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끼리는 쓰는 말 가운데 이른바 '뻗치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자라는 직업의 숙명과도 같다고 할까요. '뻗치기'라는 것을 해보지 않은 기자들도 있을 것입니다만, 대부분 방송기자나 신문기자, 카메라기자, 사진기자들에게는 '뻗치기'와 관련된 추억들이 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사회부와 정치부 기자시절, 중요한 취재원을 만나기위해 무작정 집 앞에서 밤새 뻗치기를 한 적도 있고, 검찰청에서 수사를 받고 나오는 사람을 만나기위해 반나절을 뻗치기한 적도 있습니다. 국회에서는 비공개로 열리는 중요한 회의가 있을 때마다 1-2시간씩 뻗치기하는 게 다반사였습니다.
그냥 해도 힘들고 지겨운 게 '뻗치기' 취재입니다만, 날씨라도 좋지 않다든가, 어딘가 몸이라도 아프고 피곤한 날이면 뻗치기가 너무 힘들어질 때가 있었습니다.
또 밤늦게 집에도 못가고 졸린 눈을 비벼가면서 뻗치기를 할 때는 "내가 이 짓을 왜하나?"하는 생각이 들 때도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뻗치기는 가장 원시적이고, 가장 비효율적이고, 가장 비합리적이며, 가장 괴로운 취재 방식 가운데 하나일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정치부 기자시절 비공개로 열리는 회의장 앞에서 지겹게 뻗치기를 할 때마다, 늘 악마의 유혹처럼 따라붙던 생각이 있었습니다. "도청만 할 수 있다면 이 짓거리를 안해도 될텐데"하는 상상이었습니다. 도청 장비도 없었던데다, 도청이 불법이다보니, 물론 상상만으로 그쳤을 뿐입니다.
그런데 요며칠 들어온 외신을 보니, 이런 상상을 현실화했던 영국 언론사 소식이 들어와있더군요. 영국이 이 언론사 때문에 많이 시끄러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바로 여깁니다.
News of The World! 유명인사들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기사로 유명한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사입니다. '미디어 제왕'이라고 불리는 세계적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이 소유하고 있는 회사이기도 합니다.
<루퍼트 머독>
외신의 요지를 간략히 요약해드리면 이렇습니다.
지난 2005년과 2006년, 문제가 된 'News of The World'의 왕실 전담기자였던 클라이브 굿맨이 사설탐정인 글렌 멀케어를 고용해 왕실 가족과 보좌관의 휴대전화 음성메시지 6백여 건을 도청한 것으로 드러났고, 두 사람은 2007년 구속돼 징역 4개월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왕실 전담기자 클라이브 굿맨>
<사설탐정 글렌 멀케어>
왕실 전화 도청 사건은 굿먼과 멀케어가 구속되면서 일단락 되는듯 했습니다만, 재판과정에서 사설탐정이 왕실 말고도 고위 정치인과 연예인, 스포츠 스타 등 유명인사 수십명을 도청해온 사실이 추가로 밝혀지면서 문제가 다시 불거지게 됐습니다. 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총리조차도 자신의 전화가 감청당했다면서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을 정도입니다.
파문이 확산되면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측근이자 공보 책임자였던 전(前) News of The World 편집인 앤디 쿨슨이 지난 1월 물러났고, 최근엔 다른 기자들도 잇따라 도청 취재 혐의로 소환됐다고 합니다.
논란의 당사자인 News of The World는 그동안 도청 취재가 해당기자 개인의 문제라며 발뺌을 해왔지만, 경찰이 특별수사팀을 꾸려 전면 수사에 착수하자 휴대전화와 음성메시지 해킹 사실과 함께 기자들의 도청 취재 관행을 전면 시인하고 공식 사과했습니다.
< News of The World가 지난 10일 홈페이지에 게재한 공식 사과문>
News of The World는 또 도청 취재로 피해를 본 8명의 유명인사들을 위해 피해 배상비용으로 2천만파운드(350억원)을 마련했으나, 변호사들은 피해자가 수천 명에 이른다면서 배상비용이 두배 이상 더 필요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영국 언론들은 이번 사건을 News of The World의 사주인 루퍼트 머독의 이름을 딴 '머독판 워터게이트' 라고 부르면서, 사건의 파장이 더 커질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번 News of The World의 사태를 결론적으로 정리하자면, '기자 개인의 특종 욕심'과 '언론사의 돈 욕심'이 빚어낸 합작품이라고 해야할까요?
이번 외신 소식을 전해드리면서,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기자로서 여러가지 생각들을 하게 됐습니다. 물론 News of The World가 유명인사들의 사생활이나 폭로하는 선정적인 타블로이드 신문이라는 점을 고려해야겠습니다만, News of The World와 관련된 이번 외신은 국내 기자들의 취재윤리에 대해서도 다시한번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소식일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인생이란 쉽게 얻은 만큼 쉽게 나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뻗치기' 취재가 가장 원시적이고,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이고, 괴로운 취재 방식이기는 합니다만, 어찌보면 몸과 몸으로 부딪히는 가장 정정당당한 취재 방식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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