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오전 10시. 서울은 6일 자정이다. 워싱턴에서 뉴욕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 한국정부의 차관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그리 높지도 않은 그가 지금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뉴욕에 도착해 있다.
김계관. 기자로서 그를 취재하는건 이번이 세 번째다.
제네바 4자회담, 베를린 4자회담에 이어 이번엔 뉴욕이다. 그동안 10년이 흘렀다.
과거 4자 회담 때 김계관 부상은 무방비(?)로 언론에 노출됐었다.
카메라만 들이밀면 일장 연설을 하던 그다.
영어로 물으면 영어로, 불어로 물으면 불어로 대답한다. 물론 한국기자에겐 우리말로 대답한다.
기자에겐 북한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는 좋은 취재원이다.
그는 기자들을 피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든 인터뷰를 할 준비가 돼 있다.
북한 인사 치고는 유연하고 논리정연하고, 덜 감정적이다.
이번엔 어떤 어록(?)을 내뱉을까? 그만큼 낙종할 가능성도 크다. 움직이는 동선마다
지키지 않으면 기자들끼리 표현으로 ‘물 먹기’ 십상이다.
뉴욕은 체감 온도가 영하 15도였다. 3월 초순 날씨 치곤 너무 춥다.
간간이 눈발까지 날린다. 세찬 강풍이 온몸을 파고 들었다.
역사적인 북미회담이 열린다는 유엔주재 미국대표부로 향했다.
이미 일본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다.
한 30분 기다리다 보니, 추위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간간이 날리던 눈발은 폭설로 변했다. 목도리를 여미고 장갑을 끼어도 견딜 수가 없다.
일본기자들은 아예 에스키모 외투를 입고 있다.
아차! 뉴욕 일기예보를 안 챙긴 게 불찰이다.
뭐 떨듯 떨면서 기다리길 한 시간. 미국인이 나온다. 회담 장소가 바뀌었단다.
우왕좌왕! 새 회담장소라는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34층 건물을 세로로 나눠서 반쪽은 호텔, 반쪽은 초호화 아파트란다.
입구가 4군데나 된다. 놀란 벨보이들이 총출동해 기자들을 막기 시작한다.
김계관은 어디로 들어가나? 힐 차관보는 어디에 있나?
모든게 미정이란다. 간간이 미 국무부 관리들이 보이는 걸 봐서 맞긴 맞는 것 같은데...
아무리 붙잡고 물어봐도, 모두 입에 지퍼를 채웠는지, 묵묵부답이다.
지나가던 뉴욕 사람들이 모두 묻는다. “도대체 누가 오느냐?”
‘김계관’이라면 누구냐고 반문해도, ‘북한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인다.
4시가 넘자 미국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나타난다.
기자들을 밀치면서 입구를 막아선다. 그리고 영화에서 보는 검은색 밴과 승용차들이
줄줄이 들어온다. 번호판을 보니, 뉴욕이 아닌 워싱턴이다. 미 국무부 소속이다.
“오는구나” 취재진이 잔뜩 긴장한다.
기다리는 리무진은 안오고 웬 택시 한 대가 들어선다.
“웬 택시?” 어리둥절한 사이 카메라 포토라인을 넘어선 택시가 호텔 앞에 멈춰섰다.
내린 사람은 다름아닌 크리스포터 힐 미 국무부 차관보다.
“으악! 아니 어떻게, 왜 택시를 타고 나타나지?” 묻기도 전에 힐은 쏙 들어가버린다.
(회담이 끝난 뒤 한 기자가 힐에게 왜 택시를 타고 들어갔냐고 물었다.
힐은 눈을 찡긋하더니, “그럼 내가 차를 렌트하랴? 뉴욕 택시기사는 세계최고다”라는
조크를 남겼다. 힐은 미워하기 힘든 선수(?)다.)
이번엔 김계관 차례다. 기다리던 리무진이 나타났다. 김계관이 맞다.
그런데 경호요원들이 막아선다. 김계관과 취재진의 거리는 30미터도 넘는다.
아예 인터뷰를 못하게 하겠단 뜻이다.
6박7일 동안 김계관 부상의 미국 일정은 모든 게 이런식이었다.
취재진은 철저히 봉쇄됐고, 국무부는 김 부상에게 장관급 이상의 특별경호를 붙였다.
DSS 미 국무부 특별경호팀이다. 백악관 경호실 못지않게 폼(?)을 잰다.
중무장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눈이 내리는 날씨에도, 어두운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쓰고 폼을 잡는다. 김 부상이 위험에 노출돼 있어 보이진 않는다.
몰려드는 취재진을 막는 게 이들의 임무처럼 보였다.
10년 만에 보는 김 부상은 많이 늙어보였다. 그러나 표정은 훨씬 안정돼 보였다.
이번엔 사전 분위기가 좋아서였을까? 표정은 더욱 밝았다.
북미회담 이틀은 이렇게 흘러갔다.
회담이 열린 장소는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 펜트하우스’였다.
유엔주재 미국대사 관저란다. 그게 지금은 비어있다.
볼턴 대사가 물러난 뒤 공석이기 때문이다.
볼턴과 힐은 미 국무부 안에서 악연이다.
심하게 표현하면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나는 사이다.
볼턴은 대북 강경파, 힐은 대북 협상파다. 싸울 수 밖에 없다.
볼턴은 이번에도 CNN에 나와 6자회담이 잘못됐다고 비난했다.
힐에게 질문했다. 볼턴의 비판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힐은 한마디로 싸늘하게 대답했다. “He is an another civilian"
한 마디로 민간인이 뭘 안다고 떠느냐는 식이다.
그런 볼턴이 살던 대사관저에서 힐과 김계관이 밥을 먹으며 북미회담을 열었으니...
외교는 참 묘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수가 없다.
회담을 마치고 나온 김계관 부상의 얼굴이 상당히 밝다.
기자들이 조금씩 김 부상이 걸어나오는 방향으로 밀고 들어갔다.
경호원들이 약간씩 밀리기 시작한다. “OK! 더 밀어!” 무언의 신호가 오간다.
이제 김계관과의 거리는 5미터로 좁혀졌다.
기자들이 소리치기 시작한다. 김 부상이 걸음을 멈췄다.
“됐다. 저거다. 저건 한 마디 하겠다는 뜻이다”
느낌이 맞았다. 김 부상이 입을 열었다.
“회담 분위기는 좋았고, 건설적이었으며, 진지했습니다”
드디어 제목이 나왔다. 김계관은 이런식이다. 저건 돌발 발언이 아니다.
계산되고 준비된 발언이다. 아마도 내일 아침 방송, 신문 할 것 없이 이 발언이 제목으로 뽑힐 것이다.
김 부상은 굶주린 야수에게 먹잇감을 던져주듯 한 마디 던지고 차에 몸을 실었다.
그날밤 김 부상은 숙소인 밀레니엄 호텔에서 약간 불콰한 얼굴로 나타났다.
반주로 한잔 걸친 표정이다.
귀국길에 오르기 위해 6일 새벽 5시20분 호텔을 나온 김 부상은 기다리던 취재진들에게 “추운데 뭐하러 기다리느냐” “건강하시라”면서 공항으로 떠났다.
김계관 부상이 떠난 뒤 기자들과 우리 정보기관 사람들, 외교관들은 더욱 바빠졌다.
힐이 만난 수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접촉하면서 김계관을 통한 북한의 변화를 취재하고, 확인하고, 감지하기 위해서였다.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 키신저 전 국무장관, 카트만 전 한반도 대사,
프리처드 박사... 따져보니 김계관은 미국에서 한반도에 한발 걸친 주요 인사들을 거의 모두 만난 것 같다.
한결같이 “김계관이 변했다. 북한이 변했다. 이번엔 정말 분위기가 좋았다”고 전한다. 다행이다. 모두 안도하는 분위기다.
김계관을 떠나보낸 뒤 나도 워/>워싱턴에선 하원 군사위원회가 벨 주한미군 사령관을 상대로 청문회를 열고 있었다.
북한은 과연 핵 폐기 약속을 지킬것인가?
힐은 평양을 방문할 것인가?
베이징 6자회담은 어떻게 진행될까?
남북 정상회담은 성사되고, 한반도 평화체제는 정착될 것인가?
수많은 명제와 의문이 기차 창문을 스쳐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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