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서 '죽는다 죽는다' 하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다"
최근 영화를 개봉한 한 영화사 관계자의 말이다. 근년들어 충무로의 '돈 가뭄'은 새로운 소식이 아니지만 최근 들어 국내외적인 경기악화와 맞물리면서 더욱 표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잇따른 제작 연기, 캐스팅 무산 소식
김아중, 류승범이 캐스팅된 영화 '29년'의 제작이 최근 무기한 연기됐다. '끝나지 않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민감한 소재로 제작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예상이 가능하기는 했지만 제작 연기의 주 이유는 투자유치 부진이다.
지난해 초 '미녀는 괴로워'의 흥행 돌풍 이후 톱스타로 떠오른 김아중이 2년 만에 심혈을 기울여 고른 작품인데다 인기 만화가 강풀의 원작과 중견 제작사 청어람의 뒷받침이 있고 '천하장사 마돈나'로 호평받은 이해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지만 불황을 헤쳐나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너는 내 운명', '그놈 목소리'로 흥행에 성공한 박진표 감독의 신작 멜로영화 '내 사랑 내 곁에'에는 한류스타 권상우와 흥행작 대부분을 흥행시켜온 하지원이 캐스팅됐다. 제작사인 영화사 집도 '그놈 목소리', '행복', '앤티크-서양골동양과자점'으로 좋은 평가를 받아온 곳.
그러나 최근 권상우의 캐스팅이 무산됐다. 권상우 소속사 측이 내세운 이유는 "영화계가 불황이고 투자가 불확실해 투자 배급에 대한 우려가 높았다"는 것이었다. "이미 메인 투자사가 확정됐는데 말도 안 된다"는 제작사 측 반박을 차치하고라도 한때 도도하게 TV 스타들을 불러들였던 영화계의 위상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제작중인 영화수 줄고, 관객도 작년보다 22% 감소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올 1~9월까지의 영화산업결산에 따르면 이월작과 재개봉작을 제외한 한국영화 개봉작 수는 75편. 지난해 같은 기간 81편보다 7.4% 줄었지만 적은 수는 아니다. 그러나 이 기간 관객수는 지난해 5천900만명에서 4천600만명으로 22% 나 줄어들었다.
한국영화가 호황이던 2006년 제작돼 창고에서 대기 중이던 '묵은 영화'들이 잇따라 개봉해 개봉편수는 대충 유지했지만 올해 제작되고 있는 영화가 대폭 줄어 당장 내년에는 극장에 가서 볼만한 한국영화가 눈에 띄게 줄어들 것이 뻔하다는 게 문제다.
영진위는 10월 말 '한국영화산업 활성화 단기대책'을 발표하면서 수익성 악화로 투자 관망상태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영진위가 추산한 올해 영화 제작 편수는 전년 대비 40% 감소한 40편 정도다.
강한섭 영진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적정 편수에 대한 의견으로는 50편도 있고 60~70편도 있으며 2006, 2007년의 100편 이상도 가능하겠지만 영진위는 60여 편으로 파악했다"며 "그러나 현재 40편에도 못 미친다는 위기감이 있다"고 말했다.
◇다양한 자구노력
투자·제작 위축을 타개하려는 영화계의 노력은 전방위적이다.
영화인들은 자체적으로 투자 위험을 줄이기 위해 제작비를 낮추고 시장을 넓히려는 시도를 이미 다각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저예산 영화 기획이나 시장을 넓히기 위한 해외 공동제작이 늘었다. 배우들이 '몸값'을 대폭 낮추거나 영화 제작비 일부를 투자하는 경우도 부쩍 많아졌다.
극장 밖에서 돈을 벌려는 움직임도 이미 활발하다. 웹하드에서 영화를 합법적으로 내려받을 수 있는 씨네21i의 서비스가 올 초 시작됐으며 국내에서 처음 제작된 IPTV 영화 4편이 이번 달에 공개된다. 케이블 영화채널의 공동 투자를 받아 일찌감치 판로를 다진 '초감각 커플' 같은 영화도 있다.
극장에서는 비탄력적인 가격정책으로 관객을 유도하는 전략도 나왔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칸영화제 버전 상영, '신기전'의 유료 시사 확대 등이다.
이런 와중에 영진위는 투자 경색을 해소하기 위해 800억 규모의 펀드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오랜 불황으로 막혀있는 한국영화의 숨통이 트일지 결과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