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는 역대 조선왕과 왕비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왕실 사당입니다. 임진왜란 초기에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신했던 선조도 종묘의 신주만은 챙겨갔습니다. 유교 왕정 국가였던 조선에 있어 종묘는 국가 그 자체나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전하, 종묘사직을 생각하시옵소서!"
"이 나라의 종묘사직이 전하의 대에서 그치게 될 것이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전통 건축물 중 최고 하나만 꼽아보라고 하면 보통 사람들은 경복궁 같은 궁궐을 꼽습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감탄하는 최고의 한국 건축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종묘 정전입니다.
두 번이나 종묘를 방문했던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는 정전을 파르테논 신전에 비유하며 한국인들은 이런 건물이 있는 걸 감사해야 한다고까지 했습니다.
김봉렬 / 건축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종묘 정전이 19칸인데 아무도 19칸이라는 인식은 못하실 거예요. 무지하게 길다. 왜 이렇게 끊임없이 반복을 시키느냐 하는 것은 일상적 경험을 능가해버리는 거죠. 초월의 경험. 종묘라는 것은 단순함 속에 있는 정말 알지 못하는 힘이랄까, 그걸 미학적으로는 숭고미 이렇게도 얘기를 하죠. 화려한 아름다움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이 있는 거죠.
정전을 카메라로 담는다는 것은 지난한 일입니다. 직접 눈으로 봐야지만 장엄하고 숭고하면서도 소박함까지 품은, 정전의 참모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전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때는 나와 정전 사이에 아무 것도 없을 때입니다.
국가유산청은 당초 정전의 보수 공사 기간을 2년 정도로 잡았습니다. 하지만 기와를 뜯어 보니 생각보다 손 댈 데가 많아서 공기가 두 배 정도 늘었습니다.
최자형 / 국가유산청 기술사무관: 거의 30여 년 만에 가장 큰 수리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기와가 노후돼서 비가 좀 새기도 했었구요. 그러다보니 기와 아래에 있는 목 부재들도 좀 벌어짐도 있었고, 단청도 추가로 하게 되었고, 제일 신경썼던 부분은 아무래도 지붕부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장인 匠人
김창대 / 국가무형유산 제와장 보유자: 불 들어가는 보니까 오늘 기와 잘 나오겠네요. (불이) 수그림없이 쫙 빨려 들어가는 게, 고르게 빨려들어가는 게 굉장히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사실 이제 시작입니다. 앞으로도 초불, 중불, 대불, 막음불이 남아 있습니다. 내일 새벽까지 쉬지 않고 불을 때야 합니다. 숭례문 화재 보수 때 스승인 한형준 제와장을 보필해 기와를 만들었던 김 제와장은 이번 종묘 정전 보수 공사 때는 홀로 기와 제작을 이끌었습니다. 숭례문 복구에 혼신의 힘을 다한 스승이 준공 직후 타계했기 때문입니다.
김창대 / 국가무형유산 제와장 보유자: 숭례문 때보다 3배나 많은 수량인데 할 수 있을까? 일을 똑같이 진행하면서도 시행착오가 나왔을 때 아, 이거는 (한형준) 선생님이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던 것 같습니다.
은회색이거나, 잿빛이거나. 한 장 한 장이 조금씩 다 다른 기와 빛깔은 손으로 만드는 전통 기와만의 특색입니다. 전통 기와는 새로 올려도 오래된 건물과 잘 조화됩니다. 프레스로 찍어내는 공장 기와는 모두 균질한 검은색이라 오래된 문화재에 올리면 아무래도 어색하죠. 정전 지붕에도 공장 기와가 일부 올라가 있었는데, 이번에 김창대 제와장이 만든 전통 기와로 모두 바꿨습니다. 교체한 기와만 무려 6만 6천 장. 전체 기와의 90%를 바꾼 거죠.
김봉렬 / 건축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현대식 공장기와를 쓰면 공장 기와가 강도가 엄청 높아요. 높아서 수명은 오래 가는데 문제가 전통 기와보다 하중이 한 1.5배가 더 많아요. 그러니까 이 무거운 거를 올려버리니까 건물들이 다 기울어요. 그게 이제 문화재 보수의 가장 큰 문제였어요.
전통 기와 제작의 모든 과정에는 사람 손이 필요합니다.
"탁.탁." "이게 치면서 기포들이 빠져나가는 겁니다"
흙벼늘이라 부르는 흙더미에서 흙을 떼다가 담무락을 쌓습니다. 이 담무락에서 약 200장의 기와가 나옵니다. 이렇게 쌓아 올린 담무락은 사람이 밟아서 다진 뒤 일정 시간 묵혀줍니다. 흙도 숙성을 시켜야 점력이 좋아진다고 합니다. 숙성시킨 흙은 쨀줄이라고 부르는 도구로 자릅니다. 그런 다음 와통에 붙여 기와의 틀을 잡습니다.
김도형 / 국가무형유산 제와장 이수자: 이게 수작업이다 보니까 그날의 어떤 컨디션, 날씨, 그 다음에 사람들하고 협력해서 하는 작업에 따라서 모양이 달라지거든요. 기계로 찍어내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다 손으로 하기 때문에
최공호 / 전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그게 인간의 리듬이고 문화의 본질이예요. 인위적으로 규격화하고 표준화해버리면 이상한 문화가 되는 거예요. 획일적이고. 그건 문화라고 할 수 없어요. 공산품이거나 너무 맛대가리가 없고 하나를 보면 그냥 나머지 100개는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는. 정교하게 만들되, 정확하게 만드는 거에 대한 열망을 굳이 가질 필요가 없는 이유인 거예요. 한국미의 특질이예요.
암키와 안쪽에는 바대를 써서 문양도 새겨줍니다. 기와가 덜 미끄러지게 하는 기능을 합니다. 기와 성형이 끝나면 건조시킵니다. 어느 정도 건조된 기와는 조막손과 건장채를 이용한 건장치기를 통해서 물매를 만들어줍니다. 이렇게 하면 비가 왔을 때 물이 잘 빠집니다. 말린 기와를 쪼개면 네 개의 암키와가 나옵니다. 문화재는 암키와를 보통 세 겹으로 쌓은 뒤 그 위에 수키와를 올립니다. 이렇게 흙에서 한장의 기와가 탄생하기까지는 한달에서 한달열흘 정도가 걸립니다.
사람이 흙과 불로 기와를 만드는 게 뉴스가 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시대가 이런 일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통 기와는 공장 기와보다 몇배나 비싸고, 내구성도 떨어집니다. 규격은 지키지만 기와마다 모양도 조금씩 다릅니다. 그렇다고 장인이 큰 돈을 버는 것도 아닙니다. 김창대 제와장은 가마 바로 옆에 있는 이 흙집에서 20년 가까이 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습니다. 4년에 걸친 종묘 정전 기와 작업 끝에 지난해에는 큰 수술도 받았습니다.
오늘날 A.I. 문명은 기다림의 미학을 모릅니다. 뭐든 입력 즉시 출력되기를, 그저 '뚝딱'을 원할 뿐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수제 기와를 만든다는 것은 어쩌면 미친 짓입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인류의, 오랜 삶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손으로 만들었고, 모든 일에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느린 과정에서 만드는 이의 영혼이 물건에 스며들었습니다.
김창대 / 국가무형유산 제와장 보유자: 내가 아무리 마음 급해가지고 빨리 (불길을) 올리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불은 적절할 때가 되어가지고 적절한 나무가 들어가야지 불이 그때서야 올라가게 되는 거예요. 숯이 가득한 상태에서 아무리 나무 넣어봐야 불만 위로 올라가게 되고 밑에는 안 익게 된다고요. 어찌보면 감에 의한 작업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가지고 좌측에 있는 온도계가 1,100도라 찍어도 가마 중앙이나 바닥 부분이 다 1,100도라고 볼 수가 없는 거죠. 그 때는 사람의 감에 의해 가지고 일일이 확인하고 그 경험에 의해서 어느 정도 진행이 돼야지만 제대로 된 기와가 나올 수가 있는 겁니다.
최공호 / 전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장인들은 체득된 기술을 탁월하게 발휘해서 우리 문명과 문화를 이끌어온 주체예요. 문명의 위기라고 하는 게 자세히 관찰해보면요. 딱 한가지 지점에 도달해요. 바로 물건의 문제로구나. 물건을 만드는 과정이 정당하지 않고, 순리에 어긋나고
17년 전 2월의 어느 겨울날. 이근복 번와장의 마음은 타들어갔습니다.
이근복 / 국가무형유산 번와장 보유자: TV보니까 숭례문에 화재가 나서, 바로 옷을 좀 두툼하게 입고 제가 택시를 타고 갔죠. 내 건물이 탄다, 그런 게 마음이 급했죠.막 소방차 있는데 들어가서 호스를 펴고 다녔어요. 왜냐하면 물이 좀 많이 나가서 화재 진압하는데 도움이 되게끔 하려고.
자신이 올렸던 숭례문 기와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걸 지켜본 이근복 번와장은 화재 이후 숭례문 복원에도 참여했습니다. 번와장은 기와를 잇는 장인입니다.
이근복 / 국가무형유산 번와장 보유자: 저희는 지붕의 경사진 데에서 작업을 하고 또 그 밑에는 낭떠러지고. 안전 발판을 지금은 매지만 옛날에는 아주 위험했죠. 목수들이 서까래만 갈아놓으면 그 뒤에는 저희들이 다 작업을 하죠. 지붕 공사를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서 건물의 미가 나죠. 한옥은 전통미가 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곡선을 잘 잡아야 됩니다.
종묘 정전에 새 기와를 올리는 일도 이 번와장이 총괄했습니다. 서까래 위에 나무와 흙을 깐 뒤 기와를 올려 지붕 곡선을 잡는 번와 직업은 오랜 경험과 암묵지가 필요한 일입니다.
이근복 / 국가무형유산 번와장 보유자: 기와 지붕은 경사진 데다가 기와를 얹기 때문에 흙이 좋아야 돼요. 또 혼합을 잘해야 돼요. 아무리 생석회를 많이 넣어도 혼합을 잘못하면 힘이 없는 거죠. (국가)유산청에서 몇 대 몇으로 (섞으라는 것은) 나와있어요. 그런데 그걸 그대로 하면 안되는 경우가 많이 있죠. 흙에 따라서 생석회를 더 놔야 생석회가 수명을 좌우하는 거예요
김봉렬 / 건축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장인이라는 건 '생각하는 손', 이렇게 표현하기도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엄청난 트레이닝이 있어야 됩니다. 스시 장인이 딱 집으면 백몇 알이라면서요. 그거 하려면 몇십 년을 해야되는 거거든요. 그 감각을 익히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 마음대로 해도 법식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번 정전 보수 공사에서는 단청도 새로 칠했습니다. 단청에는 목재 보호 이상의 중요한 쓰임새가 있습니다.
구본능 / 단청기술자. 단청기술연구소장: 건물에도 위계가 있고 그 위계에 맞는 의장이 별도로 있는 것이죠. 그래서 단청은 멀리서 보더라도 그 의장만 보고도 그 건물의 성격을 알 수 있게끔 해주는 게 중요한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정전은 조선왕조 최고 위계의 건축물이지만 궁궐이나 사찰의 화려한 단청과는 달리 가장 낮은 등급의 단청인 가칠단청이 쓰였습니다. 가칠단청은 두세가지 색만 사용합니다.
구본능 / 단청기술자. 단청기술연구소장: 종묘는 문양으로 설명하지 않고 색으로만 설명하고 있는 건물이고요. 그 엄중한 법식과 규율을 단순한 색으로 아주 엄하게 규정하고 있는 거죠, 건물 자체가.
정전 단청에 쓰인 두가지 색은 석간주와 뇌록이라는 전통 안료입니다. 붉은 색을 내는 석간주(石間朱)와 푸른색을 내는 뇌록(磊碌). 모두 이름에 돌석자가 들어가 있죠. 광물성 안료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걸 소껍질로 만든 천연 접착제인 아교나 찹쌀풀과 섞어서 정전에 칠했습니다.
구소장은 우선 정전에 여러 겹으로 덧발라져 있던 기존 단청을 살살 벗겨내면서 과거에는 어떤 색들이 칠해져 있는지 일일이 확인했습니다. 그런 다음 국가유산청 전문가들과 함께 어떤 색으로 칠할지 논의했습니다. 14번 태실 벽의 단청을 벗겨내보니 조금씩 차이가 나는 다섯 가지의 붉은 색이 나왔는데, 이번 보수 공사에서는 그중 고종 시기의 단청 색깔로 보수했습니다.
전통 기와와 마찬가지로 전통 안료도 비용이 많이 듭니다. 특히 소껍질로 만든 아교는 국내에서 생산하는 곳이 없어졌다는 게 구소장의 얘깁니다.
구본능 / 단청기술자. 단청기술연구소장: 불편하다고 재료를 바꾸게 되면 그런 기술 자체가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아교는 더울 때 습할 때 쓰면 박락(되고), 접착제 효과 떨어지고, 겨울에는 얼어서 사용하기 어렵고. 아교를 사용하지 않고 일반 화학 접착제를 쓰면 1년 내내 사용하기 편한데 하지만 전통적인 기술이 사라지게 되는 거죠.
국가유산청은 숭례문 화재 이후에 주요 문화재의 경우 전통 기법과 재료를 써서 보수하고 있습니다. 기와와 단청, 바닥 전돌 등을 교체한 이번 정전 보수에는 5년 간 약 200억원이 들었습니다.
최자형 / 국가유산청 기술사무관: 89년, 91년도에 수리를 하면서 그 당시엔 대부분 아크릴 에멀전을 사용해서 화학 단청으로 사용을 했었거든요. 더 효율적인 방법의 기계나 공장(제품)이나 그런 것들을 사용하게 되면 기존에 있던 재료를 이용한 건축의 기술, 기술에 대한 전승을 끊긴다고 보셔야 돼요. 기술이 끊기고 재료가 끊기면 아무리 의지가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이어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생각하는 손
조풍류 / 한국화가: 종묘를 딱 들어가자마자 아, 여기는 내가 그려봐야겠다. 왜 숭고하면서 그 웅장함, 그리고 그 고요함. 그 건축미에서 오는 어떤 그 느낌? 그거에 완전히 매료됐던 것 같습니다.
기와부터 이 안에 신주, 이게 다 순금으로 그린 거거든요. 네 이게 다 순금이예요. 순금으로 아교에다 다 개가지고 한거고, 다시점을 활용했어요. 나무 위쪽으로는 올려다보는, 하늘 쪽은 올려다보는 시선. 신주는 정면으로 바라보는 시선, 월대, 박석들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 사진을 보면 내가 종묘 바깥에 있어요. 그런데 다시점으로 해놓으면 내가 종묘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예요.
카메라의 한 화각에는 다 담기 힘든 정전을 화가는 다시점으로 한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렇게 화가는 지난 5년 동안 종묘의 낮과 밤, 그리고 종묘의 사계를 열점 가까이 그렸습니다. 북치는 솜씨도 수준급인 조풍류 화가의 모친은 김순자 명창입니다. 바로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죠. 전통 기와처럼 판소리도 매번 똑같은 것 같아도 매번 다릅니다.
김봉렬 / 건축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기계는 반복할 뿐이지, 차이가 없단 말이예요. 그런데 또 차이만 있으면 어떡합니까. 할 때마다 달라지죠. 그럼 이게 통일성이 없죠. 그러니까 반복과 차이라는 거는 비슷한 거 같지만 약간의 차이들이 계속 있는데 그 차이는 뭐라 할까요? 그냥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라, 하나 할 때마다 새로운 걸 한다는 그 생각들인 거예요. 그 안에 아주 미세한 차이, 이 것이 그 예술을 만드는 거고 감정을 움직이는 거거든요.
'손은 몸 밖으로 나온 뇌'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마트폰과 A.I.에 뇌를 빌려주는 시대에 우리는 손에서 인간성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전통 기법으로 보수해 5년 만에 돌아온 한국 최고의 건축 종묘 정전이 이 시대에 전하는 메시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최공호 / 전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문화의 어떤 한 원천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게 문화유산이고요. 그 가운데서 장인의 역할은 특히나 우리가 잃어버렸던 손의 기억, 그 본능을 일깨우는 굉장히 중요한 어떤 스승과 같은 역할이라고 할 수가 있죠. 장인의 그 온몸으로 체득된 경험, 그 세계가 사라지면 우리가 무엇을 보고 어디에 기대서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가야 할까 막막해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