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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 한 달…산업계 "나 떨고 있니"

현금확보 사활…일부는 외국기업 M&A 추진

"현 상황은 '견디느냐, 쓰러지느냐'의 벼랑 끝에 서 있는 형국입니다."

미국의 주택담보대출(모기지) 부실에서 출발한 금융 쓰나미가 뉴욕 월가(街)를 휩쓸고 전 세계로 확산하면서 국내 산업 생태계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덮쳐오자 기업들이 공포감에 떨고 있다.

중소기업들은 이미 파랗게 기가 질려 비명조차 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환 헤지를 위해 가입했던 통화옵션상품 '키코(KIKO)'에 물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손실을 넋을 잃은 채 바라보며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에 좌불안석이다.

비교적 견실한 재정기반을 구축하고 있는 대기업마저 결코 안심할 수 없다며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 실물경제로 옮아붙는 위기의 불길 앞에 11년 전 외환위기의 악몽을 떠올리며 생존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 "안정적인 유동성을 확보하라"

원.달러 환율이 폭등하던 지난 8일 이명박 대통령은 "금융위기 때문에 달러를 사재기하는 기업이나 국민이 있다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지난번 같은 외환위기는 없다고 보는데, 달러가 자꾸 귀해지니 달러를 사재기한다"고 말했다. 달러를 쌓아두고 시장에 내놓지 않는 기업들에 대한 공개 경고였다.

하지만 삼성전자 등 일부 기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업들의 신경은 온통 유동성(현금) 확보에 쏠려 있어 이런 최고 통치자의 강력한 경고조차 들리지 않는 듯하다.

금융위기가 신용경색을 부르고 그 결과, 자금흐름이 막히면 단기 운전자금 부족으로 자칫 수익을 내고도게 쓰러지는 흑자도산의 폭탄을 맞을 수 있다며 거의 본능적으로 유동성 확보에 매달리고 있다. 지금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현금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국내 굴지의 재벌그룹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기업이 가장 싫어하고 경계하는 것이 불확실성이다. 공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기업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책은 안정적인 유동성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보통 기업은 사업을 하면서 일정한 부채를 안고 있다. 부채는 회사 운영에 윤활유와 같은 순기능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 부채는 특히 경기가 좋고 기업이 잘 나갈 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존 부채를 롤오버(만기연장)하거나 금융기관에서 새로운 자금을 차입 또는 매출을 올려서 얻은 영업이익으로 갚으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융위기 후폭풍에 따른 신뢰 파탄으로 돈이 제대로 돌지 않을 때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불안심리 확산으로 `돈맥 경화' 현상이 발생, 돈의 흐림이 끊길 경우 만기가 돌아온 부채를 갚지 못하고, 대금을 줘야 할 곳에 제때 지급하지 못하게 되는 등 어떤 기업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비오는데 우산 뺏는' 격으로 자칫 금융기관에서 자금회수에 나설 경우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대기업들도 너나 할 것 없이 가능한 한 미리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때를 떠올리면서, "당시 대우그룹이 해체된 것은 현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싼 이자를 준다고 해도 사채시장에서조차 돈을 구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금줄이 말랐기 때문이었다"며 "유동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보수적 경영으로 방향 급선회

내일을 알 수 없는 시계 제로의 상황에서 기업들은 몸을 잔뜩 움츠리며 보수적 경영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우리나라 경제의 해외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환율이 급등하고 주가가 곤두박질하는 등 금융시장이 요동치는 상황에서 위축된 표정이 역력하다.

기업들은 세계 금융경색에 따른 실물경기 둔화가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다.

한 정유회사 관계자는 "환율 급등으로 엄청난 환차손을 입고 있는 상황에서 앞으로의 경제전망도 불투명해 보수적으로 경영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일부 대기업은 이미 짜놓은 4분기 투자계획을 다시 점검하고 있다. 또 내년 사업계획을 어떻게 수립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고 있다. 세계적인 경기악화로 그동안 국내 경제를 떠받쳤던 수출이 둔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가운데, 그렇지 않아도 위축될 대로 위축돼 있는 내수가 더욱 가라앉을 경우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경제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만큼, 투자 기피까지는 아니더라도 계획했던 투자 우선 순위를 조정하고 투자 시기를 늦추는 등 애초 투자계획을 손질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기업들은 아울러 리스크(위험)를 최소화하기 위해 리스크가 될 만한 요인들을 샅샅이 뒤져 실제 위험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사전 차단하는 데 전력을 쏟고 있다.

SK그룹은 나라 안팎의 다양한 경영 변수를 반영, 분석한 `시나리오 플랜링 경영전략'을 마련해 위기상황에 맞춰 시나리오별로 대응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SK그룹 관계자는 "일각에서는 현재의 금융위기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는 실정"이라며 "`프럼 월스트리트 투 메인 스트리트'(From Wallstreet To Main street)라는 말도 떠돌고 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이는 위기가 월가의 울타리를 벗어나 대로로 번질 때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는 말"이라며 "도산하는 기업이 속출할 것이라는 소문으로, 지금과 같은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신속한 상황 판단과 단단한 체력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 "위기 속에 기회를 포착하라"

그렇다고 기업들이 마냥 위기 뒤에 숨어 꼼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일부 기업들은 `위기 속에 기회가 있다'며 눈을 부릅뜨고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글로벌 위기 자체에 기회 요인들이 있으며, 따라서 전 세계적으로 경제가 돌아가는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기회를 물색하고 있는 것이다. 정중동 속에 사업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특히 자금력이 있는 기업의 경우 외환위기 당시 미국 등 해외기업들이 우리나라 기업 사냥에 나서 떼돈을 벌었던 방식대로 실속있는 외국업체 인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삼성전자가 대표적이다. 삼성전자는 최근 세계 1위 플래시메모리카드업체인 미국 샌디스크 인수에 공개적으로 나섰다. 삼성전자는 인수 희망가로 58억5천만 달러를 제안한 상황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샌디스크 인수 협상에 대해 "협상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돼 더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재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샌디스크 인수에 결국은 성공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와 함께 비교적 재무구조가 든든한 기업의 오너나 최고경영자 등을 중심으로 금융위기 여파로 기업 주가가 하락한 틈을 타 직접 자사주를 사들이고 있다. 최근 악화한 주식시장에서 자사주를 싸게 매입해 지분을 확대함으로써 경영권을 안정시키고 기업 가치도 끌어올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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