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발효가 코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화장품, 제약, 의료기기 업계는 득과 실을 따지느라 분주하다. 하지만, 한·미 FTA 체결 때처럼 부정적 분석이 압도적이지 않은 게 당시와 조금 다른 점이다.
이는 화장품이나 제약, 의료기기 분야의 특성상 원천기술을 다량으로 보유한 미국과 유럽 제품에 대한 의존도가 워낙 높아 유럽계 다국적기업의 파상공세를 어느 정도 예상했던 데다 한·미 FTA 체결 당시 한·EU FTA 타결에 대한 대응책도 함께 검토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또 나름대로 국내 업체의 경쟁력 향상에 따른 자신감도 작용하고 있다.
◇화장품 업계에 가장 큰 타격 전망 = "한·EU FTA 발효로 관세장벽이 낮아지면서 세포라, 더글러스, 마리오노 등 유럽의 3대 화장품 유통채널이 한국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28일 국내 화장품업계에 따르면 7월 한·EU FTA가 발효되면 현재 국내업체들이 장악하고 있는 화장품 유통채널에 점진적인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베이비파우더, 애프터셰이빙로션, 탈모제 등은 즉시 관세가 철폐되고 향수, 립스틱, 샴푸 등은 3년 내, 전체 화장품 수입 규모의 45%를 차지하는 기초화장품과 페이스파우더, 헤어린스 등은 5년 내에 시장이 개방된다.
LG생활건강의 조영한 뷰티유통기획부문장은 "세포라, 더글러스, 마리오노 등이 한국진출을 위해 시장조사를 지속적으로 진행해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동안 관세 등의 문제로 진출하지 못했지만 이런 요소가 없어졌기 때문에 진출할 여지가 많아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세포라는 프랑스 명품기업인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의 화장품 유통체인이며, 더글러스는 독일 기업 더글러스 홀딩 에이지(Douglas Holding AG)가 운영하는 화장품 소매점이다. 또 마리오노는 프랑스의 화장품 유통체인으로 홍콩 왓슨에 합병됐으며 이들 기업은 유럽에만 각각 800여개에서 1천여개의 매장을 보유하고 있다.
조 부문장은 "국내 화장품산업의 최고 영업이익률이 10∼15%"라며 "이에 상당하는 6.5% 수준의 관세가 철폐되면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관세 철폐가 점진적으로 이뤄지는 데다 국내 브랜드의 점유율이 높은 상황이어서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도 내놓고 있다.
현재 백화점 채널에서 설화수가 단일 브랜드로 부동의 매출액 1위를 수년째 지키고 있다. 중저가 시장에서도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 등 대기업뿐 아니라 에이블씨앤씨와 태성산업 등 중소기업이 골고루 전국 주요 상권에 로드숍 매장을 보유하고 있다.
이미 포화상태라고 할 만큼 촘촘하게 유통채널이 갖춰진 상태에서 틈새시장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아모레퍼시픽 임두현 글로벌협력팀장은 "이번 FTA에는 비과세장벽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며 "이미 국산 화장품에 대한 한국 소비자들의 신뢰도가 높아져 있어 국내 기업들이 브랜드 경쟁력을 강화한다면 FTA에 따른 영향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의약품 허가-특허 연계제도'가 관건 = 기획재정부의 분석 결과를 보면 의약품산업의 대 EU 수출은 5년 연평균 1천100만달러가 증가하는 반면 수입은 3천700만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무역수지 적자 증대분은 연평균 2천600만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이 때문에 제약업계는 한ㆍ미 FTA에 들어 있는 '의약품 허가-특허 연계제도'가 EU에는 어떻게 적용될지에 주목하면서, 후속조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허가-특허 연계제도는 제약사가 국내에서 제네릭 의약품 허가 신청을 낼 때 특허권자에 신청 사실을 통보하고, 특허권자가 이의를 제기하면 특허쟁송이 해결될 때까지 허가를 금지하는 제도다. 허가-특허 연계제도가 도입되면 국내 제네릭 개발은 기존보다 기간이 길어지고 비용이 많이 들면서 인허가 과정도 어려워질 전망이다.
이로 인해 오리지널 제품의 사용 증가, 제네릭 가격 상승 등으로 환자의 부담이 늘고 제네릭에 치중하고 있는 국내 제약사의 경영 악화는 불을 보듯 뻔해질 것이라는 게 업계의 한목소리다.
다만, 한·EU FTA 내 의약품 분야는 대체로 한·미 FTA와 유사한 수준에서 합의됐지만 의약품 허가-특허 연계제도에 따른 이행 의무기한에 대해서는 별도로 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제약업계에서는 값싼 제네릭 의약품을 많이 만드는 국내 제약업체의 특성을 고려해 의무 이행기간 등에 대한 후속조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업계는 또한 제약산업이 지적재산권 자료보호기간 등으로 피해를 보는 산업에 속하는 만큼 이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관련 제도의 정비에도 힘써달라고 주문했다.
제약협회 관계자는 "국내 제약업계는 EU, 미국, 일본 등 제약 선진국과 경쟁할 수 있는 기술력과 제품력을 갖추기 위해 연구개발 투자비를 6.5%에서 10%까지 늘려가고 있고, 우수의약품 제조관리기준(GMP) 선진화에 2006년부터 약 3조원을 투입했다"면서 "이런 자구노력이 성과를 거두려면 세제 지원과 유연한 약가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면 다국적제약업계는 이번 한ㆍEU FTA를 통해 우리나라 산업에 건전한 경쟁구조가 도입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며 반기고 있다.
이규황 다국적의약산업협회 부회장은 "한ㆍEU FTA로 제약산업에 경쟁구조가 도입되면 신약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R&D)에 더 많은 투자와 인력 보강이 이뤄지고, 결국 국제경쟁력이 높아질 것"이라며 "한-EU FTA를 무역수지 문제로 보기보다는 제약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 요인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턱없이 부족한 정부 지원금 = 한ㆍEU FTA 발효 이후 가장 큰 타격이 예상되는 국내 화장품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정부는 융합기술 및 미래유망 제품, 용기 개발 등 R&D 분야에 올해 처음으로 69억원의 자금을 지원한다.
또 정부는 지난해 해외시장 개척 정보를 제공하는 종합지원센터를 설립한 데 이어, 국가별 피부색과 선호 색상 등에 관한 정보를 축적하는 피부정보은행 설립도 진행 중이다.
의료기기 분야와 관련해서는 정부가 향후 5년간 재활보조기구, 융합의료기구 개발과 임상시험센터 등 지원에 700억원을 투입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13개 품목의 유망 의료기기와 12개 품목의 치료재료 개발에 올해부터 예산을 지원한다.
또 정부는 국산 의료기기의 신뢰성 평가 기반 마련을 위한 예산 10억원을 편성해 이 업무를 담당할 연구기관 선정에 나섰다.
한·EU FTA 체결로 피부 미용기기가 대 EU 수출에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긍정적 분석도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보고서를 보면 평균 5.7%에 달하는 50대 품목의 EU 수입관세율이 FTA로 철폐되면 피부미용기기와 정형외과용 의료보호대 등을 중심으로 가격경쟁력이 높아져 한국산 점유율을 높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업계는 매년 수천억원이 투입되는 의약품산업 지원에 비해 의료기기 분야에 대한 정부 지원 규모가 너무 작다면서, 지원 확대가 이뤄지지 않으면 그렇지 않아도 열세인 국내 의료기기산업이 더욱 위축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의료기기 업체의 한 관계자는 "FTA 발효 이후 5년간 관세가 철폐될 때까지 의료기기 분야에서만 1천265억원의 생산 감소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정부의 지원 규모는 턱없이 부족하다"면서 "이미 외산 장비가 국내 의료기기 시장 점유율의 65%를 차지하는 만큼 실효 없는 지원책은 국내 장비업계의 입지를 더욱 좁아지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한·EU FTA, '유럽 명품'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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