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영국에서 띄우는 세 번째 편지입니다. 오늘은 영국에서 운전하는 얘깁니다. 사실 제 편지의 타이틀은 '김수현 기자의 문화가산책'으로 돼 있는데요, 앞으로 1년간 영국 연수 기간 중에는 제 글이 꼭 '문화가' 산책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문화가산책'을 '영국일기' 정도로 바꾸면 어떨까도 생각해 봤는데, 어차피 1년 뒤에는 원상복귀하게 될 것 같아서 그냥 놔두려고요. 여러분 의견은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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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교통 시스템이 우리나라와는 많이 다르다.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고, 차들이 좌측통행을 한다. 길을 건널 때 한국에서 습관 든 대로 왼쪽을 먼저 쳐다보면 지나가는 차의 꽁무니만 보게 마련이다. 보행자일 때도 어색하지만, 운전자가 됐을 때도 어색하고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는 운전 경력 10여 년이지만, 여기서는 초보 운전자다.
신호등 체계도 다르다. 여기서는 한국에서 우회전할 때처럼 아무 때나 좌회전을 할 수 없다. 초록색 신호를 기다려야 한다. 사거리에는 우리 식의 신호등은 없고, 보통 '라운드어바우트'라고 불리는 작은 로터리가 있다. 먼저 진입하는 순서대로 이 라운드어바우트를 중심으로 차들이 각자 갈 길로 돌아나간다. 처음에는 어려웠는데, 조금 지나고 보니 나름 효율적인 주행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고차를 살 때도, 영국 사람들은 대부분 기어를 수동으로 조작하는 차를 몰고 다니니, 오토매틱 트랜스미션 차량을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안 그래도 주행 방향 때문에 헷갈리는데 기어까지 수동으로 조작해야 한다면 운전이 더 어려워질 것 같았다. 별로 선택의 여지없이 오토매틱 차량 나와 있는 몇 대 중에 고를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그래도 며칠 운전해 보더니 금방 적응하는 눈치였는데, 나는 조금 더 걸렸다.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길눈 어둡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데, 여기서는 지리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운전 자체에 너무 신경을 쓰다 보니 그런가. 아니면 ‘제인’한테 너무 의존해서 그런가.
'제인'은 내비게이션 시스템을 우리끼리 부르는 말이다. 근처 지리를 통 모르니 안 되겠다 싶어 차를 사자마자 내비게이션 시스템도 구입했었다. 우편번호나 주소만 쳐서 넣으면 스크린에 지도가 나오고, 예쁜 여자 목소리가 길을 안내해 준다. “Cross the roundabout, second exit" "Keep right" "Take the exit" 이런 식으로.
사실 길 안내는 남자 목소리로도 들을 수 있게 돼 있다. 은우는 '남자 목소리로 하자'고 했지만, 남편은 '그래도 예쁜 여자 목소리가 더 좋잖아' 하면서 여자 목소리를 고수했다. 나도 어느새 이 목소리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 우리는 이 목소리를 '제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하교하는 아이들을 데리러 남편 없이 혼자 갔던 날, 이제는 웬만큼 길도 익숙해진 것 같아 한 번 다른 길로 가 보자고 갔는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고속도로가 나왔다. 차를 돌릴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고속도로를 타면서도 어이가 없어 혼잣말로 '아이고'를 연발했다. 아이들은 주행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뒷좌석에서 잠이 들었다. 급하게 제인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은우 학교 처음 찾아갈 때도 제인의 도움을 받았었다. 그런데 며칠 은우를 데리고 다니다 보니 길이 익숙해져서 이제 제인 없어도 될 것 같아 방심하고 꺼놓았던 게 탈이었다. 결국 나는 제인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고속도로를 빠져나왔다. 대학교 앞에서 나와 만나기로 했던 남편은 30분 넘게 길에서 기다렸다며 투덜거렸다.
어찌 됐든 우리 가족이 영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여기저기 차를 타고 쏘다닐 수 있었던 것은 제인 덕분이다. 비교적 가까운 스트랏포드 어폰 에이븐이나 워릭 캐슬은 물론이고, 첼튼엄과 코츠월즈, 그리고 우리 집에서 네 시간 반 북쪽으로 달려야 하는 레이크 디스트릭트까지 다녀왔을 정도이니. 그래서 우리는 어디 갈 일이 생기면 태평하게 ‘주소만 알면 제인한테 물어보면 되지’ 한다.
하지만 며칠 전 버밍엄 심포니 홀에 갔을 때, 제인이 별로 힘을 못 쓰는 곳도 있다는 걸 알았다. 버밍엄은 런던 다음가는 대도시라 교통이 굉장히 복잡했다. 갈림길에서 조금만 머뭇거리면 뒤에서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려대는 차도 제법 많았다. 그런데 제인은 버밍엄에서는 자꾸 한 박자씩 늦었다. 차는 이미 라운드어바우트에 진입했는데, 다음 라운드어바우트에서는 오른쪽으로 가라고 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말이다. 결국 우리는 버밍엄에서 엄청 헤매다가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리 동네로 돌아오니 마음이 편안하다. 워릭 대학교가 있는 이 지역은 그러고 보면 엄청 시골인 셈이다. 별로 과속하는 사람도 없고, 뒤에서 경적을 울려대는 사람도 없고, 웬만하면 양보하고, 심지어는 역주행을 해도 느긋하게 기다려 준다. 새삼 서울에 살 때와 '삶의 속도'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제인과 함께 이렇게 영국 시골 동네를 누비다가 서울에 돌아가면 다시 반대가 되는 주행 방향에다, 복잡한 교통 사정, 성질 급한 운전자들에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제인은 영국과 유럽 지리만 알고 있으니 서울에서는 도움이 안될 터이고. 그러고 보니 영국 생활 한 달만에 느릿느릿 시골 사람이 다 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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