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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비상상황에 처해 있다면 대통령은 헌법이 정한 권력분립의 틀을 넘어서 <비상대권>을 행사할 수 있을까? 그런 대통령은 대통령이 아니라 왕에 가깝지 않을까?
우리나라 정치 얘기인가 하시겠지만, 현대민주주의 공화국의 한 모델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지금 제기되는 질문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가운데, 미국 내에선 '여기가 북한인 건가' 싶을 정도의 개인숭배와 심한 아부 행태까지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을 가리키면서 왕이나 황제를 연상시키는 말도 서슴지 않고 있는데, 이게 미국 국내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라서 걱정이다.

"트럼프 생일을 공휴일로" 정식 법안 제출
미국 연방하원의원(공화당, 뉴욕 주) 클라우디아 테니(Claudia Tenney)가 지난 2월 17일, 트럼프 대통령의 생일을 연방공휴일로 지정하자는 정식 법안을 제출했다. 6월 14일은 트럼프의 생일이자 '국기의 날(Flag Day)'이기도 한데, 이 날을 연방공휴일로 지정해 쉬자는 법안을 낸 것이다. 이 법안은 의안번호를 정식으로 부여받고 등록돼 표결을 기다리고 있다.

테니 하원의원은 자신의 X 계정에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탄신일이 법정 공휴일로 지정돼 있는 것과 같이, 트럼프의 생일도 연방 공휴일로 기려야 한다고 썼다. 트럼프가 "미국의 황금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라는 게 테니 의원이 주장하는 이유다.
테니 의원이 낸 법안이 실제로 의회를 통과해서 트럼프의 생일날 전 미국이 쉬게 될까? 미국 주요 언론들은 그런 일이 전혀 없으리라고 단언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각료 인선 등 이미 이에 못지않게 비상식적인 트럼프 정권의 조치에 대해 여야 의원들이 아무런 제동을 걸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얼굴을 러시모어 산에 새기자"
우리나라에도 대통령이나 당 대표의 성을 따서 'X비어천가'로 불리는 아첨 행위가 있지만, 일명 '천조국'이라 하는 미국의 아첨은 그 스케일이 다르다.
미국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주의 '러시모어 산(Mount Rushmore)'은 미국 역사에서 위대하다고 손꼽히는 대통령 4명의 얼굴을 거대한 암벽에 조각한 국가기념물이다.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테어도어 루스벨트, 그리고 링컨의 얼굴이 각각 18미터 크기로 새겨져 있다. 지난 1월 말, 한 연방하원의원이 이곳에 트럼프의 얼굴도 새겨 넣자는 법안을 제출했다.

안나 폴리나 루나 하원의원(플로리다 주, 공화당)은 트럼프의 뛰어난 업적과 "그가 계속 이룰 성공"을 기리기 위해 러시모어 산에 트럼프의 얼굴을 새겨 넣어야 한다고 입법 취지를 밝혔다. 트럼프 생일을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의원도 그렇지만, 이들은 트럼프가 이제 막 2기 임기를 시작했음에도 트럼프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이미 끝난 것처럼 군다.
러시모어 산에 트럼프 얼굴을 새기자는 움직임은 이게 처음이 아니다. 트럼프의 1기 임기 당시인 2019~2020년에도 추진됐다. 당시 사우스다코타 주지사는 지금 트럼프 2기 정부의 국토안보부 장관이다.
국가기념물 관리당국이 '현실적으로 한 명의 대통령을 더 넣을 공간이 없다'고 선을 그어, 러시모어 산에 트럼프의 얼굴이 새겨지는 일은 없을 전망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은 트럼프 개인숭배 시도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맞춤형 3선 개헌안
지난 1월 말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3선에 도전할 수 있도록 헌법 수정안을 내겠다는 하원의원이 나오기도 했다. 테네시주의 앤디 오글레스 의원은 그런데, 자신이 내겠다는 헌법 수정안에 흥미로운 단서를 달았다. '중간에 한번 쉰 자는 3선 출마를 허용한다. 단, 연속으로 2번 대통령을 역임한 자는 3선 출마를 불허한다'는 거다.

3선에 도전할 수 있는 전현직 대통령은 현실적으로 트럼프와 오바마 2명뿐이다. 단서를 두지 않으면 오바마가 3선에 성공할 가능성이 더 클 수 있다. 오바마는 트럼프를 위협할 정도로 인기가 높고, 나이는 훨씬 더 젊다. 트럼프 지지자들 입장에선 죽 쒀서 개 주는 일이 있어선 안된다. 그렇다고 헌법 수정안에 "트럼프는 되고 오바마는 안된다"고 특정인의 이름을 넣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온 게 이런 꼼수 수정안이다. 개헌안은 상-하원 각각 ⅔ 찬성을 필요로 하므로, 이 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하원의원이 그걸 모를 리는 없다.
하원의원들이 아부에 앞장서는 이유
아부성 법안을 내는 정치인들이 주로 하원의원이라는 사실이 시사점을 준다. 하원의원은 앞으로 도전해야 할 선거가 많다. 권한도 더 크고 임기도 더 긴 상원의원을 노려야 되고, 주지사 선거도 도전해봐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당내 경선에서 승리해 후보가 되어야 한다. 현재 공화당은 '트럼프 1극체제'가 완성되어 있다. 경선에서 뭔가 해 보려면 트럼프 강성 지지자들의 지원이 필요하다. 그러니, 중도층이 혀를 찰 아부성 행위라도 거침없이 하는 것이다. 나를 밀어 올려 달라고. 어느 나라 정치에서 많이 보던 일이다.
반면, 트럼프 개인숭배성 법안에 공개적으로 브레이크를 걸거나 개인숭배 행위를 꾸짖는 중진 정치인은 찾아볼 수 없다. 트럼프 강성지지자들에게 '찍히면'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트럼프 강성 지지자들은 트럼프의 어젠다에 따르지 않는 공화당 정치인의 좌표를 찍어 소셜미디어 공격을 퍼붓고, 때로는 실제로 신변 위협을 가하기도 한다. 다음 선거 때 경선에서 떨어뜨리겠다는 협박은 기본이다. 문제가 많거나 자격미달인 각료 지명자들의 의회 인준 과정에서 이미 벌어진 일이다.

'선 넘는' 대통령
민주공화국의 헌법은 다양한 장치를 통해 대통령의 권력을 제한한다. 그러지 않으면 왕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은 영국 왕이라는 전제군주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이며 탄생한 나라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새 국가를 이끌 지도자의 권력이 영국 왕의 그것처럼 커지지 않도록 고민하며 견제와 균형의 장치를 만들었다.
트럼프는 대통령인 자신의 권력에 가해진 견제장치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헌법이 허용하지 않는 '3선'을 자꾸만 건드리는 것에서도 볼 수 있듯,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함에 있어서도 법이 정한 틀을 넘어서려는 경향을 보인다. 트럼프는 자신이 국가의 CEO이므로, 민간기업의 CEO가 자신의 회사에 대해서 하는 것처럼 국가의 일에 대해 전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론 머스크를 내세워 일부 정부부처나 기관을 사실상 폐지하는 일이 그렇다. 트럼프의 명을 받아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이른바 '정부효율부'는 사실 정식 정부부처가 아니다. 설치 근거 법이 없다. 약칭인 '도지(DOGE)' 또한 정식 명칭이 아니다. 법적인 신분도 모호한 DOGE 소속 인원들은 정부 각 부처를 협박하다시피 해서 인사자료나 자금출납 기록, 전산시스템 관리자권한을 넘겨받아 구조조정을 진행한다. 의회가 지출을 의결한 항목에 대해서도 자의적 판단으로 지출을 막아버린다.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대통령이 허락했다"는 것인데, 그런 대통령의 허락마저도 헌법이 보장한 의회의 권능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왕 만세!...스스로 올린 게시물
급기야 트럼프는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기에 이르렀다. 뉴욕주가 맨해튼 중심부로 진입하는 차량에 혼잡통행료를 부과하려던 계획을 연방 대통령으로서 취소시킨 뒤,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인 '트루스 소셜'에 이런 문장을 올렸다.
"혼잡통행료는 이제 죽었고, 맨해튼과 모든 뉴욕이 구원을 받았다. 왕 만세"
백악관 공식 X계정은 한술 더 떴다. "왕 만세!"라는 트럼프의 포스팅을 인용하는 동시에, 왕관 쓴 트럼프의 모습에 "왕 만세!"라는 문구를 적어 타임 지 표지처럼 만든 이미지를 업로드한 것이다.

트럼프가 자신을 '공화국의 대통령' 이상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징후는 또 다른 소셜 게시물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지난 15일 '트루스 소셜'에 트럼프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하는 일은 불법이 될 수 없다("He who saves his Country does not violate any Law)"고 썼다.
'나라가 너무 심하게 망가져 있고, 세계가 미국을 너무나 오래 벗겨먹었기 때문에 그런 문제들을 고치려고 애쓰다 보면 무리가 발생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게 불법이 될 순 없다'는 생각을 담은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법이 정한 절차와 한계를 따라서 해야 한다는 것이 민주공화정의 기본 원칙이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하는 일은 불법이 될 수 없다"는 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이 했던 말이다. 트럼프가 스스로를 황제적 존재로 생각하는 것 아니냐는 수군거림이 일었다.
트럼프는 로마 황제?
지난달 열린 CPAC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 최대의 보수우파 정치행사로 꼽힌다. 여기에 일부 트럼프 지지자들이 트럼프를 카이사르에 빗대는 이미지를 들고 참석했다.
카이사르(일명 '시저')는 이탈리아 반도 밖으로 로마의 강역을 넓힌 정복자였지만,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이었다. 집정관은 원로원의 뜻을 받아 집행하는 자리였고, (현대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독재자가 될 수 없도록 다양한 견제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카이사르는 넓어진 로마를 효율적으로 다스리는 데에 그러한 공화정 체제가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다고 생각해, 새로운 체제 - 즉 '제정'으로의 전환을 추진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공화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고, 그의 양아들이 로마의 첫 황제가 되어 제국시대를 연다.)

트럼프를 카이사르에 비유한 지지자들의 모임 이름은 '3선 프로젝트'다. 트럼프 3선은 단지 횟수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제정시대'의 서막이 되어야 한다는 취지를 시사한 것이다. 실제로 이들의 모토는 "2028년과 그 이후를 위해서"다.
트럼프가 나라 밖 문제를 다루는 방식도 과거 제국주의 열강들의 황제가 했던 방식과 유사하다. 모든 국가는 크든 작든 국제법적으로 같은 권리를 지니며 국경을 무력으로 침범당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무시한다. 트럼프와 마주 앉아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논의할 수 있는 상대는 결국 같은 레벨의 제국을 이끄는 러시아의 푸틴뿐이다.
지난 주말 백악관에서 열린 미국-우크라이나 정상회담은 트럼프 '황제'시대의 외교가 어떤 양상으로 벌어지는지를 TV 화면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어떤 나라도 우크라이나의 처지가 될 수 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