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하반기부터 충무로에 돈줄이 마르기 시작했다는데 여전히 개봉 영화는 많습니다. 새해 들어 제 책상 달력의 첫장 1월은 벌써 말일까지 빡빡하게 시사회 스케줄이 적혀 있습니다. 1월에 시사가 없는 날은 휴일 제외하고 18일과 25일 단 이틀 뿐이네요. 하루에 두편 나란히 열리는 날도 있어 대략 20편 정도 되는군요. 영화 공짜로 그렇게 많이 봐서 좋겠다는 말을 종종 듣는 처지에서 무슨 배부른 소리냐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고충 내지는 애로사항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의 철칙이 나옵니다. 아무리 좋은 분야도 '일'이 되면 고충이 있다는 점입니다.
야구 좋아하는 분들이 야구 담당기자 보면 매일 공짜로 야구 보는게 부럽겠지만 야구 담당 기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야간 경기 연장전이라고 합니다. 마감시간에 쫓겨 빨리 기사를 송고해야 하는데 그야말로 '피말리는' 접전에 스트레스 많이 받고 퇴근 시간 늦어지고 하니 그렇겠지요. 역시 야구는 관중석이나 텔레비전 앞에서 캔맥주나 팩소주에 오징어 씹으며 보는게 제일 낫다고 합니다. (사회부 기자로 한여름 삼복더위에 휴일 스케치 취재나가 훌렁 벗은 살들과 파란 물이 넘실대는 수영장에 넥타이 메고 구두 신고 들어가 인터뷰해 본 경험은 짜증과 스트레스 만점이었죠.)
같은 얘기를 적용하자면 역시 영화는 주말이나 휴일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 친구와 함께 진짜 볼만한 영화 내 돈내고 보는게 최고라는 거~~. 너무 자주 많이 보면 두뇌 용량 한계상 그 영화가 그 영화같고 본 영화도 중요 부분이 뭉텅이로 잘려나가거나 나름대로 짜깁기로 입력되기도 하고 제목과 배우 이름 헷갈리고 아예 생각 안날때도 많습니다.
이번 주에도 7편이 개봉됩니다. 예매율을 보니까 연말연시 쌍끌이 흥행을 주도했던 [박물관이 살아있다]와 [미녀는 괴로워]가 3-4주 만에 밀리고 신작들이 상위권에 랭크됐습니다. 편수는 많지만 제가 본 영화 가운데 놓치면 후회할 만한, 강력하게 추천할 만한 영화는 안타깝게도 없습니다.
허브
20살 처녀 상은(강혜정)은 지능이 7살에 멈춰버린 장애를 갖고 있습니다. 꽃집을 하는 엄마(배종옥)와 단둘이 삽니다. 동화 속 세계에 푹 빠져 살면서도 종이접기 등을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는 착하고 바지런한 상은 앞에 동화 속 왕자님이 나타나는데 다름 아닌 껄렁거리는 교통의경(정경호)입니다. 이 녀석은 상은을 국제변호사로 착각하고 호의를 갖고 접근하고 상은은 진짜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가꿔나가려고 하지만 상은의 장애를 알고 피하게 되고 상처를 받습니다. 하지만 이 상처보다 더한 시련이 상은에게 닥칩니다.
요즘 영화답지 않게 많이 착한 영화인데 고리타분하거나 낡은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 것은 강혜정, 배종옥 두 연기파 배우의 카리스마가 그만큼 강렬하기 때문입니다. 상은의 상대역으로 나오는 정경호도 [폭력써클]등의 작품을 거치며 연기의 맛을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중간 중간 깜찍하고 웃긴 에피소드들이 진행되고 3분2를 넘어서는 지점부터는 약한 사람들이라면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눈물을 펑펑 쏟게 만듭니다.
강혜정이 얼굴 바뀐 것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은데 정작 본인은 집에 컴퓨터가 없어서 인터넷에 접근 못해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얼굴로 승부하는 배우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연기력으로 승부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본인 설명은 예뻐지기 위한 성형이 아니라 앞니와 잇몸이 튀어나와 자꾸 주저앉는 증상을 바로잡는 치료였다고 말합니다.
아뭏든 이런 말이 그리 어색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장애 연기를 훌륭하게 보여줍니다. 배종옥도 관록에 걸맞는 연기를 보여주는데 병원 로비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링겔 스탠드를 끌고 걸어가는 뒷모습에서까지 카리스마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강혜정 본인이 분장한 동화 속 인어공주, 백설공주 등 캐릭터들과 상은이 대화를 나누며 갈등하는 장면과 놀이 공원에서 깻잎머리 불량 여고생들과 마주치는 장면이 압권입니다.
데스노트:라스트 네임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1편이 100만명 가까운 흥행성적을 거뒀습니다. 2편은 완결편인데 원작만화와는 다른 결말 처리를 해서 궁금증을 더하고 있습니다. 1편이 2편의 전초전 내지는 오픈게임 성격이라면 2편은 그야말로 완결편이라고 할만큼 본격적인 대결과 새로운 데스노트 소지자 출현,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하는 반전과 대단원까지 두 시간 넘는 긴 상영시간이 별로 길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재미있게 구성됐습니다.
다만 이야기 전개에 치중하다보니 자막 읽으랴, 상황 이해하랴 안구와 머리가 다소 바쁘게 움직여야 하고 영화가 끝나고 나면 다소 피곤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의 템포가 중반까지는 다소 느리거나 정상적이다가 막판 20분을 남겨둔 지점부터 급박하게 전개돼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주인공 라이토를 보면 한국 배우들과는 사뭇 다른 일본 배우들의 연기 스타일이 이런거구나 느낄 수 있습니다. 엘 역의 배우는 영화 내내 다크 초콜릿, 설탕 듬뿍 넣은 차, 꿀(또는 시럽)을 잔뜩 바른 떡꼬치같은 걸 먹어대는데도 깡마른 몸매를 유지하는 설정은 청소년들에게 다소 유해한 잘못된 정보를 줄 우려가 있습니다.
묵공
유덕화, 안성기 주연의 한중일 합작 대작 무협 영화입니다. 평화사상을 연구하고 이를 실제에 전파하고 적용하려 노력하는 묵가 사상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항엄중(안성기) 장군이 이끄는 조나라 10만 대군이 연나라를 치러가다가 전략적 요충지인 인구 3천의 양성을 공략하려 합니다. 묵가측에서는 지략가 혁리(유덕화) 한사람을 달랑 파견하자 양성 사람들은 어이없어하지만 혁리는 치밀하고 영리한 계략으로 조나라 대군의 계속되는 공세를 버팁니다. 이렇게 잘만 나가면 뭐가 영화가 아니라 그냥 옛날 이야기에 그치겠지요. 혁리가 백성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자 이를 불안하게 여긴 양성의 군주와 간신배들은 그를 모함하는 음모를 꾸밉니다.
촬영과 음악도 훌륭하고 대규모 전투 장면도 웅장합니다. 하지만 단순한 전쟁 액션 활극만이 아니라 반전 평화 사상을 주제로 깔고 있어 가볍지 만은 않습니다. 입맛 까다롭기로 유명한 우리나라 관객들 눈높이에는 어쩐지 한 두개 이가 빠져 서운하면서 어색한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블러드 다이아몬드
아프리카 시에라리온, 다이아몬드를 둘러싸고 정부군과 반군이 하루도 쉬지 않고 맞섭니다. 죽어나는 것은 평범한 민중들이죠. 반군에 끌려가 다이아몬드 광산에 일하던 남자가 호두알 만한 핑크 다이아몬드 원석을 발견하고 이를 용병출신 밀매업자(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반군 우두머리 등 각자 탐욕에 휩싸여 소동이 일어납니다.
피에 젖은 다이아몬드는 사지도 말고, 팔지도 말고, 끼고 다니지도 말자는 대의명분을 주제로 한 영화로 반군들의 무자비한 학살행위, 실감나는 전쟁 장면에다가 디카프리오라는 스타로 포장했습니다. 전자의 목적은 좀 어정쩡하고 후자의 목적은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디카프리오는 [타이타닉]이후 출연하는 영화마다 죽어 나갑니다. 동정표를 덤으로 얻으려는 전략인지 뭔지 모르겠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소년병들의 참혹한 실태는 충격적입니다.
이밖에 테러범죄에 맞서 싸우는 수사관이 시간여행을 통해 범죄를 예방하고 범인을 색출하는 과정을 그린 SF 액션스릴러 영화 [데자뷰]와 먼 옛날 용을 타고 싸움을 벌이는 전사들의 무용담을 그린 환타지 영화 [애라곤], 생동하는 청춘들의 풋풋한 사랑을 그린 일본영화 [하니와 클로버]가 개봉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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