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게 좋은 거지 주역 무용수를 하려고 발레를 하는 게 아니잖아요. 초심으로 돌아가 무대 자체를 즐기게 되니 기대하지 않았던 수석무용수 자리를 주더라고요." 독일 드레스덴 젬퍼오퍼 발레단(Dresden Semperoper Ballet) 입단 6년 만에 수석무용수로 승급한 발레리나 이상은(30)은 '자신과의 싸움'의 장이던 무대가 이제는 즐겁다면서 웃었다.
이상은은 선화예고를 졸업하고 2007년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해 활동하던 시절부터 키 181㎝의 '장신 무용수'로 국내 발레 팬들에게 잘 알려졌다.
여성 무용수로서는 드물게 큰 키라 핸디캡이 될 수도 있는 조건이다.
하지만 그는 타고난 긴 팔과 다리로 빚어내는 아름다운 선, 고난도의 동작도 수월해 보이게끔 소화해내는 깔끔한 테크닉, 완벽한 밸런스와 섬세한 표현력으로 고전과 현대 장르를 넘나들며 역량을 발휘해 왔다.
2005년 서울 국제무용콩쿠르 그랑프리 수상, 2008년 바르나 국제발레콩쿠르 시니어 부문 동상 등으로 실력을 검증받고 발레단에서도 솔리스트로 활약하던 그는 2010년 7월 드레스덴 젬퍼오퍼 발레단으로 둥지를 옮겼다.
배역이나 파트너 선택의 폭이 아무래도 국내보다는 넓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클래식 발레부터 개성있는 현대 작품까지 다양한 레퍼토리를 함께 선보이는 젬퍼오퍼 발레단은 이상은에게 이상적인 활동 무대였다.
입단 1년 만에 코르드발레(군무) 단원으로는 이례적으로 '라바야데르'의 주역 중 하나인 '감자티' 역을 맡아 일찌감치 주목받았고 입단 3년 만인 2013년 7월 제1 솔리스트로 승급했다.
그리고 다시 3년 뒤인 올해 제1 주역 솔리스트 단계를 뛰어넘어 수석무용수로 올라섰다.
오프 시즌을 맞아 한국을 찾은 이상은은 10일 왕십리의 한 카페에서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사실 작년에 승급이 안 돼 올해는 마음을 좀 내려놓았는데 예상치 못하게 수석무용수가 돼서 놀랐다"고 말했다.
젬퍼오퍼 발레단의 유일한 한국인 단원인 그는 지난해 '백조의 호수'에서 주역으로 데뷔하고 프랑스 파리 등 숱한 투어 공연을 성공적으로 소화했다.
그래서 은근히 승급을 기대했는데 불발되자 다소 의기소침해 하기도 했다.
하지만 '타이틀'보다는 무대에 서는 즐거움에 집중하자고 마음을 다잡았고 마음껏 즐겼던 2015∼2016시즌의 막바지인 지난 6월 단장과의 면담에서 수석무용수 승급 소식을 들었다.
"주역 무용수가 되겠다고 발레를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저 춤추고 무대에 서는 것이 좋으니 초심으로 돌아가 내 자리에서 열심히 하자고 마음먹었는데 그런 모습이 좋게 보였는지 아이러니하게도 승급이 되더라고요." 다가오는 새 시즌에도 이상은은 젬퍼오퍼 발레단이 선보이는 12개 작품 가운데 대부분에 출연한다.
애런 S.
왓킨 예술감독이 새로 안무해 초연하는 '돈키호테'에서 '둘시네아'를 연기하고 '백조의 호수' 무대에도 다시 선다.
또 지난 시즌에 초연한 '카우'와 북유럽 안무가들과의 작업인 '노르딕 라이트' 등 현대 작품까지 숨 가쁘게 달린다.
낯선 타국에서 지내며 연습과 공연으로 꽉 채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이상은은 갈수록 무대가 즐겁다고 했다.
경험을 쌓아가면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게 재미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무대가 나 자신과 싸우는 곳처럼 여겨졌고 테크닉 부분에 더 신경을 많이 썼어요. 그런데 무대 경험이 늘어나니 극을 어떻게 끌어갈지를 배우게 되더라고요. 테크닉에 치중하기보다는 작품 자체에 집중해서 큰 그림을 보게 됐다고나 할까요." 이상은은 특히 창작발레의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윌리엄 포사이스 등 명 안무가들과 교감하면서 새로운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는 작업이 힘겹지만 더할 나위 없이 즐겁다고 했다.
"젬퍼오퍼 발레단에서는 무용수들의 개성과 의견을 중시해요. 초연작을 준비하면서도 무용수들이 안무를 수동적으로 따르기보다 각자 움직임은 물론 작품 전체에 대해 구체적인 생각을 내놓기를 바라죠. 제 견해가 반영돼 작품으로 완성돼가는 과정이 참 재미있어요." 오는 12∼13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서울국제무용콩쿠르 입상자 출신들이 펼치는 '2016 월드갈라' 공연에서 선보이는 작품도 이런 작업의 결과물들이다.
이상은은 같은 발레단 소속의 크리스티안 바우흐와 함께 윌리엄 포사이스 안무의 '슬링어랜드'를 한국에 처음 선보이고 역시 동료단원인 크레이그 데이비슨이 이번 무대를 위해 안무해 준 '추억'을 세계 초연한다.
"'슬링어랜드'는 파리 투어 때 호펑을 받은 작품인데 어떤 스토리가 있기보다는 무용수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즉흥적인 부분이 많아요. '추억'은 지난 사랑을 회상하는 내용이고요. 둘 다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종류의 작품이고 독일에서 얼마나 발전했는지 보여드릴 수 있는 무대라 기대가 큽니다." 국내파로 발레 본고장 유럽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그에게 후배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하자 적극적이고 열린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연합뉴스)
발레리나 이상은 "이제는 무대가 즐거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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