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말로 임기가 끝나는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가 주재하는 마지막 금융통화위원회가 지난 11일 열렸습니다. 경기회복에 대한 불확실성이 남아있다는 이유로 이번달 기준금리도 역시 13개월째 동결됐습니다.
이 총재는 "저는 제 할 몫을 하고 나가는 것이고 다음 총재는 주어진 상황에 맞게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다소 추상적으로 후임총재의 임무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이 총재의 임기가 채 몇주밖에 남지 않았지만 후임 총재가 누가될지는 아직 오리무중입니다.
이 정도 시기에 다음 총재의 윤곽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라는게 한국은행 관계자들의 말입니다. 과거의 사례를 보면 임기 만료 1개월 전에 후임자를 내정해 언론 및 여론의 검증을 거치고, 시장에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연속성과 신뢰를 유지하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하지만 요번에는 그 논의가 늦어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단순히 늦어지는 것만 문제가 아니라 논의의 내용도 중앙은행 총재로서의 '자질'보다는 '정치'적인 얘기만 난무한 상황입니다.
현재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는 후보군에는 어윤대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 김중수 OECD 대사, 김종창 금감원장, 강만수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장, 박철 전 한국은행 부총재 등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2~3명으로 논의가 더 좁혀졌는데 모두 대통령과 여러 인연을 통해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현재 거론되는 유력 후보들이 과연 중앙은행 수장으로 적임자인지 여부에 대한 논의는 실종됐습니다. 누가 금통위원 경험이 있고 없고 정도가 다입니다.
중앙은행 총재는 통화정책을 총과하는 최고책임자로서 물가 안정이라는 기본 목표를 지키면서 경제성장에 기여하고 실물경제가 원활하게 움질일수 있도록 금리를 유연하게 조절하는, 무수히 많은 경제를 둘러싼 변수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중요한 자립니다. 여기에다 최근의 금융위기 직후 중앙은행의 역할에서 보듯 위기관리능력과 국제공조를 위한 국제감각 등도 필요합니다.
그런데도 누가 더 현 정권과 가까운지, 누가 더 현 정권의 경제정책방향에 협조할 것인지 등이 주된 관심사가 돼버렸습니다. 정부와의 의견조율과 협조는 필수지만 정치적인 입김에 휘둘리지 않은 채 지킬 것은 지키고 균형을 잡아나가야 하는 부분은 중요한 중앙은행 수장의 역할입니다.
현재 시장에서는 정권이 중앙은행 총재로 자기입맛에 맞는 '내 사람'을 앉히려는 목적이 금리 인상을 차단하기 위함이 아니겠냐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청와대와 정부는 재작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조기재정집행과 저금리 등 적극적인 경기부양책을 통해 OECD국가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우리 경제가 회복된 만큼, 아직 경기불확실성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금리를 섣불리 올려기엔 시기상조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윤증형 기획재정부장관이 틈만 나면 "아직 금리를 올리기엔 시기상조"라는 발언을 이어가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반면 한국은행 쪽은 다소 다릅니다. 13개월간 이어져온 사상 최저금리 기조가 경제 곳곳에 버블을 만들어놨고, 제때 금리를 인상해서 유동성이 회수되지 않으면 더 큰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물가나 부동산 가격이 상대적으로 안정돼있고, 경기 회복세가 주춤해지면서 마지막까지 금리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비상시에 취한 비정상적으로 낮은 금리가 계속 유지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정부는 '열석발언권'을 행사해 기획재정부 차관을 금통위에 참석시키기에 이르렀고, 이를 금리를 올리지 못하도록 하려는 정부의 통화정책에 대한 간섭이라고 해석하며 갈등도 빚어졌습니다.
이성태 총재는 마지막 금통위 후 기자간담회에서도 700조 원을 돌파한 가계부채에 대한 걱정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빚이 많으니까 이자 부담때문에 금리를 올려서는 안된다는 것은 경제학교과서와 반대되는 것이다. 빚이 많으면 금리를 올려서 부채를 줄여나갈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금리는 못올렸지만, 최악의 상황을 막으려면 가계나 국가나 모두 서둘러 부채 구조조정에 나서야 함을 강하게 시사한 것입니다.
결국 현 정권은 이런 견제와 갈등 모양새를 연출하지 않기 위해 '좀더 말을 잘듣는 내 사람'을 후임 총재에 심겠다는 생각을 한편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거론되는 인물들의 면면에 이 대통령과의 인연이 유독 강조되는 것도 그런 해석을 낳게 하는 배경입니다.
하지만 한국은행이 적절한 독립성을 갖고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과거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라는 오명을 다시 상기시키는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습니다.
경기부양을 위해 통화를 풀어야 한다는 정부와, 풀린 통화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수 있다는 한국은행의 상반된 시각이 타협과 협상을 통해 조율되는 과정에서 성숙하고 신중한 통화정책이 등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청와대 관계자는 다음주쯤이면 한국은행 후임총재 인선이 어느정도 좁혀져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예상했다 합니다. 23일 국무회의에서는 차기 한은총재 임명안도 처리될 것으로 보입니다.
금융위기가 '종료'이 아닌 아직도 '진행형'이라는 분석이 우세한 상황에서 이른바 '더블딥(이중침체)'을 걱정하는 시각이 높습니다. 이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특히 다음 한은총재는 13개월간 사상 최저수준으로 묶인 기준금리를 언제, 얼만큼 올릴지 어렵고도 부담스럽고도 중대한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과연 '자기 사람' '내 말 잘 들을 사람'이라는 좁은 테두리 안에서 이런 중요한 상황을 진두지휘할 적임자를 찾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전문성과 도덕성을 갖추고 시장과 정부와 두루소통할 수 있는 또다른 적임자들이 곳곳에 있음을 다시한번 상기해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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