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화점 (감독: 유하, 주연: 조인성, 주진모 ,송지효,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보며 든 느낌은 세 인물 모두 불쌍하다는 측은지심이었습니다. 만인지상의 자리지만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해 치욕을 당하는 와중에 후사도 없어 통치권 위기에 시달리며 심지어는 암살 시도까지 당하는 왕(주진모), 천하를 통일한 원나라 공주로 태어났지만 번호표 잘 못 뽑아든 덕분에 하고 많은 좋은 자리 놔두고 고려로 파견됐는데 설상가상 여자를 거들떠도 보지도 않는 왕을 모셔야하는 왕비(송지효),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카리스마로 ‘잘살아보세!’를 외쳤던 어떤 대통령 시절 모 경호실장처럼 막강 권세를 누리는 왕의 최측근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궁궐에 갇혀 혹독한 무술수련으로 청소년기를 보내고 별다른 고민이나 자각 없이 왕의 연인이 되어야 했던 건룡위 대장 홍림(조인성)까지….
왕은 원나라 황실과 찰떡궁합을 보여주며 파병하라면 파병해 주시고, 공물을 바치라면 바쳐 주시며 권력을 보전하고, 왕비는 친정 빽을 적당히 이용해 여자를 품지 못하는 왕의 약점을 잡고 늘어지며 여러 꽃미남들 섭렵하며 인생을 즐기고, 홍림은 왕의 최측근이자 연인이니 베갯머리 송사를 통해 매관매직이나 각종 이권사업에 발담그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더라면 모두 행복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성립할 수 없겠지요. 그게 다 열정을 다해 불사르는 사랑에 내재한 비극성 때문이지요. 이성이나 냉철한 판단보다는 본능이나 마음의 외침에 이끌려 갈등을 겪다가 결국 비극을 맞이하는 이런 인물들은 서양 낭만주의 소설에 많이 등장합니다. 이런 이유로 감독은 규율과 권위를 중시하는 유교사상이 뿌리내리기 전으로 자유분방함이 넘쳤던 고려시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선택했습니다.
[쌍화점]은 남녀 사이의 삼각관계를 기본 축으로 한 멜로드라마입니다. 멜로 뿐 아니라 질투, 애증, 집착의 감정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사랑의 파국을 그리는 품격있는 치정극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삼각관계의 한 축이 남-남으로 구성된 동성애라는 점이 특이한 점이고요. 여기에 '눈요깃거리'로 등장하는 것이 검술 액션과 화려한 궁중 연회 정도 되겠고, 사극의 특성을 십분 살린 세트와 의상도 볼만합니다.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되어온 베드신 장면은 다행스럽게 눈요깃거리로 소모되지는 않습니다. 리안 감독의 [색, 계]를 능가하지는 못하지만 요 근래 나온 한국영화 가운데 표현의 강도가 가장 높으면서 영화 전개와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습니다. 많은 여배우들이 노출 연기에 대한 질문에 모범답안처럼 말하는 '스토리 전개를 위해 꼭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벗을 수 있다'는 말과 꼭 맞아 떨어진다는 거죠.
대략 대여섯 차례 등장하는 왕비와 홍림의 정사장면이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어떻게 싹터서 어떻게 발전해 가는지를 잘 보여주는데 체위의 발전과 감정의 전개가 함께 어우러집니다. 어느 한 장면을 뺀다면 이야기 전개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할 것 같습니다. 특히 왕비의 심리변화를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향첩과 두건 등 소품을 이용해 애틋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좋고요. 수척한 모습으로 나오는 장면에서 조금 앳되보이는 모습만 빼고는 송지효의 사극 연기와 섬세한 표정의 변화를 보여주는 열굴 연기도 조인성, 주진모의 위력에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로 수준급입니다. 반면 허겁지겁 서로를 탐닉하는 듯한 주진모와 조인성의 사랑나누기 장면은 파격성이나 충격의 강도는 크지만 그 이상의 기능은 하지 못하고 영화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조인성, 주진모의 연기는 감정 변화의 진폭이 어떤 영화보다 크고 클라이맥스에서는 검술 액션을 하며 감정연기를 함께 해야하는 고난도의 역할인데 캐릭터에 깊숙이 들어가 잘 소화합니다. 세 배우 모두 영화제의 남녀 주연상을 받아도 이의를 제기할 구석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 포스나 파워가 [추격자]의 김윤석이나 [밀양]의 송강호처럼 스크린을 꽉 채우다 못해 흘러넘칠 정도는 아니더군요. 물론 장르와 캐릭터가 엄연히 달라 단순비교는 어렵지만 자주 등장하는 빅 클로즈업에 관객이 피로감을 느끼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늘어진다는 느낌이 드는데 특히 왕이 홍림에게 형벌을 내린 뒤의 전개는 너무 관습적입니다. 마치 인기 연속극 연장방송 하는 것 같더라고요. 차라리 그냥 파국에서 깔끔하게 결말을 맺는 게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지만 유하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들에게서 연기를 끌어내는 능력은 놀랍습니다. 이만한 스케일의 사극에, 복잡한데다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감정을 표현해야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잘 꾸려나갑니다. 유하 감독 영화 가운데 최고라고 꼽기에는 주저하게 되지만 시인출신 감독답게 짧지만 강한 여운을 주는 대사들도 곱씹을수록 그 맛이 더할 정도로 좋고, 고증과 상상을 적절하게 결합해 만든 화려하고 원색적인 의상이나 세트 등 미술도 좋고, 드라마의 전개도 무난하고, 특히 [미인도]를 볼 때는 전혀 작동하지 않던 얼굴 벌게지는 느낌을 제대로 느끼게 해줘 상영관 내부 온도를 올리게 해준다는 점에서 에로티시즘의 구현은 성공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배우가 아닌 스타로 살겠다고 작정했다면 절대 선택하지도 않고, 시도하지도 않았을 파격적인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 정말 고생 했겠더라고요.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