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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따라 마시면 막그릇?

며칠 전, 새 집으로 이사한 친구가 집들이에 초대해 줬습니다.

여자들만 몇 명 모이는 자리였는데, 어쩐지 음료로는 막걸리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입맛을 다시면서- 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담한 와인잔을 세팅했지만, 요즘 그렇게 인기가 좋다는 @@@의 @막걸리 몇 병을 놓고 노릇노릇하게 전을 부쳐놨습니다.

지난해 초반까지만 해도, 그렇게 여자들만 오붓하게 모여 수다떠는 자리라면 가격 고하를 막론하고 와인 한 병은 있고, 치즈나 카프레제 샐러드 같은 게 나왔을 겁니다.

여자들끼리 식탁에 둘러앉아 와인잔에 막걸리를 따라마시는 풍경은 그려보기 힘들었죠.

그렇지만 이젠 이런 얘기를 새삼 꺼내는 게 무색할 정도로 막걸리가 대세는 대세입니다.

당장 저만 해도, 막걸리 잘못 마시면 다음날 '죽는다'는 선배들의 엄포에 대학생 때도 막걸리를 입에 대본 적이 없었건만, 이제는 은근히 막걸리를 기대하면서 집들이에 갈 정도가 됐으니까요.

막걸리는 숙취가 심하다는 그 말도, 빠른 발효를 돕기 위해 '카바이트'라는 첨가물이 들어간 데다 불순물이 제대로 걸러지지 않은 막걸리들이 많던 시절의 얘기입니다.

꽤(?) 마신 다음날도 어렵지 않게 눈이 떠지고 속도 편안한 것을 몇 차례 확인하고, 요즘 자주 마시고 있습니다. (어째 취재파일이 아니라 술꾼의 다이어리가 돼가는 느낌입니다.)

술도 술이지만 분위기를 마시는 게 특징인 여성들이 찾는 술이라면 일단 고급 음주 문화의 장에 진입한 것이라고 봤을 때, 지난 몇년새 그 장에서의 유행은 와인에서 사케, 사케에서 막걸리로 이동했습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와인과 사케는 이미 본고장에서 고급부터 아주 싼 것까지 층층을 이루고 있는 술이지만, 막걸리는 본고장인 우리 나라에서 재발견되면서 고급화에 이제 막 시동이 걸린 술입니다.

올해 백화점들은 8만 원에서 8만 5천원짜리 막걸리세트를 설 선물로 내놨습니다.

막걸리가 8만 원이라는 것도 처음이고 백화점 설 선물로 막걸리가 나온 것도 처음입니다.

배꽃이 필 무렵에 빚는다고 '이화주'라 부르는 막걸리의 한 종류인데, 고려 왕실에서 마시다가 맥이 끊겼다고 합니다. 이걸 요즘 막걸리에 골몰하고 있는 주류업체들이 찾아내부활시킨 것이죠.

이 얘기를 전하니 주위 사람들이 "막걸리가 8만 원?!"하고 놀랍니다. 가격이 적정한 것인지 그 세트 자체에 대한 판단은 일단 보류하고, 저는 비싼 (만큼 고급으로 인정받을 만하다면) 막걸리가 나오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모처럼 우리 술이 신드롬을 일으켰을 때, 이러다 용두사미가 되지 않도록 확실히 세분화돼서 고급부터 부담없는 가격대까지 자리를 잡으면 좋겠어요.

'먹고 죽을' 때 찾을 뿐 아니라, 우아하게 차려입고 분위기 좋은 데서 기분내고 싶을 때 제법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도 당연히 여길 수 있는 우리 술이 있으면 좋겠단 얘기입니다.

여자들이 막걸리를 와인잔에 따라마시고, 대학가 주점에서 막걸리 칵테일이 나오고 하는 것도 그런 바람이 반영된 결과 아닐까요. 막걸리를 둘러싼 다양한 문화가 정착됐으면 하는 희망 말이에요.

취재하다 최고급 전통도자기를 홍보하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이 홍보하는 자기그릇에 막걸리를 따라마시는 모습이 TV에 나간 적이 있었는데, 고객으로부터 항의성 전화가 왔다고 해요. "그렇게 많은 돈을 주고 사서 애지중지하는 고급 그릇이 막걸리 따라 마시는 막그릇으로 방송되면 어떡하냐"는 얘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만약 그 그릇에 와인을 따라마시는 모습이 방송됐다면 그 고객은 뭐라고 했을까요.

제 짐작이지만, 전통자기에 웬 와인? 했을지는 몰라도 항의전화는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와인도 종류 자체가 고급 술은 아니죠.

세월을 거치면서 비싼 것부터 아주 저렴한 것까지 다양화, 세분화돼 자리를 확실히 잡았을 뿐입니다.

'백화점에서 팔만한 술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에 백화점에서는 거의 취급하지 않던 막걸리가 인기를 끌고 좀더 다양해진 제품들이 출시되면서, 백화점들도 막걸리 매출을 점점 늘려왔습니다. 반응은 폭발적입니다.

       



1년전인 지난해 1월과 비교했을 때, 현대백화점의 막걸리 판매량은 64배, 신세계는 79배나 늘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매출액으로는 비싼 서양술들에 비해 큰 액수가 아니라지만, 아예 취급도 받지 못하던 우리 술이 주요 품목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분명합니다.

전통막걸리는 혼자 뜨지 않습니다. 막걸리가 이렇게 폭발적인 신장세를 보이면서, 막걸리랑 같이 먹을 만한 전통조리식매장도 같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백화점에서 순대, 족발, 부침개 같은 전통조리식 별로 보신 적 없죠?

백화점 조리식매장은 서양식이나 일식, 중식이 대부분이었죠.

그런데 막걸리가 자리잡은 지난 1년 동안, 앞서 말씀드린 우리 음식들 매출이 절반 가까이 늘어난 거예요.

이에 신세계 강남점은 최근 식품매장을 리뉴얼하면서 2대 뿐이었던 한식 조리식 매대를 6대로 늘렸습니다. 물론 아직 그리 크다고는 볼 수 없는 규모지만, 분명히 눈에 띄는 변화죠.

앞서 그릇 얘기도 잠깐 했지만, 여자들이 혼수해 갈때 많이 찾는다는 한 고급 전통자기업체도 오는 3월부터 막걸리잔 세트를 출시합니다. 막걸리 따라마시면 막그릇, 이라는 인식은 분명 사라지고 있습니다.

백화점 식품매장 와인 코너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자리잡은 막걸리 코너를 보고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저는 좀 촌스러운가요?

물론, 대충 만들어 내놓고 인기있으니까 가격은 좀 올려쓰고 한다면, 지금의 인기는 생각보다 쉽게 사그라질 겁니다.

소비자들의 총의란 건 무섭습니다. 하루 이틀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길게는 못갈 거예요.

그렇지만 이 기회에 확실히 고급화, 다양화에 신경쓰고 시장을 넓혀 오랜 세월 동안 막걸리와 함께 해 온 전통식품이나 제품들도 재발견, 재개척되는 계기를 만든다면?

요즘 일본에서 막걸리가 그렇게 인기라는데,

막걸리를 중심에 둔 전통식품과 제품들이 하나의 문화로 구성돼 더욱 체계적으로 해외에 진출한다면?

"이게 옛날에 왕이 먹던 술이래"하면서 비싼 막걸리가 당당히 대접받게 된다면?

왜 내 비싼 그릇에 막걸리 따라마시게 했냐고 항의했다는 그 사람, 슬그머니 그 그릇에 막걸리를 따르게 될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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