땔나무를 하러 마을 뒤로 올라갔던 17살 김종수 군은 폭발음과 함께 땅바닥에 쓰러졌다.
소달구지를 몰고 함께 따라왔던 친구들은 폭발음에 놀라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늘 나무를 하러 다니고 토끼사냥을 하던 곳에서 갑자기 사고가 나자 친구들은 또 다른 폭발사고로 이어질까 공포에 휩싸였다.
다리에 피가 흐르자 인근에 있던 친형이 속옷 상의를 벗어서 응급 처치를 해줬다.
그는 인제의 한 병원으로 옮겨져 오른쪽 다리 복숭아뼈 위쪽을 잘라야 했다.
오른쪽 다리를 앗아간 것은 폭풍지뢰로 불리는 발목지뢰였다.
사고는 1976년 11월 30일 중동부 전선 최전방지역인 강원 양구군 해안면 현3리 마을 뒤에서 일어났다.
당시는 산이었지만 지금은 농경지로 변했다.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만 나온 김 군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일 년에 쌀 몇 가마니를 받는 조건으로 양봉하는 사람을 따라다니다 열악한 처우에 도망을 와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사고가 난 곳은 해마다 토끼를 잡거나 나무를 하던 곳"이라며 "지뢰매설 표시나 출입통제 조치조차 전혀 없었던 곳에서 지뢰가 터질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김 군은 사고 후 집에서 1년 정도 요양하다 농촌에서 다친 다리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어 서울로 올라와 구두공장에서 구두를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40년이 지난 오늘날 서울 시내에서 구두 수선일을 하며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가는 김 씨에게 남은 것은 빚밖에 없다.
그동안 자녀를 키우면서 한 번 교체하는 데 300만원이나 하는 의족 구입비도 스스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지뢰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시행돼 기대를 걸었던 김 씨는 그해 9월 국방부로부터 위로금이 3천600여만 원에 불과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동안 쏟아부은 치료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국방부가 사고 당시의 우리나라 월평균 임금(4만8천원)을 기준으로 위로금을 계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씨는 지뢰피해자지원법이 사망자는 사망한 때의 월평균 임금을 기준으로 위로금을 적용하지만, 상이자까지 이 규정을 적용한 것을 잘못이라고 봤다.
상이 피해자에 대해서는 월 평균임금을 기준으로 위로금을 지급한다고 규정하고 있을 뿐 사고가 발생한 때의 월평균 임금인지, 위로금 지급 결정 당시의 월평균 임금인지 등 기준시점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김 씨는 오는 29일 국방부지뢰피해자지원단을 상대로 이번 결정을 취소하고 제대로 다시 결정해달라는 취지의 위로금 지급 결정 취소 소장을 서울행정법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민간인 지뢰 피해자 중 위로금 지급 결정을 통보받고 취소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김 씨가 처음이다.
김 씨의 소송 인지대는 그와 같은 처지의 지뢰 피해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보탰다.
김 씨는 "정부가 지뢰 피해자를 인정하는 것이라면 합당한 보상을 해줘야 하는데 통보받은 위로금은 치료비조차 되지 않는다"면서 "보상을 해주기로 했으면 공평하게, 억울한 사람이 없게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지뢰피해자 지원법이 민간인 지뢰피해자가 수십 년간 당한 고통을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지난해 국회 앞에서 2달 동안 법 개정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연합뉴스)
"40년 지뢰 피해 고통이 3천600만 원?…다시 결정하라"
김종수(57) 씨 지뢰 폭발 사고로 오른쪽 다리 절단 <br>지뢰피해자 지원법 제정 이후 첫 '위로금 지급' 취소 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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