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글로벌 시장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K-드라마의 양대 장르는 로맨스와 디스토피아물이다. 이중 K-디스토피아는, 한류 열풍 초기부터 꾸준히 사랑받아 온 K-로맨스와 달리 몇 년 사이 급부상했다. 영화 <부산행>(2016),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2019) 등 서구의 아포칼립스물을 한국적 환경으로 옮겨온 작품들이 잇단 성공을 거두며 주목받기 시작한 K-디스토피아는, <오징어게임>(2020, 넷플릭스)의 흥행 이후 자본주의 사회 하에서의 암울한 세계관을 그린 작품들까지 포함하면서 더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조선시대 좀비, 전래놀이의 데스게임화 같이 장르적 관습의 신선한 변주, 지구적 현상인 사회 불평등 심화에 관한 문제의식 등이 이 장르의 핵심 호평 요인으로 분석된다. 드라마 <해피니스>(2021, tvN), <지옥>(2021, 넷플릭스), <지금 우리 학교는>(2022, 넷플릭스), <택배기사>(2023, 넷플릭스), 영화 <사냥의 시간>(2020),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 등이 대표적 사례다.
넷플릭스가 4월 26일, 또 한 편의 디스토피아물을 선보였다. 소행성과의 충돌을 앞둔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12부작 드라마 <종말의 바보>가 그것이다. 일본 작가 이사카 코타로의 동명 원작을 극화한 이 작품은 색다른 K-디스토피아를 제시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원작이 생존 투쟁, 재난 극복 등 아포칼립스 장르물의 전형적 서사를 벗어나 죽음을 수용한 이들의 담담한 일상을 그려 호평받은 바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계의 두 대가인 정성주 작가(<아줌마>, <밀회>, <풍문으로 들었소> 등)와 김진민 감독(<개와 늑대의 시간>, <인간수업>, <마이 네임> 등)이 의기투합한 점도 신뢰도를 높였다.
하지만 기대 속에 뚜껑을 열어 본 결과, 성적표는 그리 좋지 않다. 시청 시간과 평점 기록 모두 넷플릭스 역대 한국 오리지널 드라마 중 최저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주연 배우의 출연 분량을 덜어내느라 편집이 부자연스러워진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각색 문제가 완성도 저하의 근본적 원인으로 보인다.
드라마는 8개 단편으로 구성된 원작을 시리즈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인 교사 세경(안은진)이 아동 인신매매 범죄로부터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핵심 플롯의 하나로 내세웠다.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었겠지만, 범죄스릴러 성격이 부각됨에 따라 원작의 차별적 매력이 희미해진 결과가 못내 아쉽다.
그럼에도 <종말의 바보>를 단지 실패작으로만 규정하기에는 아까운 지점들이 있다. 적어도 이 작품이 K-디스토피아물의 서사적 지평을 확대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돌이켜보면, K-디스토피아의 등장 배경에는 2010년대 초중반 유행한 '헬조선'의 정서가 자리한다. 만연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분노와 절망의 '헬조선' 정서가 K-디스토피아를 탄생시켰고, 여기에 '코로나 디바이드'라는 신조어가 생길 만큼 양극화를 심화시킨 팬데믹이 겹쳐지면서 '헬지구' 정서로 확대된 것이다.
이처럼 K-디스토피아를 관통하는 갈등 구도, 즉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적 서사는 글로벌 시장에서 호평받는 요인으로 작용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반복에 따른 도식화의 우려도 따랐다. 이런 와중에 <종말의 바보>는 '헬조선'의 절망과 분노가 아니라 역설적인 희망과 위로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주목받을 만하다.
드라마는 소행성과의 충돌이 확실시되는 한반도에서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그로 인한 대규모 소요가 지나간 뒤의 이야기를 그린다. 중심 배경인 소도시 웅천에서는 소요 당시 아동 집단 납치 살해 사건이 일어나 더욱 큰 충격에 휩싸였다. <종말의 바보>는 이 잔혹한 재난에서 살아남은 시민들이 멸망의 공포와 지독한 상실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로 의지하고 연대하며 최후를 준비하는 모습을 그려나간다.
납치 사건으로 학생 대부분을 잃은 세경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도 남은 아이들을 끝까지 지키고, 아들을 떠나보낸 미령(김여진)은 마트를 꿋꿋이 운영하면서 시민들에게 필수품을 제공해 준다. 주임 신부가 사라진 뒤 웅천시 유일의 사제가 된 성재(전성우)는 불안해하는 신도들을 보살피고, 군인인 인아(김윤혜)는 무너진 치안 시스템을 지키려 애쓴다. 한쪽에서는 아동들을 납치해 팔아넘기는 범죄가 판을 치지만,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이타적 정신을 발휘하는 이들이 있기에 웅천시의 마지막 나날들은 오히려 아름답게 그려진다.
<종말의 바보> 속 웅천시민들의 모습은 세계적인 작가 레베카 솔닛의 저서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 나오는 재난 공동체를 연상시킨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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