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학교는 2023년 3월부터 강서구 옛 염강초등학교 건물을 빌려 쓰고 있는데 내년 2월 사용 기간 만료를 7개월 남겨두고 있습니다. 최근 현대차가 사업비 일부를 부담하기로 하면서 해당 부지에 새 학교 건물을 짓기로 했고, 이후 여명학교가 드디어 떠돌이 신세를 면하게 됐다는 기사들이 많이 나온 바 있습니다. 하지만, 여명학교로서는 실질적으로 남은 큰 산이 바로 12일로 예고됐던 '주민 설명회'였습니다. 일시적으로 부지를 쓰는 것과 자리를 잡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주민들의 여론이 어떨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어서였습니다.
주민설명회를 30분 앞두고 기자와 만난 조 교장은 또 울먹였습니다. 과거의 '아픈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인데, 얼굴에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해 보였습니다.
여명학교는 2004년 관악구 봉천동 상가 건물에서 시작했습니다. 이후 학생 수가 늘면서 2008년 남산으로 이전했고, 2019년부터 은평구로 터를 옮겨 건물을 신축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주민 반발이 매우 거셌고, 결국 이사 계획은 무산됐습니다. 편익시설 용지에 왜 학교가 들어오느냐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결국은 북한 배경 청소년들이 있는 공간을 '기피 시설'로 간주한 것이었습니다.
2019년 11월 열린 당시 공청회는 여명학교 성토대회를 방불케 했다는 게 조 교장의 기억입니다. 반대 목소리를 내기 위해 반차를 쓰고 온 대기업 과장, 자녀와 북한 배경 청소년들을 섞이게 할 수 없다는 어느 학부모, 집값이 떨어질 거라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어졌습니다. "아이들 안 섞이게 당신이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느냐"는 식의 '모욕적'인 질문도 참아내야 했습니다. 학교가 들어서려던 부지에는 '죽어도 짓지 마'라는 낙서가 욕설과 함께 적혀 있었습니다. 주민 반발에 결국 계획은 철회됐습니다.
과거처럼 또다시 주민들이 거세게 반발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여명학교 관계자들은 행사가 끝날 때까지 좀처럼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주민 설명회가 열린 여명학교 멀티실 현장에는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여명학교 관계자들도,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들도 행사가 잘 끝날지 100% 장담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드디어 시작된 설명회. 조 교장은 참석자들에게 인사말을 하며 "탈북하신 분들 몇 분이 와주셨는데, 오늘 이 자리에서 좋은 이야기가 많이 나오면 여러분을 격려하는 것이고, 혹시 불편한 이야기 나오더라도 상처받지 마시라"고 말했습니다. 목소리는 떨렸습니다.
2019년의 기억 때문일까요? 옛 초등학교 부지에 함께 들어설 유아교육진흥원과 여명학교 측 '동선'은 '분리'할 것이라는 교육청의 조심스러운 설명이 이어졌고, 마침내 주민 발언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수년 전 모두가 날이 서 있던 그날의 장면이 다시 되풀이되는 것일까.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가장 먼저 손을 든 사람은 여명학교 바로 옆 세현고등학교의 하의진 교장 선생님이었습니다. 발언은 다소 뜻밖이었습니다. 일부를 옮깁니다.
"저희 학교 학부모님들도 계실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개인적으로 찬성의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혼자 살아가지 않고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중에서도 가깝지만 먼 이웃과 어떻게 적대적이지 않고 공감하며 살 수 있을까 고민하는 아이들로 컸으면 좋겠습니다.…(중략).…우리 아이들도 조금 더 다른 지역, 다른 성장 배경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과 공감하며 살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또 다른 참석자는 오히려 공사 기간 동안 아이들의 수업권이 잘 보장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러면서 "강서구가 고령화되고 젊은 아이들이 없는데, 아이들이 바글바글한 것은 고무적이고 좋은 현상"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후 여명학교와 함께 새로 건립될 유아교육진흥원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질문 정도가 추가로 있었을 뿐, 관계자들의 예상과 달리 큰 소동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따금 메모를 하고 PPT 화면을 찍는 참석자들이 있었을 따름입니다.
예상보다 싱겁게 끝난 행사, 그런데 가슴을 쓸어내린 이들은 여명학교 관계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있던 한 중년 여성 참석자는 과거 북한이탈주민 사역 봉사를 했던 사람이라며, 이번만큼은 자리를 잡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도하러 왔다'고도 했습니다. 여명학교를 졸업한 학생들도 힘을 보태려는 듯 설명회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다들 과거의 상처가 이번만큼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간절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참석자들이 대부분 돌아가고 직원들이 의자를 정리하는 동안 조 교장은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진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눈물이 난 이유를 "탈북한 아이들에게 매몰차게 대하지 않고, 일반적인 과정들처럼 진행되어서 정말 감격스러웠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조 교장은 행사가 끝나고서야 조금 긴장이 풀린 얼굴이었습니다.
서로 갈라지고 상대를 배척하는 일이 잦아진 요즘, 벽을 낮추고 이웃을 품어 안는 일은 쉬운 과제가 아닙니다. 그만큼 각자의 이해관계가 중요해졌고 세상이 각박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날 있었던 작은 공감의 발언들, 또 날 선 발언의 '부재'는 우리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아닐지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곱씹게 됐습니다. 새 학교 건물이 온전히 문을 열기까지 아직 넘어야 할 산들이 있겠지만, 조 교장의 말처럼 그저 '일반적인 과정들'처럼 진행될 수 있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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