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농수로에서 취재진이 발견한 고라니만 지난해 봄부터 최근까지 20여 마리나 된다. 주민들은 농수로에 고라니 추락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고 몇십 년 전부터 반복되는 일상이라고 말했다. 농작물에 피해를 준다는 생각에 농민들에게 고라니는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퇴치할 동물이다 보니 수없이 농수로에 빠져 피해를 입어도 무시당할 뿐이다.
취재진이 이 고라니를 목격한 지 3주 만의 일이다. 농수로 벽을 뛰어넘으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나오지 못한 채 죽은 것이다. 농수로 안에는 탈출로가 없어서 스스로 벽을 뛰어넘어 빠져나오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방법이 없다. 다행히 나머지 1마리는 야생동물구조센터에 의해 안전하게 생포돼 야생으로 돌아갔다.
최근 5년간 야생동물 탈출로 설치 자료를 보면 2012년에 158개, 2013년 975개, 2014년 658개, 2015년 234개, 2016년 597개에 이른다. 탈출로 1개당 간격이 150~200미터라고 하니까 탈출로가 설치된 농수로 길이는 524km에 불과하다.
농수로에 야생동물 탈출로가 설치된 것은 2008년 농업생산기반정비사업계획 설계기준 친환경편이 만들어지면서 부터다. 1980년대 들어서 콘크리트 농수로가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감안하면 대부분의 농수로에 탈출로가 있을 리가 거의 없다.
농축산식품부와 농어촌공사가 만든 친환경 설계기준에는 탈출로에 관한 규정이 있다. 하지만 세부규정은 없고 “콘크리트로 된 뚜껑 없는 수로로 계획할 때에는 수로에 들어간 양서류, 작은 동물 등이 빠져나올 수 있는 탈출로 등을 계획 한다”고만 돼있다.
그런데 탈출로가 설치된 곳은 찻길 옆이나 마을 골목길과 진입로로 연결되는 도로였다. 산과 들로 이어져 야생동물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곳과는 거리가 먼 엉뚱한 장소다. 농수로에 빠졌던 야생동물이 탈출로를 이용해 나오면 곧바로 로드킬 당할 위험에 놓이게 된다.
돈 들여 설치해 야생동물을 위험에 빠뜨리게 하는 시설로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것이다. 그런데도 농어촌공사 충남지역본부는 생태계 보전시설로 탈출로를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환경이란 이름을 붙이기에 부끄럽지 않은지 묻고 싶다.
고라니 추락사고가 빈발하고 있는 예산군 오가면 일대 농수로는 여전히 위험에 방치돼 있다. 산과 붙어 있는 농수로 주변에 울타리를 치거나 탈출로를 만들어주면 될 일인데 농어촌공사는 여전히 눈을 감고 나 몰라라 하고 있다.
친환경 설계기준을 도입한 뒤에도 농수로를 새로 만들거나 기존 농수로를 보수공사 할 때에만 탈출로를 만들고 있다. 대부분 30년 이상돼 야생동물을 위협하는 대형농수로는 손도 대지 않고 있다. 높은 콘크리트 벽을 뚫어 일정한 간격으로 길을 터주면 된다. 벽을 허물기 어려우면 야생동물이 밟고 올라갈 계단을 만들어줘도 된다.
얼마나 더 많은 고라니 등 야생동물이 농수로에 갇혀 발버둥치고 죽어가야 농축산식품부와 농어촌공사는 농수로의 생태와 환경에 눈을 뜰 것인가? 야생동물의 절규에 귀를 닫는 것은 비겁한 오만이고 직무유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