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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과목 줄이는게 능사일까요

제가 고등학교 2학년일 무렵 지리 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 짝이 세워놓은 지리 교과서를 방패 삼아 수학 교과서를 몰래 꺼내놓고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다음 날이 수학 시험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리 선생님은 낌새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셨던지 조용히 다가와 그만 현장을 적발했습니다. 그 선생님은 얼마나 대노하셨던지 그 친구의 수학 교과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리셨습니다. 내 수업에 대한 모욕이라고 하시면서. 무척 자존심을 상해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좀 심하다'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만큼 자신의 교과와 수업에 대해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요즘 고등학교 교실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선생님들은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백이면 백, '모른척 할' 것입니다. 왜냐구요? 그 학생이 지리 교과를 수능에서 선택과목으로 택하지 않았는데 억지로 수업을 들으라고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죠. 요즘 고등학교 교실 풍경, 특히 사회나 과학 탐구 영역 과목의 수업 시간은 그야말로 가관입니다. 앞줄의 한 열댓명만 수업을 듣고 있고 나머지는 자거나,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거나, 다른 과목 참고서를 버젓이 꺼내놓고 공부합니다. 그래도 해당 교과 선생님들은 그런 학생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선택' 때문입니다.

그럼 과거에 학교를 다니셨던 분을 위해 '선택제도'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지난 1999년에 세워진 제7차 교육과정 개편의 가장 큰 특징은 '선택제'를 도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 1학년까지만 '통합교과', 즉 국민 누구나 똑같은 과목의 공부를 하게 한 뒤에 고교 2, 3학년들은 자신이 배우고 싶은 과목을 선택하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나중에 역사학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 과학 과목은 물론 법과 정치, 경제, 지리 이런 과목들은 다 제껴두고 국사, 근·현대사, 세계사 등만 선택해 배울 수 있게 됐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대학교 가서 전공을 선택하기에 앞서 고등학교 때부터 관련 공부를 특화하고 심화해서 배울 수 있게 하자는 취지입니다. 미국 시스템을 많이 본딴 것으로 좀더 공급자 대신 수요자 위주의 교육을 하자는 기본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듣기에는 매우 훌륭하고 이상적인 제도로 보입니다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 교육을 얽매고 있는 대학 입시와의 관계를 간과한 것이죠. 고교 2, 3학년때 선택하는 과목은 사회탐구 영역에서만 8~9개 정도입니다. 이 과목을 다 수능 시험을 보게 하면 학생들의 시험 준비 부담이 너무 크죠. 그래서 현행 수능에서는 각 영역에서 최대 4과목까지만 선택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인문계 학생은 사회탐구 영역에서 최대 4개, 자연계 학생은 과학탐구 영역에서 최대 4개. 그런데 이렇게 고교 수업과 대입 시험의 틀거리를 짜놓고 보니 앞서 말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능에서 시험을 보는 4개 과목은 수업을 제대로 듣겠지만 나머지 선택하지 않은 4~5개 과목은 수업에 참여할 유인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시간에 체력을 비축하거나, 다른 '수능'에 포함되는 과목의 공부를 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닙니다. 이 영역의 과목들 사이에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예를 들어 물리는 과목 특성상 생물이나 화학보다는 더 어렵습니다. 암기보다는 원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과목입니다. 그러다보니 공부를 어지간히 잘하는 학생 아니고는 물리를 선택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표준점수제가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물리 선택마저 막고 있습니다. 설명이 간단하지 않지만 억지로 해보자면, 표준점수제도는 평균이 낮을 수록 표준분포가 높을 수록 더 좋은 점수를 받게 됩니다. 생물 과목 만점과 물리 과목 만점을 받은 학생의 표준점수는 서로 다를 수 있고 일반적으로 생물 만점자가 더 높은 점수를 받습니다.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대부분 생물을 선택했기 때문에 이들이 평균을 낮춰주고 분포를 넓혀주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물리를 선택한 학생들은 설사 만점을 받더라도 다른 과목 선택자들에 비해 더 낮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너도나도 물리를 기피하게 되고 심지어 물리학과를 지망한 학생도 고등학교 때 물리 공부를 하지 않게 됐습니다. 혹시 각 대학에서 학과에 따라 선택과목을 지정하면 되지 않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바람직한 말씀입니다만 대부분의 대학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입시전형을 까다롭게 만들어놓으면 지원하는 학생수가 대폭 감소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경쟁률이 떨어지고 그만큼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을 받기 어렵다고 대학들은 걱정합니다. 심지어 어떤 대학들은 인문계 학생들이 이공계 학과를 지원하는 것을 허용하기도 하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황 탓에 '선택제'가 도입된 이후 고등학교에서는 탐구영역 과목의 수업 분위기가 그야말로 '개판'이 됐고, 과목들 사이에 쏠림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며 그 결과 대학들은 신입생의 학력 저하에 울상입니다. 그나마 8~9개 선택 과목 가운데 최대 4개 과목을 수능으로 시험볼 때도 이런 지경인데 과목수를 더 줄이면 어떻게 될까요? 보나마나 고등학교 교실 풍경은 더 황당해질 것입니다.

그럼, 수능 과목수를 줄이자고 주장하는 분들의 바람대로 학생들의 학업 부담이 줄고 따라서 사교육비 지출도 줄까요? 자! 내가 수험생, 또는 몇년 안에 대입 시험을 봐야하는 학생이라고 가정해봅시다. 탐구 영역에서 시험보는 과목이 줄었다면 그 과목을 공부하던 시간에 독서를 하거나, 취미생활을 하거나, 아니면 친구들과 놀까요? 어차피 수능으로 성적순을 매겨야 한다면 그 시간을 다른 '수능' 과목에 더 투자하지 않을까요? 또 사회나 과학 과목 1~2개 줄었다고 그 과목에 들던 사교육비를 쓰지 않고 아끼게 될까요? 국·영·수나 논술 과외 공부에 더 쓰지 않을까요? 조금만 생각해봐도 답이 뻔한 문제들입니다.

수능이 우리 교육 현장에 미치는 막강한 영향력을 고려할 때 수능 과목수를 조정하는 것은 단순히 학생 부담, 사교육비 이런 현실적인 문제로만 접근하지 말고 우리 교육의 이상과 목표, 철학에 근거해 고려해야 합니다. 지금 학생들의 학업, 특히 수능 시험 준비 부담이 너무 큰지, 작은지, 그런 부담이 탐구 영역의 과목수를 줄이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을지, 이 경우 우리 학생들의 학업 성과나 학력에는 문제가 없는지, 궁극적으로 우리 고등학교의 현실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최적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대부분의 교육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참고로 앞서 사례로 들었던 지리 선생님은 수업을 대단히 잘하시는 분이었고 그 분이 가르쳐준 각종 지리 지식들은 지금까지 유용하게 쓰이며 제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당시 지리 수업을 듣지 않고 수학 공부를 더했다면 제 인생에서 많은 손해를 봤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편집자주] '보도국의 신사'로 불리는 우상욱 기자는 1995년 SBS 공채로 입사해 사회, 정치,경제부를 두루 거치며 지금은 사회1부의 교육담당 기자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관심이 큰 교육현장의 이야기를 차분하고 성실한 취재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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