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 드립니다. 영국에는 어제 첫눈이 내렸습니다. 한국은 요즘 날씨가 어떤가요? 학기 말이 다가오면서 공부가 밀려서 한동안 글 쓸 여유를 내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할 일이 태산이긴 한데, 이렇게 글로 남기고 싶은 얘기들이 많아서 공부를 잠시 미뤄둔 채 밤 늦게까지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습니다.
이 글은 제 블로그(http://ulog.sbs.co.kr/shkim0423)에도 올렸습니다. 또 뵙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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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우가 며칠 전 학교에서 받아온 통신문을 보니 11월 16일 금요일은 'Bad hair day'란다. 머리 모양을 마음대로 하고 가는 대신 자선기금을 1파운드씩 내는 날이라고 한다. 통신문에는 '학교 선생님들도 참여할 예정이니 기대해 달라'며, 각자 창의성을 발휘해 달라고 쓰여 있었다.
참 별난 이벤트다 생각하며, 금요일 아침, 은우 머리를 묶어 정수리에 분수처럼 솟아오르게 만들어줬다. 은우 등굣길에 보니 아이들 머리가 정말 각양각색이다. 대머리 가발을 쓰고 온 아이도 있고, 빨간색 스프레이를 잔뜩 뿌리고 온 아이, 머리를 수십 가닥으로 땋아가지고 온 아이도 있다.
더 재미있는 건 선생님들이다. 교장선생님도 총천연색 가발을 쓰고 왔고, 한 남자 선생님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하이드처럼 산발을 하고 있다. 이런 선생님들이 학교 입구에서 모금함을 들고 서 있으니 'bad hair'를 하고 온 아이들이 1파운드 동전 하나씩 넣고 들어간다. 너무 재미있는 풍경이라 사진을 찍으려고 선생님 허락을 받았는데, 정작 은우는 창피하다며 머리를 가리고 교실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결국 선생님들만 찍었다.
은우는 학교에서 돌아오더니 "우리 반에서 내 머리가 제일 웃겼어. 선생님이 나 보고 계속 웃었어" 하더니 약간의 불만을 덧붙였다. 다른 여자아이들은 대부분 말 그대로 'bad hair'라기보다는, 평소 못하던 화려하고 예쁜 스타일로 머리를 꾸미고 왔다는 것이다. 마침 이 날 은우 친구 멀리사와 올리비아, 둘이 학교 끝나고 집에 놀러왔는데, 은우 말이 맞긴 맞는 것 같다. 멀리사와 올리비아는 은우 머리가 아기 같아서 은형이랑 똑같아 보인다며 계속 은우를 'Baby 은형, Baby 은형' 하고 부르며 웃어댔다.
우리 집에서 찍은 사진. 은우 옆의 멀리사는 화려한 리본을 묶고 왔고, 올리비아는 빨간색 스프레이를 뿌리고 왔다. 은우는 '기념사진' 한 장 찍고 나더니 이러고 있기 싫다며 입을 삐죽거리며 머리를 풀어버렸다.
그런데 멀리사가 '오늘 'Children in need' 쇼 보실 거죠? 7시부터 하는데.' 하고 묻는다. 은우 학교에서 자선기금 모금한 것이 'Children in need'를 위한 것이라는 얘기를 얼핏 듣긴 했었는데, 멀리사 얘기를 들으니 이게 매년 BBC에서 하는 캠페인 이름인가 보다. 올리비아도 얘기하는 걸 들으니 이 쇼를 손꼽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멀리사 아빠가 멀리사를 데리러 왔을 때, 부녀간의 대화를 들으니 이렇다.
"나 오늘은 늦게 자도 되지, 아빠?"
"그래, 오늘은 봐줄게. Children in need 봐야 되니까."
멀리사가 먼저 가고 난 뒤에 올리비아를 데리러 온 올리비아 엄마 아빠도 '집에 빨리 가서 Children in need' 봐야지' 한다. 올리비아 아빠는 '오늘 Bad hair day' 한 게 'Children in need' 때문이었다'며 지난해에는 기금을 얼마나 모금했다고 액수까지 친절하게 얘기해 준다. Children in need가 온 영국 국민의 관심사인 모양이다.
도대체 뭔가 싶어서 텔레비전을 틀었더니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하는 모금 방송과 크게 다를 바는 없다. Children in need 캠페인의 상징인 Pudsey bear(안대를 한 노란색 곰돌이)가 등장하고, 중간 중간에 불우 어린이들의 스토리를 담은 제작물을 틀고, 스파이스 걸스 같은 유명 가수나 배우들이 등장해 노래도 하고, 모금 방법 안내도 하고, 기금 접수처를 연결해 현장 상황을 전달하고, 뭐 이런 식이다.
은우는 Children in need 얘기를 하루 종일 들어서 그런지, 밤늦게까지 쇼를 열심히 봤다. 프로그램을 보다 보니 각 학교마다 머리 모양을 자유롭게 하거나, 교복 대신 자유롭게 옷을 입거나, 집에 있는 곰돌이 인형을 학교에 가져오거나, 이런 특별한 행사에 참여하는 대신 자선기금을 내게 하는 행사를 한 모양이다. 은우에게 '네가 오늘 아침에 낸 1파운드도 지금 텔레비전에 나오는 총 모금액에 포함돼 있는 거야' 했더니,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다.
다음날 아침 뉴스를 보니 올해 모금액이 1,900만 파운드를 넘어 최고를 기록했다고 한다. 은우는 '그럼 얼마나 되는 거야?' 하면서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은우가 한국에서 학교 다닐 때도 가끔씩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내긴 했지만, Bad hair day 같은 행사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이렇게까지 크게 관심을 표명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Children in need 캠페인의 성공은 BBC의 대대적인 홍보 덕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닌 것 같다.
나는 Children in need에 이렇게 관심을 쏟는 영국 사람들이, 뭐랄까, 참 재미있다. 방송국의 모금 캠페인과 방송에 이렇게 전국민적인 관심이 쏠리고, 각종 '창의적인' 이벤트를 동원하는 건 그만큼 이 사람들의 삶이 단순하고 소박하다는 뜻 아닐까. 여유롭다고 해도 좋고, 심심하다고 해도 좋다. 세상살이가 복잡하고 피곤하면 이런 데 크게 관심을 쏟기 어려운 법이니까.
Children in need 캠페인에 이렇게 큰 관심이 쏠리는 것은 영국인들이 평소 자선, 기부 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곳곳에 널린 Charity shop들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이런 Charity shop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기증받은 중고 물품들을 아주 싸게 팔고 그 수익금을 자선기금으로 내놓는다. 내가 사는 워릭대학교 주변만 해도 작은 마을이지만 '옥스팜' 같은 Charity shop이 세 곳이나 있다. 한국에도 '아름다운 가게' 같은 곳들이 있지만, 영국에 비하면 아직 초보단계인 듯하다.
내년 Bad hair day에는 은우 머리를 올해보다 좀 더 특별하고 예쁘게 해 주고 싶은데, 내년 이맘 때면 한국에 돌아가 있을 때이니 '만회'의 기회는 없는 셈이다. 그래도 은우가 영국에서의 'Bad hair day'를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면 좋겠다. 그저 재미난 이벤트로서만이 아니라 이 이벤트에 담긴 특별한 의미까지 기억해 준다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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