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힐...아마도 부시 대통령이나 라이스 장관 정도를 빼고는 우리 국민들에게 가장 익숙한 이름의 미국 관료가 아닌가 싶습니다. 주한 미 대사를 지낸 경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을 떠나고서도 한반도와 떠나 살 수 없는 운명의 가시밭길에 들어섰기 때문이겠죠. 바로 20년을 끌어 오고도 한 발짝을 앞으로 내딛기 힘든 북한 핵 문제를 다루는 6자 회담의 미국 측 수석대표를 맡았기 때문입니다.
힐 차관보를 주로 만날 수 있는 취재현장은 그가 한국에 도착할 때 인천공항 입국장이거나, 혹은 외교부 청사, 그리고 6자회담이 열리는 베이징, 그리고 북미회동과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아세안 지역안보포럼이 열렸던 싱가포르 정도입니다. 외교 분야에서 오래 일한 기자들은 그만큼 힐을 자주 만나 왔기 때문에 인터뷰나 질문을 시작할 때 그에게 "Hi, Chris"라고 부르며 친근감을 표시하곤 하죠. 하지만 그도 나름 고위관료인지라 새파랗게 젊은 기자들이 이름 불러대며 하는 질문이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은 것 같더군요. 그렇다고 해서 "Hello, Deputy Secretary Hill" 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번거롭고 해서 생각해낸 묘안이 "Ambassador Hill"입니다. 현재의 보직을 나타내는 단어는 아니지만 외교관으로 오를 수 있는 최상위 직분인 대사라는 호칭은 쉽게 존경의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죠. 효과도 톡톡했습니다. 6자 회담이나 북미회동 관련 취재 때마다 한국, 일본, 중국, 미국 등에서 1백여 명 가까운 취재진이 그를 구름처럼 둘러싸기 때문에 질문할 기회 조차 쉽게 오질 않습니다. 일단은 포토라인 가장 앞에서 그에게 최대한 근접해야 하고 여러 기자들이 벌떼처럼 질문 공세에 나서는 틈새를 노려 가장 잘 들리게 그의 주의를 끌어야 하기 때문이죠.
지난 4월 싱가포르에서 북미회동이 있을 때였습니다. 대다수의 기자들은 힐 차관보를 뭐라고 불러야 할 지 몰라 일단 무대포로 본론으로 들어가더군요. 존칭이나 경어는 간 데 없이 말이죠. 그 때를 노렸습니다. 저는 힐을 향해 외쳤습니다. "Ambassador Hill!! Ambassador Hill!!" 아수라 장 같은 창이공항 입국장의 상황에 짜증이 묻어나던 힐의 표정이 바뀌면서 저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군요. 그리고 당시 우라늄 농축과 시리아 핵 개발 협조 의혹 등 중요한 현안에 대해 미국의 견해를 알아볼 수 있는 질문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말이죠.
사실 기자의 입장에서 보면 힐 차관보는 꽤 Press friendly한 취재원입니다. 그의 전임인 제임스 켈리가 훌륭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과묵하고 재미없는 스타일인 반면, 힐은 어떤 현안이든 나서서 자기 입장을 밝히기를 꺼리지 않고 때로는 언론의 취재공세를 즐긴다는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때문에 기자들 사이에선 힐 차관보가 한국에 올 때 만약 어떤 기자도 공항에 취재를 나가지 않는다면 힐 차관보가 심각한 금단 현상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 전개되는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싼 논란과 접점, 그리고 미묘한 상황의 변화를 보면 언론에 적극적인 힐 차관보의 이런 스타일도 치밀하게 계산된 전략임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습니다. 최근 6자회담의 합의를 근본부터 흔들고 있는 북한의 불능화 중단과 재처리시설 원상복구 시도가 본격화되면서 미국과 한국 등 6자회담 당사국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악화설까지 겹치면서 6자회담의 주축을 이루던 북미간 대화마저 거의 중단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럴 때쯤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에서 시기가 절묘한 특종이 터져 나옵니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 '주권국이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의 무리한 핵 신고 검증 요구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이와 관련된 미 국무부의 내부 문건이 통째로 유출된 것이죠. 이 기사는 사실상 힐 차관보를 비롯한 미 국무부 내의 협상파가 6자회담의 판을 깨려는 비확산 강경파 그룹을 경계하기 위한 여론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북한의 강경노선 전환에 대한 일정한 책임이 받아들일 수 없는 미국의 요구에 있다는 점을 부각시켜 어떻게든 협상 국면을 유지시켜 보려는 것이죠.
사실 비둘기파, 혹은 협상파로 불리는 힐 차관보를 비롯한 세력들은 그동안 북핵 협상이 고비를 맞을 때마다 국방부와 부통령실의 강경파들로부터 집중적인 견제와 비판에 시달려 왔습니다. 그런 비판과 견제의 충실한 도구 역할을 했던 것도 바로 언론들이었습니다. 시리아 핵 개발 의혹과 관련된 정보들이 언론을 통해 흘러 나오면서 지난 해 연말에 마무리됐어야 할 북한의 불능화는 올 10월까지 완료시점이 다시 미뤄졌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할 북한 핵 문제에 있어 언론 역시 그 방향이 문제의 해결이든 아니면 상황의 악화든 간에 한 축을 분명히 담당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북한의 핵 재처리 시설 복구와 IAEA 사찰 추방 통보로 6자 회담의 틀거지 자체가 휘청거리는 상황에서 힐 차관보가 다시 전면에 나서고 있습니다. 힐 차관보는 30일 한국에 도착해 협의를 가진 뒤 북한을 방문한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힐 차관보는 사실 지난 7월의 북핵 6자 수석대표 회담에서 시설방문, 인터뷰, 서류 검토 등 핵 검증 3원칙에 합의한 뒤로 핵 신고 검증 문제에 있어서는 주도권을 국무부 내 강경그룹인 비확산그룹에 내주고 배제되고 있다는 관측들이 나돌았습니다. 실제로 한동안 힐 차관보의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내 비확산그룹이 주도한 검증안을 북한이 완강히 거부하고 6자회담의 합의를 하나씩 허물어가자 '김정Hill'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북측이 신뢰하는 협상 파트너인 힐 차관보가 다시 등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힐 차관보가 이번에 마주한 상황은 기존과는 조금 달라 보입니다. 힐 차관보가 이뤄낸 기존의 6자회담 성과들이 '검증'이라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해야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인데, 지금은 바로 그 '검증'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미국과 한국 정부 내의 일부 강경파들은 '진실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으며, 힐의 사기극이 곧 탄로날 것'이라며 협상파들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대북 강경파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고 6자회담의 붕괴 위기를 돌파해야 하는 힐 차관보가 이번 방북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느냐는 단기적으로 6자 회담의 성패는 물론 이후 한반도 정세와 미국의 새 정부 출범 이후 대북정책의 변화에도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언론은 힐 차관보에게 약이 될 지, 아니면 독이 될 지도 또 다른 관전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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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정치부에서 외교부를 맡고 있는 윤창현 기자는 1996년 SBS 공채로 입사했습니다. 아침뉴스인 '모닝와이드' 경제코너에서 오랫동안 시청자들을 만났습니다. 시사고발프로인 '뉴스추적'에서는 우리 법조계의 문제점을 심도있게 파헤친 <전직교수 김명호 그는 왜 법을 쐈나?>편으로 2007년 한국기자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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