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담당 기자로서 해도 될 말인지 모르겠지만, 뮤지컬을 아주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마이크와 앰프를 거쳐 확성된 소리를 스피커를 통해 들어야 하기 때문에, 배우의 육성을 바로 듣는 연극에 비해 좀 더 멀게 느껴진달까요. 연극에 비해 너무 화려하다는 점도 저의 몰입을 방해합니다. 뮤지컬 취재를 맡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관심하기도 했습니다.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첫 공연을 보게 된 것은, 그래서 행운이었습니다. 사실 작품 자체에 이끌렸다기보다는 불황을 겪고 있는 요즘 공연계에서 조금 새로운 시도를 한 뮤지컬이라는 점에 끌렸죠. 한 마디로 기사 좀 써보려고 서둘러 봤습니다.
이미 SBS 8시 뉴스 리포트를 통해 보도했기 때문에 짧게 정리하자면,
류정한, 이석준, 신성록, 이창용이라는 실력과 인기를 겸비한 남자 뮤지컬 배우들을 450석 규모 중극장에서, 막말로 코앞에서 볼 수 있다는 점으로 관객몰이를 하는 것입니다. 미국 공연 당시에는 1,000석 규모 극장에서 공연을 했다고 하니까, 순전히 한국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 있겠죠.
아이템 생각만 하면서 조금은 까칠한 관객의 자세로 객석에 앉았는데,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당신이
- 글을 좋아하고 책을 사랑하는 이라면, 이야기에 관심 있는 이라면,
- 혹은 오랜 친구 사이의 진한 우정을 한 번쯤 느껴봤다면, 또 그리워한다면,
- 만약 지금, 무엇인가에 매몰돼 오래된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고, 또 잊고 있다면
눈물 펑펑 쏟는 관객 가운데 한 명이 될 겁니다.
기획 당시에는 2, 30대 여성관객들을 겨냥한 것이었는데, 3, 40대 남성 관객들의 호응이 정말 좋다고 합니다. 네 명의 배우가 짝을 바꿔가며 네 커플이 돼 연기하는데, 각 커플마다 개성 있는 조합을 선보인다죠. 공연을 볼까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 한 마디만 더 보태자면, 상.대.적.으.로. 이름이 덜 알려진 이창용 씨의 엘빈 연기가 아주 매력적이라고 하네요.
(이하 스포일러 포함돼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토마스와, 고향에서 아버지의 서점을 물려받은 그의 옛 친구 엘빈.
토마스의 이야기의 원천은 바로 엘빈의 티없이 맑은 순수함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소설들이 온전한 '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한 토마스, 그리고 '우리' 혹은 그 역시 '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한 엘빈의 사이는 조금씩 벌어집니다. 뮤지컬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둘의 사이가 벌어지게 된 결정적 순간, '그 짧은 순간'이 언제인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물론 주된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돌이키는 회상 장면입니다. 마흔에 가까운 두 배우(류정한/이석준)의 깜찍한 연기는 팬이 아니었던 기자마저도 빠져들게 합니다만, 굳이 이 작품을 거론하면서 ‘이야기’ 얘기를 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
주말 동안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맞다'(해냄)라는 제목의 이 책은 선배가 당신 자신을 향해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서문에 밝힌 것처럼 저자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사람, 딸 지우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인 동시에, 저처럼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갈등하는 모든 이를 위한 책입니다.
그래서 장르를 꼬집어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보도자료에는 '비소설'이라고만 되어있군요. 굳이 나누자면 인문교양서적에 가까울 것 같은데, 저 같은 후배 기자에게는 기자 생활을 하는 데 있어 '참고서'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저자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누군가에게는 '인생상담서', 누군가에게는 묵직한 '수필', 또 어떤 이에게는 '자기개발서'가 될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기자로서, 때로는 PD로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한 시간의 흔적이 문장 하나하나에 배어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놀랐던 이유는 정말 어렵게 만나고 오랜 시간 인터뷰했던 거장들의 이야기를 본인의 이야기로 말끔하게 소화해냈다는 점 때문인데요. 여기서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던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공연을 보던 당시에는 이야기의 원천임을 인정하고 고마워하기는커녕, 아이디어를 제공해줬던 친구에 대한 일말의 고마움도 없는 베스트셀러 작가 토마스를 조금은 미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형 선배의 책을 덮으면서 다시 한 생각은, 토마스가 옳다, 그건 '그의 이야기'가 맞다는 것이었습니다. 똑 같은 보도자료를 받아 같은 취재원을 상대로 취재해도 전혀 다른 기사가 나올진대, 하물며 소설은 어떻겠습니까.
세상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있고, 누군가는 아주 사소한 데서도 이야기를 찾아냅니다. 책에 언급된 것처럼 음악 한 곡, 시 한 편, 그림 한 점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모든 이가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좌절하게 하거나 역으로 다시 일어설 힘을 주는 것은 아니지요. 때로는 낡은 소재를 갖고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이야기꾼만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이야기꾼은 없어서는 안 될, 세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중요한 존재지요. 어린 시절의 기억 한 조각, 별볼 일 없는 그저 그런 일상에서도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으니까요. 거기에 차근차근 쌓아온 지식과 정보, 내공을 보태고 덧붙여 독특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거겠죠.
선배가 언젠가 이 글을 읽을 거라는 부담감이 크지만, 선배가 책에 인용한 것처럼 '얼음같이 냉혹한 백지의 도전'을, 그 첫 도전을 잘 마무리한 선배에게 감히 박수를 보냅니다. 후배가 그저 기사 쓰는 '기술'을 조금 익힌, 흔하고 뻔한 전달자로 주저앉지 않도록 늘 자극을 주는 고마운 선배 덕분에, 미루고 미뤄왔던 취재파일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감히' 해봤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래도 당신이 맞다'를 잃고 쓴 어쭙잖은 서평을 붙입니다. 방송기사라 주어진 분량이 너무 짧았다는 게 아쉽지만 다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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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당신이 맞다'는
저자가 문학과 예술,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의 '인생 고수' 스무 명을 오랜 시간 인터뷰해 화두를 얻은 책입니다. 조정래, 조훈현, 허영만 같은 거장들이 어떻게 성공했는가 보다, 어떤 자세로 살아왔는지, 성공 이면에 숨은 고통과 좌절, 삶과 일을 대하는 남다른 마음가짐에 대한 성찰이 돋보입니다. 인터뷰했던 스무 명의 이야기 말고도, 마음에 새길만한 좋은 말과 글을 옹골지게 담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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