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자판이 범인이었다.
올해 초 한 대학병원에서 VRE(Vancomycin Resistant Enterococcus)가 여러 환자에게서 검출됐습니다. VRE는 '반코마이신'이라는 강력한 항생제에도 견뎌내는 대표적인 다제내성세균입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병을 잘 일으키지 않지만 면역력이 약한 사람에게는 요로감염이나 호흡기 감염, 뇌수막염까지 일으킵니다. 그런데 해당병원의 감염관리팀이 조사했더니 이 VRE의 근원지는 바로 컴퓨터 자판이었습니다.
2011년, 이탈리아 시에나 의과대학에서도 30개의 컴퓨터 자판을 수거해 균을 배양해 봤습니다. 공공 장소에 있는 자판은 물론 집에 있는 개인 컴퓨터의 자판을 모두 포함시켜 검사했습니다. 그리고 개인 컴퓨터는 컴퓨터 작업 중 먹는 습관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것을 따로 분리해서 검사했습니다. 그 결과 공기 중에 있는 포도상 구균이나 연쇄상 구균, 그리고 사람 피부에 상주하는 균들이 컴퓨터 자판에서 배양됐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장 속에 살다가 변을 통해 옮겨지는 장구균도 배양됐습니다. 그런데 배양된 세균의 양이 연구진을 놀라게 했습니다. 여러 세균이 한군데 모여있는 모양을 군집이라고 하는데 세균의 수는 이 군집 단위로 헤아립니다. 이걸 CFU(colony forming unit)이라고 합니다. 연구팀은 자판에 있는 키 하나에 세균이 얼마나 있는지를 조사했는데, 키 하나에 최고 430 CFU의 세균이 배양됐습니다.
2011년 서울대학교 생명공학부 조사 결과를 보면 변기에서 제곱센티미터당 5.4 CFU의 세균이 배양됐고, 또 다른 연구에서는 제곱미터당 9.2 CFU의 세균이 배양됐습니다. 이런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보면, 컴퓨터 자판에 변기보다 최고 50배 정도 많은 세균이 사는 셈입니다. 이탈리아 연구에서는 이전 오스트레일리아의 연구와는 달리 공통 컴퓨터 자판은 물론 개인 컴퓨터 자판에서도 많은 세균이 검출됐고, 특히 컴퓨터 작업 중 먹는 습관이 있는 사람의 자판에서는 포도상 구균이 더 많이 배양됐습니다. 음식물 부스러기는 더 많은 세균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욕실 안에 있는 물건들과 변기
가정에서 전통적인 세균의 근원지로 꼽히는 곳은 욕실입니다. 욕실에는 화장실 변기가 있고, 변기 옆에 세면대가 있고, 세면대 위에 치솔과 면도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욕실에는 세균이 살기 적당한 습기도 있습니다. 화장실에 있는 물건들에 어떤 균이 살고 있는지 강동성심병원 진단검사의학과 김재석 교수에게 의뢰했습니다. 김교수는 치솔, 면도기, 화장실 문고리 그리고 화장실에 놓아 둔 책을 수거해 세균 배양을 실시했습니다. 포도상 구균, 연쇄상 구균 등 일반 생활 환경에 있는 균들이 배양됐습니다. 이건 예상했던 일입니다. 그런데 화장실에 무심코 놓아 둔 책에서는 뜻밖에 장구균이 배양됐습니다. 장구균은 사람의 장에서 사는 세균입니다.

도대체 장구균이 어떻게 화장실에 놓아둔 책에 옮겨졌을까요? 먼저 씻지 않은 사람의 손을 통해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손을 잘 씻었을 경우라도 다른 가능성이 남아있습니다. 영국 리즈 의과대학이 실험했는데, 변기에서 물을 내릴 때 세균이 들어있는 작은 물방울이 바닥에서 1m 높이까지 올라가 90분 동안 공기 중을 떠돌았습니다. 그러다가 균이 치솔이나 면도기, 화장실 문고리에 달라 붙게 됩니다. 실제로 영국 질병관리본부에는 치솔 사용으로 노로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례가 보고되어 있습니다. 노로 바이러스는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겨울철에 집단 식중독을 일으키는데, 음식 조리자가 손을 씻지 않는 것이 원인입니다. 하지만 치솔의 이 닦는 부분은 손으로 잘 만지는 부분이 아닙니다. 이를 감안하면, 치솔을 통한 노로바이러스 감염은 씻지 않은 손에 의한 감염 가능성보다는 변기 물 내릴 때 퍼져나간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물방울 때문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개인위생, 습관이 중요
2009년, 새롭게 나타난 신종플루라는 독감 바이러스가 세상을 공포에 휩싸이게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이 희생됐고, 신종플루를 치료할 수 있는 약을 확보하기 위해, 질병관리본부장이 유럽에 직접 다녀 오기도 했습니다. 그와 더불어 손씻기 열풍도 생겨났습니다. 감염병 전문가들은 손만 잘 씻어도 감염병의 70%정도를 예방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종플루 탓에 생겨난 손씻기 열풍은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해에는 유행성 눈병이 예전보다 현저히 줄었고, 이듬해 봄에는 파죽지세로 치솟던 A형간염도 그 증가세가 꺽였습니다. 질병관리본부는 이런 현상을 신종플루 덕에 손씻는 습관이 보편화 됐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이제는 컴퓨터 자판을 쓰기 전후에 손을 씻는 것과, 변기 물을 내릴 때 뚜껑을 닫는 것도 습관으로 길러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