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 문헌기록으로 볼 때 적어도 고려시대 이후 섣달 그믐날 우리의 궁중 습속 중 하나로 12가지 악귀(惡鬼)를 쫓아내는 의식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 생생한 모습은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문필가 중 한 명인 성현(成俔.1439-1504)의 '용재총화'라는 수필집에 나온다.
이에 의하면 몰아내야 할 악귀를 구체적으로는 흉(兇)·호랑이(虎)·매(魅)·불상(不祥)·고백(姑伯)·몽강양조(夢强梁祖)·목사기생(木死寄生)·츤(齒+匕)·거궁기등(拒窮奇騰)·고(蠱)라고 한다. 이 중 호랑이를 제외하고는 그 실체를 종잡을 수 없다.
용재총화에서는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고는 그들을 퇴치하는 푸닥거리에서 이런 명령을 내린다고 적었다. 용어가 섬뜩하다.
"너희 12신(神)은 급히 물러가 머무르지 말지어다. 만약 더 머무르면 네 몸을 으르대고, 네 간절(幹節.뼈마디)을 부글부글 끓일 것이며, 네 고기를 풀쳐내고, 네 간장을 뽑아 버릴 것이니 그 때 후회함이 없도록 하라"
이런 푸닥거리를 나례(儺禮)라 했고, 궁중에서 거행하는 나례는 특히 규모가 장대해서인지 '대나'(大儺)라고 불렀다.
새해를 앞둔 전날 몰아내야 할 12악귀 중 특히 주목할 것이 마지막으로 든 고(蠱). 이는 결국 새해를 맞는 마지막 의식이 어디와 긴밀히 연결돼 있는지를 가늠하는 데 결정적이다.
고란 무엇일까? 몸 속에 산다는 나쁜 귀신이다. 한데 이런 '蠱'는 글자 모양에서 벌써 그릇(皿) 안에 세 마리 나쁜 벌레(蟲)가 든 모습이라는 데서 유추할 수 있듯이 모든 사람 몸 속에서 각각 머리와 배, 그리고 발 근처에 1마리씩 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됐다.
그 위치에 따라 머리에 있는 것을 상시(上尸), 뱃속의 삼시를 중시(中尸), 발에 사는 벌레를 하시(下尸)라 했다. 물론 별칭도 있어 북송 초기에 나온 운급칠첨이라는 도교의 대장경 권81 경신부(庚申部)에서 인용한 '삼시중경'(三尸中經)이라는 책에 의하면 상시는 이름을 팽거(彭倨)라 하고, 중시는 팽질(彭質)이라 하며, 하시(下尸)는 팽교(彭矯)라 부른다고 했다.
각종 도교 경전에 의하면 '삼고'(三蠱)라고도 하는 이들 삼시(三尸)는 1년 12달 동안 그 사람의 행실을 엿보아 그것을 기록해 두었다가, 매해 섣날 그믐날 밤이 되면 하늘로 올라가 상제(上帝)께 고해 받친다고 한다. 이들 삼시의 '보고서'에 기초해 상제는 그 사람의 수명을 줄이거나 늘려준다고 한다.
즉, 착한 일을 많이 했으면, 그만큼 더 오래 살게 해 주고, 나쁜 일이 많으면 그에 상당하는만큼 수명을 줄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자기 스스로에게 비춰 보아 착한 일보다 나쁜 일을 많이 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삼시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원천봉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노골적으로 감지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삼시충을 어떻게 퇴치할 것인가?
이들 삼시충에서 발견되는 커다란 약점 중 하나는 그 사람이 잠들었을 때만, 몰래 그 사람 몸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는 몸을 탈출할 수가 없다.
약점을 찾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를 역이용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잠 안 자는 방법을 사람들은 생각한 것이다. 도시화, 산업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요즘 도시에서는 이런 풍경이 거의 다 사라졌으나, 지금도 농어촌 같은 데서는 섣달 그믐날 밤을 온통 불빛으로 밝혀놓는 이유가 이에서 말미암는다.
이날 밤 잠이 들면 눈썹이 희어진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이날 밤을 뜬 눈으로 새는 일을 그 해를 지킨다 해서 수세(守歲)라 불렀다.
이와 관련해 또 하나 유의할 것은 '수경신'(守庚申)이라는 습속이다. 경신일에는 날밤을 샌다는 의미이거니와, 실제 조선왕조실록이나 조선시대 각종 문집을 뒤져보면, 경신일에 해당되는 날에는 유독 흥청망청 술 마시는 파티 이야기가 자주 보이는 것도 바로 이 수경신 풍습을 말하기 때문이다.
왜 하필 경신일인가? 앞서 말한 삼시충이라는 '고자질 귀신'은 섣날 그믐날 밤 외에도 60일마다 한번씩 돌아오는 경신일 밤이면 하늘로 올라가 상제에게 그 사람의 잘못을 고자질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런 수경신 신앙은 중국을 보면 동진시대 저명한 도사인 갈홍(葛弘)의 포박자(抱朴子)에 나온다.
'날밤'의 전통은 이처럼 그 역사가 유구하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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