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행기도 아닌가보네!"
벌써 몇 번째인가? LA공항에서 뻗친 지 닷새째. 하루에 4~5편씩 있는 모든 비행기를 다 뒤진 '무식한' 취재였습니다.
이른바 '뻗치기'는 지난 일요일인 11일부터 시작됐습니다. 이미 서울 법무부와 미 국무부, 그리고 미 연방검찰의 움직임이 시작됐다는 보도가 나온 상태. 워싱턴에서 LA로 날아올 때만 해도, 송환이 임박하면 최소한 비행기 편명과 날짜는 알려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법무부 장담대로 '철통보안'이었습니다. 항공사, 법무부, 검찰, 경찰, 국정원... 알고 있는 모든 취재원을 쑤셔도 '김경준' 한 마디만 나오면 "모른다"는 답변 뿐. 남은 방법은 단 하나 뿐이었습니다. 비행기 입구를 지키는 것입니다. 가장 무식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비행기표를 끊습니다. 그리고 줄 서서 검색대를 통과합니다. (국제선 검색대 통과가 얼마나 까다롭고 짜증나는지 따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탑승구 앞으로 가 비행기를 지킵니다. 탑승객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김경준이 탑승구가 아닌 비행기 계단을 통해 뒷문으로 탈 것이라는 사실은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6밀리 카메라를 비행기 트랩과 꽁무니 비상계단에 맞춰놓고 정말 '눈이 빠지게' 지켰습니다. 비행기가 떠나기 직전까지 지키다 탑승객을 확인한 뒤 막판에 탑승을 포기하고 게이트를 빠져나옵니다. 그리곤 창구로 달려가 표를 내밀고 환불해달라고 떼를 씁니다. (똑같은 작업을 하루에 4~5차례씩 했는데, 스무번까지는 세다가 포기했습니다. 비행기 한 대 보내는데 보통 3시간 걸리니까... 계산도 잘 안됩니다.)
상황은 14일(수)에 돌변했습니다. LA 특파원 오동헌 차장의 취재망에 뭔가 걸렸습니다. 전화통을 붙잡고 추가취재를 한 결과 오 차장은 '15일 아시아나 낮 비행기'라는 팩트를 퍼즐 맞추듯 찾아냈습니다. (오 차장의 사업상(?) 비밀이니, 자세한 취재원은 안 밝히겠습니다.)
15일(목) 새벽 6시, 김경준의 누나 에리카 김이 연합뉴스 전임 LA 특파원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구치소 출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드디어 오늘 가는구나. 혹시 비행기 편명까지 풀이 돼서 모두 타는 것 아닌가?"
불안한 마음 속에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이미 50여 명의 기자들이 공항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대한항공 10시, 11시 비행기, 아시아나 12시 비행기 표를 끊고 초읽기에 들어갔습니다.
검찰 수사관들이 공항에 나타나고 미 연방 마샬들이 등장했습니다. 그 상태에서 10시, 11시 대한항공 비행기를 떠나 보냈습니다. 검찰 수사관들도 막판에 예약했다, 탑승 취소를 반복했습니다. 비행기 떠나기 막판까지 김경준의 탑승은 예약상으로도, 눈으로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12시 아시아나 201편 한 대. 우리가 찍어 놓은 비행기였습니다. 50여 명의 기자들도 모두 이 비행기를 탈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비행기 탑승이 끝나는 시간에도 김경준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탑승객 명단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수사관 탑승은 확인되는데, 정작 김경준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오 선배! 검찰의 유도에 걸린 것 아닐까요? 수사관들은 타고 김경준은 빼돌린 것 아닐까요?"
"아냐, 확실해! 밀어붙이자. 아침뉴스 녹음은 했나?"
"방송 준비는 다 끝났는데, 만에 하나 이 비행기가 아니고, 샌프란시스코나, 다른 곳에서 떠나면 어떡하죠?"
"그럴리 없어, 분명 이 비행기야, 원 차장! 밀어붙이자. 난 아시아나 비행기를 탈테니, 밖에서 바람 좀 잡아라!"
타사들은 탑승한 승객들을 동원해서까지 기내에서 김경준 얼굴을 확인하느라 분주했습니다. 모두 김경준이 없다는 전화 내용 뿐이었습니다.
"이 비행기도 아니네!" 바람을 잡고 타사 기자들을 끌고 나왔습니다. 그 사이 오동헌 특파원은 기내로 들어갔습니다.
이를 눈치챈 K,M,YTN 3사 기자들이 탑승을 할까말까 고민하던 막판 5분. 비행기 문 닫기 직전 김경준이 기내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습니다.
비행기 문이 닫히고 활주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오 선배! 보여요?"
"안 보인다."
"안 탄 것 아니예요?"
"아냐, 39열부터 41열까지 9석이 비어있어. 기내 어딘가에 숨어있을거야."
"그럼, 화장실?"
"뒤져볼게. 원 차장. 이미 엎지러진 물이니까, 밀어붙이자!"
"알았어요. 뒤치다꺼리는 내가 할테니까 잘 가세요."
그리곤 전화통화가 끊어졌습니다. 비행기는 활주로를 이륙했습니다. 막판에 우르르 내린 기자들은 우왕좌왕했습니다.
"김경준은 없고, SBS는 타고, 이거 뭐야? SBS는 뭘 믿고 탄거야?"
다른 언론사 기자들에게 이렇게 쪼이고 있는 사이, 서울에서 온 검찰 출입 신문기자 휴대전화에 검찰 공보관이 보낸 로밍 문자 메시지 도착!
"김경준 탑승 아시아나 201편 오후 6시반 인천 도착"
그 순간 허탈함에 빠진 기자들의 황망한 표정이란! 기자들은 순간적인 아노미 상태를 거쳐 곧 아시아나 항공에 분풀이를 시작했습니다.
"지점장 나와!" 폭도(?)로 변신한 기자들에 놀란 아시아나 여직원들. 전화통 붙잡고 경찰을 불렀습니다.
기자들이 하도 씩씩거리면서 난리를 피니까 출동한 공항 미국 경찰들도 황당한 듯 쳐다만 보다가 자기들끼리 눈짓을 했습니다.
피말리는 탑승 취재는 이렇게 끝났습니다. 이제 13시간 뒤에는 기내 촬영과 인터뷰를 통해 김경준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김경준은 13시간 반 동안 비행기 좌석에 앉지 않았습니다. 오동헌 특파원은 비행기를 이잡듯 뒤졌지만, 끝내 김경준을 찾지 못했습니다. 나중에야, 김경준은 비행기 지하에 있는 승무원 휴게실(이걸 항공사에에서는 벙커라고 부른답니다)에 숨은채 서울로 날아갔습니다.
결국 SBS의 취재는 '절반의 특종'으로 끝났습니다. 그래도 의미있는 취재였다고 자평합니다. 치밀한 취재와 정확한 판단력. 비록 빛은 바랬지만, 오동헌 특파원의 발과 머리가 만들어낸 소중한 '절반의 특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