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 끝에 베냐민 네타냐후 정부가 이른바 '사법 정비'라는 이름으로 추진해 온 사법부 무력화 입법이 일시 중단됐습니다.
네타냐후 총리는 27일(현지시간) 야권과 대화를 위해 크네세트(의회)의 다음 회기까지 사법정비 입법을 연기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5월 초에 시작되는 의회의 다음 회기까지 한 달여간 야권과 협상을 통해 합의점을 찾겠다는 계획입니다.
그러나 핵심 법안에 대한 여야의 입장차가 커 합의는 쉽지 않을 전망입니다.
'사법 정비' 입법은 현행법상 의회의 모든 입법행위와 정부의 명령, 행정행위 등을 무력화하거나 되돌릴 수 있는 대법원의 '사법 심사권'에 대한 극우 및 정통파 유대교 기반 정치인들의 해묵은 반발에서 시작됐습니다.
이들은 최고 법원인 대법원의 반대로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에서의 정착촌 확장, 정통파 유대교도 커뮤니티의 자치권 확대 등이 좌절되는 상황을 경험했습니다.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약진, 재집권을 노리는 네타냐후의 지지 세력으로 부상한 이들은 연정의 주요 정책에 최고법원인 대법원의 권한 약화를 명기했습니다.
극우 및 정통파 유대교 정당의 지지를 등에 업고 출범한 네타냐후 연정의 야리브 레빈 법무부 장관은 연초 이를 현실화하기 위한 일련의 법안을 마련해 공개했습니다.
법안은 이스라엘의 연성헌법인 '기본법'에 반하는 의회의 입법을 대법원이 사법심사를 통해 막지 못하도록 하고, 여당이 법관 인사를 담당하는 법관 선정 위원회를 조종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레빈 장관은 이에 더해 부패 혐의로 재판받는 네타냐후 총리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도록 총리 직무 적합성 평가 사유와 주체를 제한하는 법안, 범죄 전력 때문에 취임 한 달도 못 돼 낙마한 네타냐후의 연정 파트너인 아리예 데리 샤스당 대표를 복귀시키기 위한 꼼수 법안도 추가했습니다.
사법개혁의 논리는 공무원인 판사들이 국민에 의해 선출된 권력보다 우위에 있어 불합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입법부와 사법부의 견제와 균형을 깨는 사법 정비 입법을 '쿠데타'로 규정한 야권과 시민단체, 법조계는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연정은 크네세트(의회) 과반 의석(120석 중 64석)을 앞세워 중요 법안의 입법 절차를 일사천리로 진행했습니다.
중동 유일의 민주주의 시스템 마비를 우려한 시민들은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처음엔 수천 명에 불과했던 반정부 시위대는 입법 절차가 진행될수록 규모가 커졌고, 지난 11일 열린 10번째 주말 집회에는 50만 명이 참여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민주화 시위로 기록됐습니다.
시민들의 저항에는 작가와 예술가 단체, 정보기술(IT) 분야 노동자 등이 선도적으로 동참했고 이어 공군 조종사들을 필두로 예비역 군인들이 가세했습니다.
이스라엘군 전력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는 예비군들의 저항은 심각한 안보 위기론을 조성했고, 요아브 갈란트 국방부 장관의 공개적인 입법 중단 촉구 선언으로 이어졌습니다.
또 네타냐후 총리가 입법 중단을 선언한 27일에는 이스라엘 최대 노동단체인 히스트라두트(이스라엘 노동자 총연맹)가 총파업 선언을 하면서, 공항과 의료시설, 쇼핑몰 등은 물론 해외 주재 대사관들까지 파업에 동참하는 극히 이례적인 상황이 연출됐습니다.
이런 시민들의 총력 저항에 네타냐후 총리가 한 발짝 물러선 겁니다.
그러나 연정 내 극우 세력과 유대교 기반 정당들은 입법활동에 제약을 가할 수 있는 대법원의 기능을 축소 또는 무력화해야 한다는 법안의 핵심 내용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라 갈등은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연정 내 대표적인 극우성향 정치인인 벤-그비르 국가안보장관은 한때 사법정비 입법이 중단될 경우 연정에서 탈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현지 언론 보도도 있었습니다.
반면, 야권은 사법정비 입법을 보류할 것이 아니라 아예 법안을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