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력 혹은 창의성이 화제다. 아니 화두다.
일찌기 사회입문을 시작한 유치원생·초등학생부터 입시를 앞둔 중고생까지, 취업 준비에 바쁜 대학생부터 윗선에 눈에 띄는 기획서를 내놔야하는 회사원까지. 심지어 과거엔 고리타분,복지부동,무사안일의 대명사로 불렸던 공무원 사회가 앞장서서 창의 행정, 창의 교육 등을 소리높여 외친다.
오죽하면 문학평론가 도정일 선생이 이렇게 얘기했을까.
"...창의적 교육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교육 구호들에 따르면 그것은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인간을 길러내는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교육이다. '경쟁력'이란 구호가 강조한 것은 '경쟁력있는 교육'인데 경쟁력있는 교육이란? 역시 구호에 따르면 그것은 경쟁력있는 인재를 길러내는 창조적이고 경쟁력있는 교육이다...(중략) 이런 동어 반복은 전혀 창조적이지 않다. 인간의 언어 사용법 가운데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사람 죽이는 어법이 동어반복이다."
어제 사내 연수에서 창의력 특강을 들었다. 강사는 'TBWA'라는 광고회사에서 ECD(Executive Creative Director)란 직함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이 분은 자신이 '태권도복싱레슬링어소시에이션'에서 '익스트림리 크레이지 독'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다고 창의력있는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다소 창의성 떨어지는 외모를 가진 이 분은 자신이 만든 수많은 광고 가운데 주목받은 걸 강의 시간에 보여줬는데, '생각이 에너지다', '현대생활백서 시리즈', 등등 세간의 화제가 됐던 광고들이 많았다.
배우 홍석천과 영화감독 이준익을 합쳐놓은 것 같이 생긴(그럼 창의성있는 외모인가?)이 분은 자신이 만든 이런 광고들이 어떤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는지, 그리고 그 아이디어는 어디서 툭 튀어나오게 됐는지를 설명했는데, 내가 흥미로웠던 건 실제로 많은 히트 광고들이 별 것 아닌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됐다는 점이었다.
특히 그가 개인적으로 꽂힌 음악이나 그림을 프로덕션에 제시해 광고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공감이 갔다. 나도 '뉴스추적'같은 시사보도 프로그램이나 'SBS스페셜'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 경험해본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은 경험하지 않고 들어도 막연히 이해할 수 있긴 하지만 실제로 그런 단계에 올라서기까지는 딱 어떤 느낌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일테면 이런거다. 뉴스가 됐든 다큐가 됐든 처음에는 촬영해온 동영상을 가지고 편집을 해놓은 뒤 거기에 적당한 음악을 찾는 단계다. 무엇을 찍을 것인가에 대한 아이디어가 먼저 있고 음악은 이 아이디어를 포장하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다.
이 단계를 지나면 동영상을 찍다보면 음악이 떠오른다. 혹은 기사나 대본을 쓰다가 음악이 떠오르기도 한다. 물론 이렇게 되려면 평소 음악을 꾸준히 들어둬야 한다. 1단계를 열심히 하다보면 자연히 음악을 많이 듣게 되고 프로그램과 연관시키게 된다.
2단계를 한참 하다보면 어떤 경지에 이르게 되느냐. 이제는 좋은 음악을 들으면 글이 쓰고 싶어지고 영상이 그려진다. 음악에 꽂히면서 그 선율에 맞는 장면이 머리 속에 구체적으로 투사되고 어떤 때는 편집까지 된다. 첫 단계와 비교하면 주객이 전도되는 순간이다. 글이나 영상에 맞는 음악을 찾는 게 아니라 음악이 영감을 불어넣어 이야기를 찾게 만들고, 대본을 쓰게 만들고, 영상을 찍게 만드는 것이다.
이 단계마저 지나면 음악이, 그림이, 나아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자극이 돼 창의성을 발휘하고 싶게 만들겠지만 나의 촉수는 그렇게까지 민감한 단계에 이르진 못했다. (실제로 홍석천+이준익 이 분은-TBWA 박웅현 상무님- 그림을 보고 아이디어가 떠올라 최근 한 광고를 만들었다. 요즘 TV에서 볼 수 있는 SK브로드밴드의' See the Unseen'광고다)
가장 창의성을 필요로한다는 광고업계에서 잘 나가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사는 이는그러나 뜻밖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평범한 말을 했다. 물론 '새로운 시각만이 있을 뿐'이라고 덧붙였지만.
그런데 어제 강의에서 내 가슴에 가장 큰 파문을 남겼던 말은 이거였다.
"많이 감동받은 사람이 아이디어를 냅니다. 평소 감동받은 것들이 쌓여 필요할 때 다 나오게 돼있어요."
화가나 시인, 예술가들은 보통 사람은 못보는 것들, 별 것 아닌 것들, 아니 안보고,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느끼고 감동받는다는 것이다.
그랬던 것 같다. 내가 가장 창의성을 잘 발휘할 수 있었던 때는 좋은 음악을 들으면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감동하고, 좋은 글을 읽으면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하게 뿌듯해하고, 궁핍한 화가가 혼으로 그린 그림이나 투혼을 불사른 헝그리 복서의 시합을 보면서 먹먹해졌을 때였던 같다.
그런 감동들은 다 프로그램으로 연결됐다. 또, 자나깨나 프로그램만을 생각하던 열정이내 안에 있는 감동 촉수들을 불러 일으켜 세상으로 뻗어놓았던 것 같다.
결국 창의성이란 '생각의 탄생'같은 책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어려서부터 창의력 수업을 듣고 과외를 한다고 생기는게 아니라 뭔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거기에 열정적으로 빠지고, 감동하고, 더 잘하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성취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나타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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