희 가족의 일에 깊은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박물관의 조사가 투명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린다"고 당부를 했습니다.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 선대와 후대의 명예와 삶을 지키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국가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 달라는 뜻일 겁니다. 백발의 노인이 흘린 눈물 앞의 진실을 밝혀낼 수 있을지, 국가 최고 문화기관이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취재 : 안희재, 구성 : 신희숙, 영상취재 : 배문산, 영상편집 : 홍진영, 디자인 : 양혜민, 제작 : 디지털뉴스부)
[AFTER 8NEWS] '독립운동가'라더니 '친일파'?…아들 두 번 울린 '국중박' 진실은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