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까지 사회부 사건팀 기자 생활만 3년.
저도 물론 그랬지만, 사건 기자들에겐 민주노총만큼 애증(?)이 깊은 노동단체도 없을 것입니다.
특히 종로라인 출입이나 영등포라인 출입기자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는 이들과 원하든 원치 않든 만나게 됩니다.
자연히 그들의 정치적 목적과는 상관 없이, 현장에서는 안면을 트게 되죠.
지난해말, 종로경찰서 1진 출입기자였던 저는 최근 옥중 사퇴를 결심한 이석행 민노총 위원장과 친분을 맺게 됐습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쫓기다 조계사에 피신한 상태였는데요, 텔레비전 화면이나 신문 사진을 통해 볼 때와는 달리, 상당히 부드럽고 구수한 '동네 아저씨' 스타일이었죠.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제대로 전달해주지 않는다며 고리눈을 부릅뜨던 일부 시민단체 사람들과는 달리, 첫 만남부터 친절하게 대해줬습니다.
지난해 10월 말쯤인가.. 이 위원장의 대변인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
"위원장님이 산낙지가 드시고 싶으시다네..."
한 밤 중에 피맛골에서 손꼽히는 맛집에서 산낙지 한 접시를 포장해, 조계사 뒷편 공원벤치로 향했죠.
이 위원장이 술손님으로 부른 진보성향 대학 교수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기자로서는 모든 언론사 통틀어 저만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물론 이 위원장의 정치적 지향점에 공감하지 않는 점도 많았지만, 주변 경찰의 포위망 속에서 기울이는 한가을철 야외 술자리에서 나름 운치있는 분위기를 나누는 상대로서 부족함은 없었습니다.
"위원장님. 드시고 싶다고 해서 사오긴 했지만, 이거 조계사 경내 바로 옆에서 살생을 하시게 만드는 것 같아 좀 이상하군요. 대신 조계사 경내 빠져나가실때 미리 문자 메세지 보내세요. 특종 좀 하게."
"알았어. 알았어. 김기자에게 제일 먼저 메시지 보낼게."
꿈틀거리는 낙지를 삼키며 이 위원장은 철썩 같이 약속을 했죠.
2주 뒤, 그는 경찰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했지만, 저와 한 약속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가 누구의 도움을 받고 탈출했고, 어디로 도피했으며, 그 와중에 대략 어떤 단체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었다라는 사실을 취재하는데 성공했고, 도망중이던 그와 간접적인 접촉을 통해 인터뷰 약속을 잡아놓기도 했지만, 엄밀하게 말해 '피의자' 신분으로서 쫓기고 있는 그의 주장을 토대로 기사를 쓸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지난 연말에 경찰에 체포돼 서울 구치소에 수감되죠.
그리고 이달 초, 정말 있어서는 안 될 지저분한 스캔들이 민노총 최고 수뇌부에서 터졌습니다.
민노총 최고위 간부의 전교조 소속 조합원 성폭행 기도.
그것도 이석행 위원장의 도피를 도와줬던 조합원에 대한 은혜 모를 파렴치한 범죄였습니다.
사건이 터진 날, 저는 사회부 기자가 아닌 경제부 노동부 출입기자로 서울 영등포 민노총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이 위원장과 함께 친분을 맺은 노총 고위 간부는 그때 당시만 해도 사태의 심각성을 잘 모르는 듯 했습니다.
"이건 한 남성의 파렴치한 잘못일 뿐이야. 우리 노총이 책임져야 할 것까지는 없고... ooo 부위원장이 일부 언론에 흘린건데... 이 부위원장 사퇴를 받으면 되는거지."
한 두 시간 뒤, 성폭력 피해자측이 기자회견을 열었고, 구체적인 사건 전말과 가해자의 이름까지 언론에 공개했습니다. 덧붙여 충격적인 민노총 지도부의 집단 은폐 의혹을 폭로했고요...
이후 민노총 분위기는 마치 원자폭탄을 맞은 듯 했습니다.
긴급 중앙집행위원회 회의가 열리고, 지도부가 잇따라 사퇴했습니다.
다음날, 진영옥 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은 서울구치소에 있는 이석행 위원장을 면담했습니다.
이 때 이 위원장은 "사태는 유감스러우나, 강하게 맞서라. 일부 지도부가 이미 사퇴한 마당에 지도부 와해까지 가서야 되겠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기자에게 전한 민노총 관계자는 "어차피 부위원장 등 지도부가 너무 많아. 좀 구조조정 좀 하고 줄여야 해"라며 애써 침통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바람과는 달리 다음날 지도부는 총 사퇴를 결정했고, 이 위원장도 뒤따라 사퇴를 발표해야 했습니다.
지도부가 와해되는 최악의 상황에 처한 민노총은 결국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강경 성향의 임성규 공공운수 부위원장이 비대위원장을, 비교적 온건성향의 남택규 금속노조 부위원장이 집행위원장을 맡게 됐습니다.
비대위는 조만간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성폭력 피해자측이 원하는대로 사건 전면 재조사를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또, 미온적인 대응과 내용 외부 유출로 파문을 일으켰던 지난 1월 조사 때와는 달리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외부 전문가를 추가하기로 했습니다.
[임성규/민노총 비상대책위원회 위윈장 : 외부에 있는 인사들까지 포함해서 진상규명위원회를 꾸리기로한 이상 상당한 자율권을 주기로 확정했습니다.]
비대위 체제는 오는 4월 8일 이전, 집행부에 대한 보궐선거가 치뤄지기 전까지 임시 집행부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민노총은 이번 사건으로 일부 보수 신문에서 '섹스 노총'이라는 원색적인 기사를 써 공격을 했듯이, 씻을 수 없는 불명예를 떠안게 됐습니다.
[민노총 관계자 :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조직인데... 80만명의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우리 조직인데... 우리 민노총이 어떤 조직인데...]
궂은 날씨 마다 안 하고, 늘 거리 시위 때마다 앞장섰던 한 민노총 관계자는 보수 언론의 잇따른 공격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며 울분을 토했습니다.
노동자의 소중한 권익을 대변한다며 늘 거리로 나섰던 그들....
하지만 그 와중에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이익 보다는 정규직 노동자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이중적인 태도에 대한 내외부의 질타가 있었고, 역시 노동자의 권리와는 직접 관계가 없는 정치적 이슈를 물고 늘어져 정국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내외부의 비판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자기 희생적 참여, 약자에 대한 따뜻한 배려 등, 그동안 부각되지 않은 민노총만의 장점도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번 파문을 계기로, 내외부 소통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 반성으로, 지난 가을, 기자와 함께 했던 그 술자리의 추억처럼, 이념의 벽을 넘어 80만 조합원 뿐만 아니라 전 국민을 감싸고 전진할 수 있는 그런 민노총으로 거듭나길 기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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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김형주 기자는 현재 경제부에서 노동부를 출입하고 있습니다. 2004년 공채로 입사한 김기자는 이전에는 사회2부 사건팀에서 활약했습니다. 훤칠한 키에 핸섬한 외모로 인기가 많은 그는 취재현장에서 만난 인간 군상들과 사회 부조리 등 보고 느낀 많은 것들을 담은 개인 블로그도 운영 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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