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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법정 족적…사법부 과거청산 물꼬 터

80년 내란음모죄로 사형→2004년 재심서 무죄<br>인혁당, 아람회사건 등 재심청구 줄이어

민주화 운동의 최일선에 섰던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질곡 많은 사법부 역사에도 깊은 족적을 남겼다.

"법에 의해 신군부를 단죄하고 저의 무죄를 밝혀줘서 국민과 역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2004년 1월29일 오후 2시 서울고법 303호 법정에서 열린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재심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김 전 대통령은 서초동 법원 청사를 나서면서 소회를 이같이 밝혔다.

당시 재심 재판장은 최근 `촛불재판' 개입 논란을 빚은 신영철 대법관이었다.

서울고법 부장판사로 사건을 맡은 신 판사는 김 전 대통령에게 지워진 내란음모와 계엄법 위반 혐의에 대해 "헌정질서 파괴 범죄에 맞서며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려 한 정당행위였다"며 무죄를 선고했고, 국가보안법 위반과 반공법 위반, 외국환관리법 위반 혐의에 대해선 면소 판결했다.

몇 달 뒤엔 김 전 대통령이 1980년 5월18일부터 949일 동안 불법 구금당한 데 대해 국가가 구금일수 하루당 10만원씩 총 9천490만원을 보상하라고 판결했다.

1980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이끄는 신군부가 5.18 광주민주화 항쟁을 내란음모로 규정하고, 배후로 지목된 김 전 대통령과 문익환 목사, 고은 시인 등 26명을 연행하면서 시작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암울했던 1970~80년대 사법부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사건 중 하나다.

당시 군법회의는 1심에서 김 전 대통령에게 구형대로 사형을 선고했고, 항소심에도 사형을 유지했으며, 대법원은 상고심에서 사형을 확정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후 미국 백악관과 교황청 등 각국 각계의 구명 운동에 힘입어 1981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1982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20여년간 조작 의혹 속에서도 미제로 남아있던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1999년 연루자들이 낸 재심청구가 법원에 받아들여진 뒤 무죄 선고를 받으면서 빛을 보게 됐다.

이는 이후 사법살인으로 불리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간첩 누명을 썼던 `함주명씨 사건', 교사ㆍ공무원 등 무고한 시민을 반국가단체 구성원으로 몰아 중형을 선고한 `아람회 사건' 등 비극적인 시국ㆍ공안 사건들에 대한 재심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다.

김 전 대통령이 법원과 맺은 인연은 이것만이 아니다.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독재에 항거, 1976년 3월1일 '3.1 민주구국선언사건'(일명 명동사건)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을 비롯해 문익환 목사와 함세웅 신부 등 18명은 악법의 대명사인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기소돼 1심에서 각각 2~8년의 실형을 선고받았고, 항소심에서 형량이 약간 줄어든 채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이로 인해 김 전 대통령은 2년 9개월의 수형생활을 해야 했다.

당시 민복기 대법원장은 유신헌법의 충실한 추종자로 "사법권도 국가정치권력의 한 부분인 만큼 존재양식은 여기에 발맞춰 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고, 판사들은 긴급조치 위반자들에게 징역 2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같은 암흑기 사법부의 피해자 중 한 명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으며, 이후 재심 등을 통해 사법부가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는데 나름대로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때 사형수로 생사의 기로에 섰던 김 전 대통령은 국내에서 앞장서 사형제도 폐지를 촉구한 선구적 사형폐지론자로 역사에 남게 됐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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